168화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1황비의 밑에서 자라면서 자신도 황비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냈을까? 그때만 해도 2황자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친하게 지냈다니 말이다.
아니면 1황비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더 착한 아이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닐까?
자신을 아껴주긴 하지만 보호해 주지는 못하는 1황비.
친모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강하게 키우려고만 하는 황제.
자신이 꺾이길 바라며 계속 암수를 뿌리는 황후.
“결국 이 인간도 엄청 삐뚤어진 인간이겠군.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솔직히 친족 혐오가 생기는 것도 이해가 갈 정도야.”
물론 이런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정확한 사정을 이해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황제의 자식 교육은 완전히 망했다는 거였다.
“자기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건 아니지. 하… 엄청 꼬였네. 이래서야 황태자가 황제가 된 후에 친족들을 다 정리해 버려도 할 말이 없잖아? 거기에 끼어있는 앤하고 2황자는 또 무슨 죄냐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솔직히 2황자도 불쌍하긴 마찬가지였다.
가장 먼저 태어난 황자인데도 황위 계승권이 없기 때문에 황태자가 되지 못하고 황태자가 태어나자마자 2황자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차기 황제로 유력한 자가 황태자고 그 뒤로는 나이순으로 2황자, 3황자로 정해지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이게 가능했다.
“이것도 웃기네. 누가 이렇게 정한 거야? 만약 3황자가 황태자였으면 지금 황태자가 3황자가 된다는 거잖아?”
그나마 다행인 건 1황비가 그런 상황에도 황태자를 아껴줬기 때문에 갱생(?)의 여지는 있다는 거였다.
“퀘스트 기한에 황태자의 확답이란 문구가 있었지. 이건 결국 황태자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황태자가 2황자를 살리기로 마음먹으면 퀘스트가 완료된다는 거지.”
결국 황태자가 2황자를 살리기로 마음먹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당연히 황태자가 2황자를 죽일 이유를 없애는 것이고.
아무리 모함을 받는다고 해도 황태자의 의지가 굳건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퀘스트에 그런 문구가 들어가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인 거 같았다.
“이런 상황이니 어쨌든 공도 세워 놓는 게 좋겠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으니…….”
로빈은 주노가 참고하라고 별첨한 황실에 관련된 야사나 옛이야기를 읽으며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푸시 캣츠에 허름한 복장의 어수룩해 보이는 남성이 방문했다.
처음에는 뭔가 긴장한 듯이 쭈뼛대던 남자는 술이 좀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런저런 헛소리를 두서없이 지껄여대고 있었다. 시중드는 여성이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의 허풍이었지만 뭔가 묘한 분위기를 놓칠 푸시 캣츠의 전문가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남자는 거나하게 취한 채 귀여운 여자 하나를 끼고 객실로 올라갔고 화끈한 봉사에 녹초가 된 채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잠시 후.
남자가 곯아떨어진 방 한쪽에 위치한 작은 문이 살짝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 둘이 소리 없이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남자가 벗어놓은 외투에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는데.
“이게 뭐야? 마법 서신이잖아? 설마 해서 와봤더니……. 이거 진짜인가?”
“시간이 없다. 빨리 해제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신속하게 움직인 남자들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서식을 해제하고 안에 담긴 문서를 꺼냈다.
“미친……. 암호야. 복잡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시간은 좀 걸리겠어.”
“우선 베껴. 해석은 나중에 한다.”
“무슨 그림도 있는데. 이건 어쩌지?”
“그것도 베낀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니 그대로 윗선에 보고해야지.”
바로 문서를 베끼고 다시 역순으로 서식을 복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시간 남짓.
그때까지도 술에 잔뜩 취한 채 노곤노곤해진 남자는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OK. 클리어. 바로 빠져나가.”
그리고 그 서신은 남자의 외투 깊숙한 곳, 처음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남자는 자연스럽게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품 안에 얌전히 보관되어 있는 서신을 손끝으로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푸시 캣츠를 나섰다.
뭔가 불안한 듯 주변을 살피던 남자는 북쪽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 그렇게 황도를 떠났다.
