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흠흠, 어차피 황제가 되시면 그레이츠 백작도 당연히 황태자 전하의 사람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어차피 백작이 전하를 지지하는 것만은 확실하니까요.”
황태자가 무안해할까 봐 슬쩍 지원해 주는 젝트와 조단.
하지만 이게 황태자의 흑역사로 남을 건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이불 킥이라도?
“하하하. 그랬군. 내가 착각했어. 어쩐지…….”
황태자는 로빈이 충성을 맹세하러 달려오지 않은 이유가 변경백의 지위 때문이라고 확신하는 거 같았다.
어차피 답정너인 문제였으니 굳이 촌스럽게 그걸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황태자의 말에는 로빈도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저나, 백작. 요즘 재미가 좋다던데. 남작가의 영애를 만나고 있다지?”
황태자가 슬쩍 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하긴, 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는데 이 양반이 모르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다만 이걸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인데.
“하하. 그걸 또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괜찮은 사람을 만나서 좋은 만남을 가지고 있죠.”
“그런가? 남작가의 영애라. 백작 정도라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예를 들면… 크라우 백작 영애나, 크레톤 후작 영애 정도면 용모나 인품, 게다가 집안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여성들이지. 어떤가? 생각 있으면 내가 중신을 서줄 수도 있는데.”
“그레이츠 백작 정도면 만족할 만한 배우자감이죠. 우리 집 못난이한테는 과분할 정도니까요.”
“그렇다는군.”
황태자가 말을 꺼내자 조단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이 정도면 이미 사전에 말을 맞춰 놓은 거겠지?
크라우 백작가면 레오니스 공작가와 함께 황태자의 가장 중요한 지지 세력이었다.
물론 그 역시 남서부 방면의 변경백이라 직접적으로 충성을 맹세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첫째 아들인 조단 크라우를 일찌감치 황태자의 시동으로 보내는 거로 그 지지 의사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원래라면 북부 변경백과 남서부 변경백이 혈연을 맺고 거대 군사 연맹이 탄생하는 걸 반가워할 황실이 아니건만 제 성격과 크라우 백작의 우직함을 믿는 건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제안하고 있었다.
정략적 의미로 본다면 확실히 좋은 수였다.
황태자파에서는 어쩔 수 없이 뜨내기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지만 크라우 백작의 사위가 된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황태자파 세력 안에서도 상당한 입지를 다질 수 있다고 할까? 이쪽 귀족들 중 크라우 백작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크레톤 후작 같은 경우는 더 심했다.
그와 제법 친분을 나눈 주노가 알려준 건데 크레톤 후작은 늦둥이 딸내미를 매우 아껴서 사위를 맞이하면 어떻게든 교육시켜 재무 대신으로 만들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단다.
변경백이 황도에 들어앉아 재무 대신을 겸임할 수 있는지는 전례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히 피곤한 일이 이어질 것만은 분명했다.
권력의 중추로 부상한다라.
하지만 그것도 원하는 사람한테나 그런 거지 자신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괜히 이리저리 간 보는 놈들만 달라붙어 피곤하기만 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걸 잘 알고 있을 황태자가 이런 제안을 한다는 건 뭔가 떠볼 게 있다든지, 아니면 그냥 한번 던져본 게 아닐까 싶다. 낚이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런 생각으로 말이다.
“하하. 저한테는 과분한 분들이죠. 이제 영지로 돌아가면 영지만 돌보면서 살 텐데 굳이 정략혼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한테는 그저 외가가 한미한 남작 영애가 딱이라니까요. 게다가 얼마나 예쁜지, 하하. 저도 남자인지 같이 있기만 해도 행복하더군요.”
“그런가?”
“예. 마음 써주신 건 감사하지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로빈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사양하자 황태자도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백작의 뜻이 그렇다면야.”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영지에 연락해 이 일을 논의해야 해서 할 일이 많네요.”
“알겠네. 어쨌든, 일은 차질 없이 잘 부탁하지.”
* * *
로빈이 나가고 셋만 남은 밀실.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고민하던 황태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통하는군. 뭐, 그럴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제 여동생이 불민해서……. 제 욕심이 좀 과했나 봅니다.”
