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음……. 황태자 전하께서 당장 오라는군. 장소가… 푸시 캣츠네.”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히네마 남작 자제였죠? 크라우 영식의 측근이에요.”
참 아는 것도 많다. 가만 보면 이 여자는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귀족 자제나 영애들의 신상을 꿰고 있는 거 같았다.
그만큼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거겠지? 요즘에는 물론 나와의 데이트에 집중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황태자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호출한다는 건 그들의 전략에 큰 변화가 있음을 의미했다. 본격적으로 영지 순방 준비에 들어간 후에는 자신에게 따로 연락을 넣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정성껏(?) 준비한 서신을 보고 생각이 바뀐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청한다라……. 벌써 황태자 전하 근처에 조셉 공작의 눈이 깔린 건가? 하긴 그쪽도 사활을 걸었을 테니.”
다른 건 몰라도 황태자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나 역시도 궁금했다. 나야 그저 소소한 조건 하나를 바꾼 것에 불과했고, 모든 건 황태자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그가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지는 설명을 듣기 전까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를 몰래 불렀다는 건 확실히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
“네? 아, 아니에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황태자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앤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인데.
“푸시 캣츠에 가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걱정 마. 일만 보고 바로 돌아올 테니까. 내 정실이 될 여자는 너니까 그런 엉뚱한 곳에서 풀진 않는다고.”
“예? 저… 정실이요? 그런…….”
“그럼 내가 장난치는 줄 알았어?”
농밀하고 뜨거운 페팅에도 가쁜 숨을 내뱉으며 호응할 뿐 가볍게 받아들이던 여자가 이런 거에는 또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다.
아, 이거 은근히 프러포즈처럼 돼버려서 그런가? 낭만이나 반지는 없지만, 내용만 보면 좀 그러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넌 내 거야. 그러니까 한눈팔면 곤란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로빈은 아직도 진정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는 앤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후 바로 황태자가 기다린다는 푸시 캣츠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앤은 그 자리에 서서 그런 로빈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었다.
* * *
푸시 캣츠에 도착하자 바로 밀실로 안내되었다.
객실 너머에 밀실이 있는 이중 구조로, 누구도 알 수 없는 푸시 캣츠의 비밀 장소인 거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황태자는 물론 크라우 백작 자제인 조단과 젝트까지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그레이츠 백작.”
“위대한 황금 독수리에 영광을.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사실… 상황이 좀 변해서 자네를 청했네. 아무래도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 거 같아.”
거두절미하고 목적부터 말하는 태도는 역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도움이라. 아무래도 병력 문제인가?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무래도 조셉 공작이 힐데 후작까지 끌어들여서 일을 벌일 모양입니다.”
로빈의 질문에 대답한 건 황태자가 아니라 조단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의 입안자가 조단인 모양이다.
“네? 그럴 리가요? 둘은 완전히 결별한 게 아니었습니까?”
“저희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속임수를 쓴 거 같습니다. 사실 특별한 경로로 놈들이 아직도 연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파보니 그전에도 몇 번의 서신 왕래가 있었더군요.”
당연히 왕래가 있었겠지. 조셉 공작이 힐데 후작에게 질척대고 있었으니까. 힐데 후작은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만 끌고 있고.
“저런…….”
“그래서 상황이 좀 변했습니다. 조셉 공작이 자신의 본거지인 남부에서 일을 벌이진 않을 거라 확신해서 상대가 정예를 이용해 습격할 거라 계산한 건데, 이번 습격이 힐데 후작과 연계되어 있다면 아무래도…….”
“북부에서 습격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힐데 후작이 상당한 병력을 동원한다니 저희의 대응도 달라져야 하고요.”
두 참모가 번갈아가며 설명하는 와중에도 황태자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만약 상대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포위한 후 기사들을 계속 투입하면…….”
“네, 황태자 전하라도 좀 곤란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희의 첩보에 의하면 힐데 후작은 북부로 들어간 후 지속적으로 전력을 늘리고 있더군요. 원래부터도 기사 전력의 수가 만만치 않았는데 자유 기사들한테까지 손을 내밀어서…….”
“대략 기사의 수만 600 이상. 만약 거기에 조셉 공작의 기사들까지 합쳐진다면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 완성됩니다.”
기사의 수가 600이라. 벌써 그 정도나 모았다고?
솔직히 좀 어이없긴 하다. 대체 돈을 얼마나 긁어모아놓은 건지 감탄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대부분이 돈을 보고 모인 어중이 기사들이겠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다.
예전에 같이 상급 마수를 토벌할 때도 느꼈지만 고위 귀족들이 거느리는 정예 기사단의 수준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때도 힐데 후작의 정예 기사들이 토벌에 합류했었는데 폴이나 백랑 모두 상대의 수준이 제법이었다고 평가했었다.
물론 정예 기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들의 기사단에 그 정예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조셉 공작의 기사들 역시 힐데 후작의 것에 비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의 가문은 예전부터 남부를 지배하는 대영주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인데요?”
“우선, 기본적인 방침 자체는 변함이 없어. 황실 근위대가 움직이면 상대의 경각심만 깨워 줄 수 있으니까. 만약 적이 다시 목을 집어넣으면 우리만 피곤해질 거야.”
“음…….”
힐데 후작도 참 딱하게 되었다. 조셉 공작과 틀어지면서 자력으로 일어서기 위해 전력을 모은 건데 그게 황태자의 경각심을 자극한 모양이니까.
만약 그대로 두고 봤으면 조셉 공작만 신경 쓰다 곤란해질 수도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저렇게 신경 쓰고 철저히 조사했다니 참 다행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의 기사를 모아놔서 좀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나중에는 진짜 한 2천까지 찍는 거 아냐?
