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대체 왜 자신을 자꾸 찾아오냐는 로빈의 물음에.
“하하. 자네, 몰랐나? 내가 자네를 한 번 만날 때마다 VIP 포인트가 올라간다네. 그러면 그만큼 빠르게 물건을 받아볼 수 있는 거지. 겸사겸사 사업 이야기도 나누고 말이야.”
이렇게 대답하는 지독히도 솔직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가 명백히 허리 아래쪽 사정이라는 건 애석한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좀 편한 면이 있었다. 여러 번 만나면서 제법 친해진 감도 없지 않았고.
그런데 이 남자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는 처음으로 로빈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VIP 포인트 때문에 오셨어요? 아직 젊으신데 너무 그러시면 뼈 삭아요.”
“원, 농담도. 아직 팔팔하다네. 첩실 둘 정도는 그 자리에서 한 번에 해결한다니까? 내가 허리를 튕기기 시작하면 그냥 질질 싼다고.”
“네, 뭐. 그렇다고 치죠.”
맨날 혼 래빗만 챙기는 주제에 저런 소리를 지껄여봤자 누가 믿어주겠냐마는 그래도 상대가 상대다 보니 그렇다고 치고 넘어갔다. 물론 이런 태도가 상대를 더 열 받게 만든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러는 거였다.
“끙, 말을 말지.”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에요? 왠지 느낌이 좀 다른데요?”
“하하. 그런가? 감도 좋군. 사실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절요?”
“그렇지. 하지만 이 녀석이 막 나다니기에는 좀 곤란한 녀석이거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직접 왔어.”
“누군데 그래요?”
“라이언. 2황자 라이언 말일세. 자네도 한 번쯤은 만나고 싶었을 텐데?”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걸 바로 받아들이면 또 앤이 1황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바로 시인하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또 2황자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라이언하고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 아카데미에서도 같이 수학했고 말이야. 집안에서 은근히 천덕꾸러기인 나를 진지하게 대해주던 녀석이랄까? 뭐, 그렇게 지카스한테 줄을 낸 놈들도 지금은 나한테 설설 기니까 상관없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그릭스 대공자가 2황자랑 친구라.
이걸 황태자가 모를 리가 없을 테니 어느 정도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가?
물론 조셉 공작의 수족 같은 지카스보다야 그릭스 대공자가 낫다고 생각했겠지만 어쨌든 황태자의 염려도 이해는 갔다. 왜 소설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2황자를 이제 와서 견제하는지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고.
순간 어떻게 대꾸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릭스 대공자가 바로 치고 들어왔다.
“아, 몰랐나? 자네가 지금 사귀는 앤이 다이앤 트와이드 1황녀라네. 머리 색도 그렇지만 분위기도 많이 바뀐데다가 자네는 1황녀를 만나본 일이 거의 없어서 몰랐을 수도 있는데 뭐, 어쩌겠나. 지금이라도 알고 있으면 되지.”
“끙.”
와, 정말 사람 잡을 양반이네. 그걸 여기서 그렇게 대놓고 밝힌다고? 어떻게든 모른 척하면서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이래버리면…….
진짜 확! 혼 래빗 판매 금지라도 걸어버릴까?
“어쨌든 1황녀를 그렇게 후르릅 하시려면 적어도 라이언의 허락은 받아야지. 그게 도리니까. 꼴을 보아하니 쉽진 않아 보이지만, 적어도 머리를 맞대면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하지만 저거 하나는 맞는 말이었다. 그릭스 대공자가 2황자의 친구인데다가 로빈이 인척으로 들어가겠다면 황태자 입장에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로빈이나 그릭스 대공자 둘 다 그런 쪽으로는 좀 글러 먹은 인간들이지만 황태자 밑에 있는 다른 귀족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놀랍네요. 1황녀 전하라고요? 앤이?”
“그렇다네. 놀랐지? 하지만 원래 가문 보고 만난 사람도 아니니 상관없지 않나?”
“그거야 그렇지만…….”
적당히 이렇게 몇 번 발뺌한 다음에 2황자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최대한 이 사실을 모른 척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마 조만간 라이언이 찾아올 거야. 밖에서 만나는 건 서로 부담스러울 테니까. 그리고 다이앤의 일은 자네가 모르는 거로 하겠네. 어쨌든 알고 있어야 라이언하고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참견한 거지만 사실 모르는 척하는 게 행동하기에는 더 편하겠지. 사실 나도 그 남매는 좀 딱해서.”