이 계획의 입안자인 조단은 로빈이 대놓고 자신의 여동생을 거절하자 살짝 당황했지만, 그가 외모와 가문을 들먹였기 때문에 딱히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봐도 여동생보다는 1황녀가 더 예쁜데다가 크라우 백작가가 남작가가 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크라우 백작가를 거부하다니.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군요.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좋은 혼처 아닙니까? 크레톤 후작이야 딸 하나뿐이라 껄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평범한 귀족이라고 생각하면 저 녀석을 절대 파악할 수 없을걸.”
“하지만 이래서야 처음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1황녀 전하가 그레이츠와 이어지면…….”
“하~”
황태자도 고민스러운지 한숨을 내뱉더니 다시 생각에 잠겼다.
“황녀인 건 모르는 눈치였지? 하긴, 그럴 거야. 황녀인 걸 알았으면 저 멀리 돌아갈 녀석이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외가가 한미한 남작가 영애가 좋다니, 그 외가가 황실이라는 건 생각도 못 하고 있겠죠.”
“그냥 차라리 사실을 밝히는 건 어떨까요? 전하의 말대로라면 황녀인 걸 알면 바로 깨질 거 같은데요.”
가장 합리적인 의견이었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이앤이 아카데미에 있을 때는 그냥 자유롭게 내버려두기로 부황과 약속했다. 지금 부황과의 약속을 어기는 건 곤란하지.”
“그러면 어쩌실 생각이신지.”
“우선은 두고 보는 수밖에. 이미 다이앤에게는 적당히 경고해 뒀어. 말귀는 알아먹는 녀석이니 알아서 처신하겠지. 어차피 있지도 않은 남작가니 만약 다이앤이 사라져버리면 백작으로서는 찾을 방법도 없을 거야.”
황태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1황녀가 유력 가문의 자제와 이어지는 걸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건 훗날에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로빈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벌일 인사는 못 되지만, 그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시할 수 없는 자리가 바로 황제라는 자리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로빈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양반들이 어디서 약을 팔아? 권력의 중추라니. 누굴 엿 먹이려고 이래?”
정략혼 제안은 당연히 그냥 던져본 거겠지만 자신이 앤과 연결되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황태자의 분위기는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2황자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황태자가 앤을 미워할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말이다.
“에휴, 이거 불안해서 살겠나. 우선 2황자를 좀 만나봐야 뭘, 어떻게 할지 정할 수 있겠다. 그건 그거고…….”
빨리 이 소식을 영지에 알리는 게 더 급했기에 바로 영지로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백랑을 찾아 이 일부터 의논했는데.
[좋아! 재미있겠는데. 250명이나 투입된단 말이지?]
“노는 게 아니에요, 백랑. 황태자 전하의 안전부터 챙겨야 하는 일이라고요.”
[하하. 걱정 마, 영주님. 어쨌든 높은 분을 모시고 호위하는 일이란 말이지? 습격은 거의 확실하고?]
“그건 그렇죠. 그러니 인선에 각별히 신경 좀 써주세요.”
이 인간이 엄청 기뻐하는 게 또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물론 사고 치고 말고 할 일도 아니지만 사람 일이란 게 또 모르는 거라.
하지만 현장에 황태자 말고 젝트도 합류한다고 했으니 그럭저럭 영리한 젝트가 웬만한 일은 적당히 조율할 수 있을 것이다. 황태자도 짐짝이 아니라 제 몫을 하는, 아니 최종 병기 같은 사람이니 큰일이야 있겠나 싶고.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조셉 공작의 꼬리를 잡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어렵겠지?”
아마 황태자도 거기까지 기대하고 있진 않겠지만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일이 좀 더 편해지긴 할 것이다.
* * *
그렇게 황태자가 영지 순방 준비에 한창일 때, 힐데 후작 역시 자신의 거취에 대하여 고민이 많았다. 영지가 정상적으로 굴러가자 조셉 공작 쪽에서 이런저런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촌구석으로 쫓겨나게 만든 주제에 그런 뻔뻔한 요구라니.