“그래서 내 호위 병력을 그레이츠 영지에서 빌리고 싶네. 나와 떨어진 곳에서 정예들로 호위를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겠나? 북부가 전장일 게 뻔하니 자네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군.”
그러니까 자신은 예전처럼 기사 몇과 영지를 순방할 테니 북부 쪽에서만 병력을 빌려달라는 거였다.
정말 힐데 후작이 조셉 공작과 연합했으면 수백 이상의 기사들을 상대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한 일도 아니었다. 조셉 공작의 기사들, 그것도 남몰래 암살하기 위해 투입한 정예 기사 수십 정도만 상대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힐데 후작의 전력이 투입되진 않겠지만 황태자의 머릿속에 적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견제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그것만 해도 로빈이 목적한 바는 모두 이룬 것과 마찬가지였다.
“네, 전하.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최정예를 투입해 전하를 호위하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내 이번 일을 잊지 않겠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전하.
어쨌든 이번 일로 공을 세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야 2황자를 살려달라고 말이라도 붙여볼 게 아닌가.
“백작님, 병력을 얼마나 지원해 주실 수 있는지요? 그걸 알아야 전략을 수립할 수 있습니다.”
황태자의 영지 순방은 제국 서쪽에 치우쳐 있는 황도 근처를 시작으로 남부, 동부, 중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부를 향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니 황태자가 북부에 도착하는 시기는 봄의 끝자락이나 여름 초입 정도.
겨우내 마수를 상대한 영지의 병력들이 가장 한가한 시간이었고 이 시기라면 전력 대부분을 동원해도 큰 무리가 없었다.
물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만, 분위기가 이러니 웬만하면 과하게 병력을 동원해 점수라도 좀 따야겠다.
“기사급 전력을 250 정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정예 기사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은 대충 50 정도? 그리고 나머지도 실전에 익숙한 전력입니다.”
솔직히 실전에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쌈박질에는 아주 이골이 난 녀석들이다. 백랑과 흑웅을 포함한 모야족 전사들을 보낼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린을 포함한 기사단의 최정예까지 합치면 뭐, 조셉 공작이 자기 영지를 통째로 들어 엎어서 모든 병력을 동원하지만 않는다면 황태자의 손끝 하나도 건드리기 힘들 거다.
“…그레이츠 백작령에 그 정도 전력이 있었습니까?”
“그게 다가 아니겠지. 어쨌든 마수 산맥과 대수림도 방어해야 할 테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350 이상이라는…….”
“맙소사.”
황태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두 참모는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이 양반들이, 그 정도가 아니면 어떻게 다른 네 개 영지를 간수하겠어? 계속된 실전으로 기사 전력만 400이 넘는다고 하면 뒤로 넘어가겠구만.
X이어인급 전투 민족 모야족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지금도 전사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대수림 안에서 꾸준히 전사들과 장정들을 잃던 악순환이 끊어지면서 고스란히 전력이 보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죽어야 할 전사가 죽지 않고, 새로운 전사들을 육성하고 있으니 점점 그 수가 불어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불균형한 성비도 제법 바로잡을 수 있었다. 물론 원래도 여성이 더 많이 태어나는 부족이라 지금도 4:6 정도, 특히 가장 활발한 20~30대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이지만 그것도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어쨌든 이 일이 알려지면 백랑이 제법 기뻐할 것이다. 원래 마수들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걸 즐기는 족속들이었으니 말이다. 별로 썰(?) 것도 없겠지만 나들이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 정도 병력이면 크게 전략을 짤 것도 없겠군요. 상대가 매복할 만한 지점만 파악해 뒤를 치면 끝이니까요.”
“상대는 우리가 이 정도 병력을 동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겁니다.”
“사실 자유 기사들은 그리 믿을 게 못 되죠. 충성보다 돈을 더 따르는 자들이니까요.”
“결국 머릿수만 믿고 덤벼드는 놈들을 기습하면 오히려 그놈들이 혼비백산할 거라는 거군.”
로빈은 황태자와 참모들이 대화하는 걸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황태자의 이동 경로를 따져 매복이 있을 만한 곳을 모조리 수색하고 놈들의 뒤를 치겠다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략.
확실히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대충 전략 회의까지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황태자가 로빈을 불렀다. 무슨 할 말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는데.
“그런데 그레이츠 백작. 왜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거지? 어차피 페루와는 완전히 어긋났잖아? 내 자네의 충성을 받아들이겠네.”
이건 또 무슨 답정너냐?
황태자의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빈은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이상하다는 작은 중얼거림에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1회 차 로빈이 지금쯤 황태자에게 달려와 충성을 맹세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긴 1회 차 로빈이었으면 그럴 만도 했다. 아카데미에서 3황자를 만났는데 그딴 퀘스트가 떠버리면 탈제국이니 뭐니 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때는 황태자도 저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을 테니 황태자 진영에 몸담으려면 그 정도 퍼포먼스가 필요하긴 했을 거다. 지금처럼 변경백도 아니기에 그 정도 자기 PR이 없으면 황태자가 제 말을 제대로 들을 리도 없고.
그 상황을 생각하니 왠지 그때의 자신이 너무 짠했다. 말도 안 듣는 답답한 황태자를 어떻게든 황제로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충성이고 뭐고 그런 걸 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그냥 지지하는 거랑 충성을 맹세하는 건 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전하, 변경백이 황제 이외에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건 반역입니다. 그게 황태자 전하라도요.”
“…….”
너무나 당연한 거라 사실 사문화되다시피 한 규정이지만 그런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당황하는 황태자를 보니 이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었나 보다.
저 양반이 저렇게 당황하니 은근히 재미있는데. 하긴 자기가 변경백으로 만들어놓고 충성을 맹세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무안하겠어?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