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하지만 기습적으로 큰일을 당했음에도 황태자는 건재했다. 사전에 지형을 확인한 젝트가 고립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린을 비롯한 최정예를 황태자 근처에 따로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초인과 마찬가지인 고위급 기사들이 쏟아지는 낙석을 못 피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을 테고, 최대한 고립시킨 다음 중독된 황태자를 차륜전으로 상대할 생각이었을 텐데 멀쩡한 황태자와 최정예 전사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결과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그냥 협곡 자체를 매몰시켜 압사시키는 게 낫지 않나? 아, 그건 또 아니구나.”
협곡을 매몰시킬 정도의 폭발을 일으키려면 마나 폭탄이 수십 개 정도는 필요했다. 한 개만 없어져도 큰일 날 판에 그 많은 물량이 사라진다면 당연히 누군가는 알아챌 테고, 작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덜미가 잡혔을 것이다.
그나마 황태자를 고립시키기 위해 그 정도 폭발을 일으키는 게 한계였다는 말이다.
[미친놈들 때문에 그거 치우느라고 개고생만 했다니까.]
오히려 길을 막고 있는 낙석을 치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린의 말을 들어봐도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뒤따르던 250여 명의 전천후 일꾼들이 협곡 입구가 무너지는 걸 보고 기겁해 달려들어 마나까지 써가며 필사적으로 돌덩이들을 치웠겠지. 수가 모자랐으면 저걸로 황태자의 일정에 차질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수고했다. 황태자 전하는 무사하시지?”
[응. 그 사람 좀 대단하더라. 난 이제 내가 거의 최고가 된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 사람 보니까 난 아직 멀었더라고.]
말을 들어보니 젝트가 황태자를 호위하기 위해 린과 백랑, 흑웅, 그리고 하워드를 붙였다고 한다. 기존에 황태자를 호위하던 기사 둘이 더 있으니 총원은 일곱 명이었다.
그 상황에서 수십에 달하는 수준급 암살자와 뒤이어 바로 정예급 기사 수십이 달려들었는데 황태자가 미친 듯이 날뛰어 상당수를 썰어버렸단다.
“그건 그렇지. 그 양반이 제법 대단한 양반이거든.”
그러고 보니 모야족 여전사인 린에게는 황태자 같은 괴수가 이상형에 가까울 것이다. 원래 여전사들은 자신을 꺾을 수 있는 전사들만을 자신의 짝으로 결정하는 부족이었으니 말이다.
이거 설마…….
[응? 난 모야족 여전사 린이 아니라 영지의 기사단장 린이라고. 완전히 다르단 말이지. 그리고 그 사람은 너무 강해서 지켜줄 맛도 안 나잖아? 나보다 강한 사람을 뭐 하러 지켜주겠어? 우리 주인 정도는 돼야 또 지켜줄 맛이 난단 말이지. 히힛.]
…음, 약해서 다행이다?
항상 지켜준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그게 진심이었나? 린의 사고방식도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강자를 숭상하는 모야족의 기본적인 마인드에 위배된 거잖아, 저거.
[그래도 주인이 나보다 강한 건 맞지. 사람의 강함이 무력으로만 결정되는 건 아니니까. 우리 부족이 힘이 없어서 황제 한 사람의 명령에 그렇게 쫓겨났겠어?]
다른 사람이 그러면 몰라도 린이 저런 소리를 하니 뭔가 묘했다.
주인은 나보다 약하니까 내 말만 들어!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라고 할까?
어쨌든 강한 사람의 말이 더 잘 먹히는 건 맞지만 그 강함이 단순히 무력만은 아니라는 게 좀 신선했다.
그래서 영주 성에서 자랄 때 어머니 마리아나의 말을 그렇게 잘 들었나 보다. 그렇게 따지면 집안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마리아나가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 곧 힐데 후작? 그놈의 영지라는데 황태자 전하가 제법 긴장하고 계시더라고. 이번에는 전사들까지 모아서 대놓고 같이 들어가자는데?]
그렇게 큰 습격을 당한 후에도 몇 번의 습격이 이어졌고, 모두 물리친 후 힐데 후작의 영지에까지 접근한 모양이다. 자잘한 습격이 있었지만 황태자가 예상한 대규모 공격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공격이 힐데 후작의 영지 근처에서 시작될 거라고 확신하는 거 같았다.