“비밀은 잘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야지. 안 그러면 앞으로 그건 영원히 안녕이겠지?”
“아마도요?”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다시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돌아온 그릭스 대공자.
저가 판매 금지를 명할 걸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저렇게 너스레를 떤다. 이런 쪽으로는 참 빠른 사람이랄까?
하지만 라이언 2황자를 만나볼 수 있다는 건 뜻밖의 소득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바로 2황자가 로빈을 찾아왔다.
소문이나 그릭스 대공자의 설명을 들었을 때는 제법 진지하고 건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네 녀석이 앤을 구워삶았다는 애송이냐? 설마 벌써 먹은 건… 하, 아니지. 먹기야 진작 먹었겠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이래서 악의 축인 아카데미에 가겠다는 건 어떻게든 막았어야……. 너, 이 녀석…….”
뭔가 나사 빠진 동생 바보가 나타났을 뿐이었다.
오자마자 방방 뛰면서 로빈의 멱살을 틀어잡는 게 참 뭐랄까? 이 정도면 황태자가 걱정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닌가?
대체 왜 이런 사람을…….
이름: 라이언 트와이드
성향: 가정적. 직설적. 헌신적
타이틀: 마스터(S). 일기당천(S). 뛰어난 통솔력(R)
하지만 황태자와는 다른 의미로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황자로서는 모르겠지만 최전방 지휘관으로서는 이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하급 무관이나 기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대단하다더니 확실히 그럴 만했다. 앞장서서 적들을 도륙하고 병사들을 잘 다독이는 지휘관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아직 못 먹었어요. 그러니 진정하시죠. 적어도 처가 식구들의 허락 정도는 받고 먹어야죠.”
물론 퀘스트가 아직 허락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지만 그냥 그렇다고 치고 이렇게 말하자 2황자도 어느 정도 진정된 듯 멱살을 풀었다. 그러고는 처음과는 달리 제법 부드럽게 대꾸하는데.
“흠흠, 그래? 생각보다 괜찮은 청년이군. 아직이란 말이지? 그래. 적어도 처가 식구들의 허락은 받아야지.”
논점이 그거였냐? 아무래도 본의는 아니지만 앤을 아직 제대로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좋게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런 거로 시답잖은 논쟁을 벌일 때는 아닌데. 지금 이 상황의 심각함을 모르는 건가?
2황자와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들의 과거 이야기부터 황태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 그리고 2황자가 남동부에서 어떻게 싸웠으며 남동부 해안의 작센 변경백과 어떤 관계인지까지.
대화를 나눠 보니 이 인간 역시 야망이나 이런 건 눈곱만큼도 없고 가족의 평안만을 바라는 소박한 남자였다. 모함을 받았을 때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자결했다더니 동생과 어머니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그런 남자랄까?
이 정도로 성격이 뚜렷하면 황태자도 이걸 모를 리가 없으니 일을 진행하기도 제법 수월할 거 같았다.
“좋아. 그렇게 하지. 다이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감사합니다, 2황자 전하.”
“하지만 다이앤의 눈에서 눈물이라도 빼는 날이면…….”
“첩실이 둘 있는 거 빼고는 별로 그럴 일도 없을 거 같은데요. 저희 집안 분위기가 어떤지도 말씀드렸잖아요.”
“그래,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고. 다른 건 몰라도 반쪽이 평민이라는 이유로 핍박할 놈으로는 안 보여서 허락하는 거야.”
“걱정 마세요. 그럴 사람도 없으니까요.”
2황자의 가장 큰 염려는 앤이 고위 귀족과 혼인했을 때 평민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로 핍박받는 거였다. 어려서부터 애교도 많고 밝았던 앤이 그런 이유로 괄시당하며 계속 시달리다 결국 그런 가면까지 쓰게 되었으니 그런 걱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 집안을 가지고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운운하는 건 좀 그랬지만 말이다.
우리 집이 유서만 깊지, 다른 건 좀…….