* * *
그날 밤.
암호로 된 서신을 해석해 대강의 내용을 파악한 푸시 캣츠의 주인 로즈는 묘한 표정으로 황태자를 찾았다.
때마침 황태자는 자신의 참모들과 어떻게 하면 조셉 공작을 얽어맬 수 있을지 논의하는 중이었기에 그곳에는 황태자가 믿는 수족이 모두 모여있는 상황이었다.
“응? 이상한 걸 발견했다고?”
“예. 주인님.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줘 봐. 뭔데 그렇게 당황하는 거야?”
황태자는 로즈가 공손하게 바친 서신을 열어 내용을 살폈다.
“암호로 된 서신이군. 완벽하게 해석된 건 아니고. 하지만 이 정도면 대충 내용을 짐작하기에는 무리가 없겠어. 협력… 감사… 대규모… 약속… 습격… 이건 병력을 모아 누군가를 습격하겠다는 서신이군. 이걸 어디서 구했지?”
로즈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모두에게 솔직히 알렸다.
그러자 황태자는 물론 다른 참모들까지 이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의 로즈처럼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셉 공작이랑 힐데 후작이라고요? 그쪽의 연대는 진작에 깨진 거 아닙니까?”
“우리가 알기론 그렇지. 그런데 이런 게 나왔단 말이지.”
“우선 그 사람이 조셉 공작가의 사람이 확실하긴 합니까? 힐데 후작에게 간 게 분명하고요?”
너무 예상 밖의 일이라 바로 판단할 수 없었던 크라우 백작 자제, 조단 크라우는 가장 먼저 정보의 출처부터 확인했다.
“그게… 아무리 저희라도 기사나 병사도 아닌 하인이나 일꾼들 하나하나를 모두 파악하고 있진 못해요. 특히 조셉 공작가 같은 경우에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사람들이 바뀌는 곳이라서요.”
“흠.”
“하지만 그가 그날 조셉 공작가에서 나서는 걸 목격한 사람이 있더군요. 그리고 힐데 후작의 영지까지 마차를 타고 갔고, 영주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어요.”
“그 정도면……. 어느 정도는 신뢰할 수 있겠군요.”
“지금 상황이라면 기사가 아니라 하인에게 일을 맡기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야. 만약 기사였으면 황도를 나서기도 전에 우리 쪽 사람이 따라붙었겠지.”
“그런데 그럴 필요도 없이 저희한테 이 서신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의심하고 있는 건 조셉 공작의 일꾼이란 놈이 이 서신을 들고 푸시 캣츠에서 신나게 허리를 흔들고 다음 날 떠났다는 거였다.
도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말도 안 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둘의 연계가 아직 살아있다는 건데 뭐 하러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합니까? 그냥 통신 수정구를 쓰면 되는데요.”
“통신 수정구에는 사용 기록이 남는데다가 판매할 때 일련번호까지 기록합니다. 만약 실패까지 염두에 뒀다면 조셉 공작으로서는 도망칠 구멍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쪽으로는 철저한 자가 아닙니까?”
“수정구를 사용한 후 파괴해 버린 다음에 잃어버렸다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나무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라 두 참모가 옥신각신하는 사이에도 황태자는 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셉 공작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실을 하나둘씩 다시 떠올려보는데.
황태자가 알기로 조셉 공작은 기본적으로 통신 수정구를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회선 간섭을 통해 도청할 가능성도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생에서도 분명 통신 수정구보다는 서신을 사용하는 빈도가 높았다. 특히 이런 중요한 일이라면 더욱 그랬고.
“로즈,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봐. 녀석이 가게에 들어서고 돌아갈 때까지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전부. 그리고 원본 서신이 어땠는지도.”
로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 전부를 세세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설명이 끝나자 황태자와 두 참모 모두 나지막하게 한숨을 터트렸다.
“마법 서식이라……. 어쨌든 장난은 아니라는 거군요.”