그러니 전사들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가려는 거겠지.
“그래, 황태자 전하의 명대로 해.”
지금 힐데 후작은 어떻게 황태자를 빨아야 인정받을 수 있을지만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자신의 전사들은 황태자를 따라 들어가서 힐데 후작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영지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거고.
그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아도 이미 의심하기 시작한 황태자는 경계를 늦추지 않을 테니 모든 것이 계획대로랄까?
아마 힐데 후작은 앞으로도 제법 골치 아플 것이다.
* * *
로빈이 걱정하던 존은 지금 힐데 후작령에 머물고 있었다. 임무를 완수했으니 어서 돌아가자는 릭스터의 채근에도 할 일이 남았다며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릭스터와 그 부하 몇도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술집을 겸하는 이 여관만 달포가 넘는 장기 투숙 손님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져 있었다.
“아, 형님. 좀 갑시다.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기서 비비고 있는 거요?”
“보채지 말고 어서 돌아가라니까? 돌아가서 영주님한테 보고나 하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
“나도 그러고 싶소만, 백랑 형님이 업어서라도 데려오랬단 말이요. 그 양반 성격 알면서…….”
“그랬냐?”
백랑의 명령 같은 부탁 때문에 무조건 존을 무사히 데려가야 하는 릭스터로서는 뭔가 크게 사고를 칠 거 같은 존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가장 좋은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고 가는 건데 벌써 달포 가까이 죽치고 있는 걸 보면 그게 쉬울 거 같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야, 그래도 재미있는 경험 많이 했잖아? 큭큭.”
“재미요? 뚫린 입이면 말이나 제대로 하쇼. 근위대에다가 등판 넓은 놈들까지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물어대는데 내 심장이 쫄깃해서…….”
“별수 있나. 네 녀석은 대머리라서 가발 씌우고 이것저것 조금만 손보면 써먹기 딱 좋아.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 아니겠어? 그러니 좋게 생각하라고.”
“피와 살은 개뿔. 하, 좋아요. 다 좋은데,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요?”
“이놈이 황태자 전하가 방문할 시기에 맞춰 사열식을 한다는구만. 일종의 자기 세력 과시? 뭐, 그런 거인 모양인데 병사 수가 모자라 머릿수를 채울 장정들을 모으고 있어. 덩치만 있으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다니, 거기에 합류할 생각이야.”
“그래서요.”
“허우대 멀쩡하고 그럭저럭 모양이 나니 제법 괜찮은 자리에 배정받지 않겠어? 그러면……. 거기서 놈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도망친다. 내 감이 말해주고 있어.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말이야.”
“…말만 들어도 뭔가 위험해 보이는데. 처자식이 있고 살날이 창창한 양반이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요? 이미 20년이나 된 일이잖소?”
릭스터의 말에 존은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 난 모르겠소. 형님이 알아서 하시구려. 난 그냥 옆에 있다가 위험하면 형님 둘러업고 바로 도망갈 생각이오. 형님 감 못지않게 내 감도 만만치 않은데, 무조건 형님 옆에 있으라니 어쩌겠소. 제발 사고는 좀 작게 갑시다. 네?”
릭스터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린 존은 쓰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다 지난 일이지. 난 이렇게 잘 살고 있고. 그래서 그냥 잊고 싶은데…….”
가족들과 평안하게 살고 있었지만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남아있었다. 배신당해 억울하게 죽은 가족 같은 형님과 전 재산을 날리고 끝내 자살한 이웃들.
요즘도 가끔 그들이 꿈에 나타나 자신을 손가락질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자신만 혼자 잘 살고 있는 이 현실이 그저 죄스러울 뿐이었다. 물론 자신만 잘 먹고 잘 산다고 뭐라고 할 형님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 * *
며칠 후.
황태자가 힐데 후작의 영지를 방문하는 날이 되었다.
힐데 후작은 잘 무장한 기사들과 병사로 위장한 장정들을 도열하고, 성벽 위에도 고용한 장정들을 올렸다.
황태자가 성문으로 들어오면 기사들과 병사들로 그를 환영하고 자신의 세를 과시할 생각이었다. 그런 후 조셉 공작을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증거를 직접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겠지. 조셉 공작의 일만 해도 골치 아픈데 변방에 있는 나까지 신경 쓰고 싶겠어? 시간이 촉박해 병사들까지 훈련할 시간이 없었는데 그래도 저 정도면 나쁘지 않아.”