오히려 평민의 피가 섞였다는 앤보다 더 평민스러워서 그녀가 놀라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폭풍처럼 등장했던 2황자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몰래 어디를 나다니는 게 익숙한지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걸 보면 암살자를 해도 대성할 사람 같았다.
“가족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건 다 접어둘 수 있는 사람이라 오히려 다행이지. 그런 쪽으로는 나랑도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
황태자가 어느 정도까지 2황자를 견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얼추 설득시킬 수 있을 거 같았다. 당연히 황태자를 따르는 귀족들도 그렇게까지 하겠다는 2황자를 어쩌진 못할 거다.
* * *
2황자가 로빈과 합의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다시 황도를 떠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황도에서는 황태자가 각 영지를 돌며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는 일로 화제였는데 아무래도 황태자 쪽에서 사람을 풀어 소문을 부풀리는 거 같았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실시간으로 소식이 전해질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 일로 조셉 공작을 자극해 어떻게든 움직임을 끌어내려는 생각이 분명했다.
덕분에 황도에 앉아서도 황태자가 어디쯤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어서 편한 면도 있었다. 로빈도 영주였기에 황태자가 자신의 영지를 방문할 때쯤에는 영지로 돌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수업을 빼먹어도 졸업에 지장 없는 좋은 찬스였기 때문에 이 기회에 영지에서 며칠 머물다 올 생각이다.
“이제 영지로 잠시 돌아가신다는 거죠?”
“어,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께 영지 상황을 보고해야 하니까 그래야겠지?”
“금방 오시나요?”
“그렇게 금방은 아니고 좀 있어야 할 거야. 처리할 일도 몇 개 있어서.”
유일한 불만은 영지로 돌아갈 때 앤을 대동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한동안 줄기차게 즐기던 차진 손맛을 이렇게 강제로 끊어야 한다니. 수업도 수업이고 황태자도 황태자라 당장 앤을 영지로 데려가려면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분위기가 좀 그러니 조심해. 항상 호위를 대동하고.”
처음에는 당연히 앤을 몰래 호위하는 기사가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요즘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았다. 사전에 무슨 합의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무런 보호 없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저번에 2황자랑 대화하면서 느낀 건데 만약 앤을 납치할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2황자를 이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건 정말 가정이지만 조셉 공작이 앤을 납치한 후 2황자를 이용해 뭔가 일을 꾸밀 수도 있다는 거다. 그 인간이 또 상황만 되면 그런 걸 마다할 인간도 아니었고.
궁지에 몰리면 못 할 일이 뭐가 있겠냐마는 조셉 공작은 그중에서도 좀 유별났으니 말이다.
그래서 로빈은 영지로 떠나기 전에 앤과 그녀의 시녀인 애니를 자신의 저택에 데려다놓았다. 그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괜히 아무런 대책 없이 떠났다가 히로인이 납치당해서 곤욕을 치르는 것을 자주 봐왔기 때문에 미리 예방하는 차원에서 그런 것이다.
2황자의 허락도 받았겠다, 집에 들여놓고 뭔가를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처음에 기숙사에서 나와 제집에서 지내라고 했을 때 앤의 반응은 정말 가관이었다. 정말 그럴 생각은 1도 없었는데 그럴 마음에 불을 지르는 반응이랄까?
그런 게 아니라 안전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 보여준 그 토라진 반응도 은근히 재미있었고.
처음에는 거절하던 앤도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되어서 그런다는 부드러운 말과 벌써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는 강짜에는 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정 안 되면 강제로라도 그러려고 했는데 그나마 그렇게까지 완강히 거부한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호위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하세요. 무조건 3인 1조. 알겠죠?”
“예. 영주님. 명심하겠습니다.”
아카데미에서의 호위는 원래 호위 기사 1인으로 제한하고 있지만 그게 꼭 완벽하게 지켜지는 건 아니었다. 귀족 자제와의 트러블도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을 어필하니 아카데미 측에서도 호위를 늘리는 걸 인정해 준 것이다.
물론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라고, 시한부임을 어필했기에 허락한 거지만 그게 어딘가.
그렇게 제필에게 몇 번이나 확언을 받고 겨우 영지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당연히 진한 키스와 기타 등등으로 이별의 정(?)을 충분히 나눈 후에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