“에이, 그냥 그거잖아요. 서신을 전해주는 대가로 큰돈을 만지게 된 일꾼 놈이 황도를 떠나기 전에 꿈에서나 그리던 푸시 캣츠에서 신나게 몸을 풀고 출발한 거죠. 최소한 생각이란 게 있으면 조셉 공작이 무서워서라도 황도에는 이제 얼씬도 못 할 테니 즐기려면 그날뿐이잖아요?”
“당연히 일이 끝나면 놈을 없애라고 명령했을 겁니다. 그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으면 그렇게 불안에 떨었던 것도 이해는 가는군요.”
“남자는 다 마찬가지예요. 죽기 전에 몸이라도 풀고 죽으려고 한 건데 그걸 그렇게 의심할 필요가 있나요?”
“저도 마님의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실제로도 그런 비슷한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레니아 공녀와 로즈, 두 여성이 남성의 본능에 대하여 지적하자 다른 남성들도 딱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큰일을 앞두고라면 불안감 때문에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저 서신이 사실이라면 한 명만 투입한 건 아닐 겁니다. 어차피 잘못 열면 바로 타버리는 서신이니, 여러 명을 투입했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로즈, 마법 서식의 난이도는 어느 정도였지?”
“최고급이었어요. 솔직히 저희 쪽 전문가가 아니라면 손써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래도 이쪽으로는 저희가 마탑보다 낫잖아요?”
“그렇군.”
“결국 둘 중 하나입니다. 공녀님 말씀대로 일을 맡은 남자가 최후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 푸시 캣츠에 들른 걸 저희가 운 좋게 캐치했든지, 아니면 정말 작정하고 저희를 속이려는 누군가가 있든지.”
젝트가 상황을 정리했지만 조단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런 짓을 해서 이득을 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없죠. 그게 문제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끈 떨어진 힐데 후작을 이렇게까지 견제할 만한 사람을 찾기는 힘들었다. 자신들 외에 힐데 후작을 그 정도로 미워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있다면 오히려 조셉 공작 정도?
하지만 그건 너무 웃기는 일이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상황에서 로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서신과 함께 나온 문양이 있었는데…….”
“문양?”
“네, 이게 뭔지 아직 알 수가 없어서 조사 중이었어요.”
로즈가 내민 문양을 확인한 황태자는 잠시 허탈하게 웃더니 자신의 참모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힐데 후작 놈이 우리를 속이고 숨어서 뒤통수를 칠 모양이군. 이 서신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준비해야겠어.”
황태자가 던진 종이에는 거꾸로 선 검은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다.
조셉 공작과 3황자파가 전생의 황태자를 처단할 때 들고 들어왔던 그 저주스러운 문양.
지금은 그들 외에 황태자 자신밖에 모르는 문양이 나온 이상 누군가가 그를 속이기 위해 수작을 부린 거라는 해답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 * *
여느 때와 같이 로빈이 앤과 함께 교정을 거닐면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데 저쪽에서 귀족 자제 하나가 굳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저런 경우 앤을 걸고 느닷없이 결투를 신청하거나, 아니면 앤을 놓아주라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로빈에게 다가와 친분을 다지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로빈과 대놓고 적대적인 3황자가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는 가운데 그런 만용을 부릴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직 황위의 방향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부로 떠날 변경백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 3황자의 눈 밖에 나는 건 피하고 싶을 거다.
사실 대부분이 남작 자제인 그들로서는 오히려 권력과 적당히 멀어지는 게 더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3황자 옆에 딱 붙어있는 날파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썩은 동아줄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걸 보니 그것도 참. 뒤에 조셉 공작이 있으니 황제가 되지 못해도 막후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응?”
앤에게 지분거리거나 저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 같아 로빈이 한껏 인상 쓰고 있는데 슬쩍 쪽지 하나를 건네주고 바로 사라지는 귀족 자제.
이건 또 무슨 신선한 시추에이션이냐?
“호모나 세상에?”
“아니야!”
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그 자리에서 바로 쪽지를 열었다. 무슨 쪽지길래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이런 이상한 짓을 벌이는지 너무도 궁금해서였다.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