훈련조차 받지 못한 무지렁이들이었지만 허우대가 멀쩡한 자들만 모아놓으니 그래도 제법 볼만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기사였고 이들은 그저 머릿수를 채우는 의미밖에 없었기에 큰 문제도 아니었고.
“그냥 서있기만 하는 건데 못 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힐데 후작이 마지막으로 병사들과 기사들을 점검하는 사이, 기사 하나가 달려와 황태자가 이제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다만 의외인 점은 호위만을 대동했다는 황태자가 제법 많은 병력을 대동한 채 오고 있다는 거였는데.
“응? 호위 병력이 수백이라고? 혹시 북부에서 습격이라도 받은 건가? 그래서 병력을 늘렸고?”
머리를 굴리던 힐데 후작은 조셉 공작이 황태자를 습격했음을 직감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큭큭. 조셉 공작이 날 돕는군. 덕분에 내가 만든 서신이 더욱 힘을 받게 생겼으니 말이야. 하하.”
이제 빨리 나가 황태자를 영접하고, 충성 서약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오늘 일로 자신은 3황자파가 아니라 황태자파로 다시 자리를 잡을 테니 말이다.
황태자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성벽 위에 도열한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사열을 가장해 상대를 유인한 후 기습하는 건 흔한 일이니 말이야.”
자신을 공격했던 암살자들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셉 공작이 그냥 얌전히 물러날 가능성은 없었다. 틈틈이 전해오는 황도 소식을 들어봐도 조셉 공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다이앤을 몰래 납치하려다 그레이츠 백작의 기사들에게 저지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참 조셉 공작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쨌든, 놈도 이번 기회에 결단을 내려는 게 분명했다. 군사를 동원해 황도를 뒤집을 게 아니라면 자신이 외부로 나가있을 때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성문 안으로 들어서니 저 멀리에서 힐데 후작이 음흉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공격하라! 반드시 황태자를 처치해야 한다!!”
힐데 후작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모야족 전사들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흉흉한 분위기로 검을 휘두르는 황태자가 있었고.
반면 힐데 후작의 기사들은 갑작스러운 난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저… 전하. 그게 그러니까. 오…….”
피 묻은 검을 휘두르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황태자의 모습에 당황한 힐데 후작이 뭐라고 입을 여는 순간, 황태자의 검이 바로 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역적 힐데 후작의 목을 베었다! 모두 항복하라!!”
힐데 후작이 죽고 황태자가 거칠게 포효하자 우왕좌왕하던 기사들도 하나둘씩 검을 버렸다. 그나마 대대로 힐데 후작을 섬기던 몇몇 기사들만이 끝까지 항전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마저 모야족 전사들에게 목숨을 잃어갔는데.
* * *
“이런, 미친!”
힐데 후작 뒤쪽에서 사열하는 병사들 사이에 숨어있던 릭스터는 존이 힐데 후작과 똑같은 목소리로 엉뚱한 짓을 벌이자 욕지기를 내뱉으며 존에게 달려들었다.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어떻게든 존을 빼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의 외침이 신호가 된 듯 황태자와 부족의 전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고, 사방에서 아수라장이 벌어지자, 이게 뭔가 싶었다.
그리고 힐데 후작이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황태자가 그의 목을 날려버리자 망연한 얼굴로 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흉흉한 사태에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던 존은 릭스터가 멍하니 있자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 귓가에 속삭이더니.
“야, 뭐 해? 빨리 튀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게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든 릭스터 역시 동생들을 챙겨 바로 존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하. 이 미친 양반, 진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뭐가? 개새끼 하나 잡았잖아. 우리 황태자 전하가 완전 상남자네. 바로 목을 날려버리다니, 큭큭. 그때 같이 일했던 그 형님도 그 병신 같은 황족 놈한테 저렇게 죽었단 말이지. 하하하. X놈 새끼. 잘 죽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도주 경로로 요리조리 잘 빠져나간 존과 릭스터, 그리고 동생들은 성을 빠져나와서야 잠시 숨을 고르며 혼란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걸 알고 계셨소? 황태자가 그놈부터 공격할 거라고 말이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