그런 조셉 공작의 태도가 괘씸한 힐데 후작으로서는 이번 영지 순방이 줄을 바꿔 잡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후작님, 조셉 공작의 요구를 이렇게 계속 묵살해도 되겠습니까?”
“흥, 그 사람도 이제 한물갔어. 이제 황태자가 영지 순방까지 마치면 거의 황위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황태자가 황제가 되면 아마 조셉 공작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을걸. 조셉 공작은 이제 지는 해라, 이거야.”
예전부터 힐데 후작을 따라왔던 행정관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그는 그저 태연할 뿐이었다. 오히려 조셉 공작과 멀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황태자 쪽으로 붙을 수 있을지만을 고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만만치 않고, 쓸 만하다는 걸 알려야 해. 어쩌면 좋을까? 조셉 공작 놈의 비리라도 확보해 놓으면……. 아! 그래. 예전에 조셉 공작이 보내온 서신 있지? 거기서 몇 개의 단어만 바꿔 놔. 내용은…….”
“네? 하지만 그렇게 위조하면…….”
“왜? 없는 말도 아니잖아? 큭큭. 그걸 황태자에게 바치면 적어도 내 충심 정도는 표현할 수 있겠지. 물론 조셉 공작은 좀 피곤해지겠지만 말이야.”
“네, 문제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입 무거운 놈으로 해라. 무슨 말인지 알지?”
확실한 놈한테 일을 맡기고 놈까지 제거하라는 잔인한 명령.
하지만 행정관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뿐이었다.
“그리고 난 병력도 있지. 그걸 증거로 바치고 그 점을 잘 어필하면……. 상과 벌이 분명하다니, 공을 세운 날 외면할 순 없겠지. 좋아. 어떻게든 황태자를 구워삶는다. 그래야 내가 살아.”
힐데 후작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결국 자신의 미래는 없다고 말이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황태자가 영지 순방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황태자는 모두가 우려하는 상황에서도 기사 둘과 젝트만을 대동한 채 영지 순방을 시작했다. 인원이 적으면 워프 게이트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워프 게이트로 각 공작령에 도착해 주변을 순방하면 이동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는 건 사실이라 다른 귀족들도 황태자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계획대로 그렇게 가시는군. 처음은 남부인가? 혹시나 싶어 미리 경고하긴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원작에서 황태자가 남부 지방을 순방할 때 조셉 공작이 교묘하게 독을 쓴다.
이게 어찌나 절묘한지 황태자도 동부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3황자파 귀족들과 같이 식사하는 걸 피하는 등, 황태자 나름대로는 상당히 신경 썼음에도 결국 중독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조셉 공작의 시점에서 전개된 일이 아니라 정확한 내막을 알 순 없지만 아마 몇 개의 조건이 모이면 효과를 발휘하는 그런 종류의 합성 독일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제대로 된 시작은 황태자가 워프 게이트를 타고 북부의 그레이츠 백작령으로 넘어간 시점일 테니 그때쯤이면 독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황태자는 갔고, 난 2황자를 만나볼 차례군. 그것도 가능하면 몰래 말이야.”
2황자는 최근에 황도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것도 거의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히 들어온 것이다.
2황자가 남동쪽 해안에서 세운 공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 스스로가 자신의 공을 전부 다른 쪽으로 넘기면서 그게 가능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셈이었다.
다만 칩거하고 있는 2황자를 어떻게 만날 것인지가 가장 문제였다.
최소한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무슨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로빈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정말 의외의 인물이 로빈에게 해답을 제시했다.
“하하. 그레이츠 백작, 요즘 재미가 좋다지? 공부하라고 아카데미에 보냈더니 그래서야 쓰겠나?”
“재미는 대공자님이 더 보고 계시겠죠. 그레이트 A가 중부나 동부에서도 큰 인기라던데요?”
“그거야 그렇지만 아카데미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애를 차지한 백작만 하겠나?”
황태자와는 다른 이유로 로빈을 자주 찾아오는 그릭스 대공자.
황태자는 조셉 공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로빈을 이용한 거지만 이 남자는 조금 달랐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