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몰랐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런데 그 와중에 백랑이랑 눈이 딱 마주쳤지 뭐야. 그때 느낌이 딱 왔지. 원래도 의심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외치면 당연히 충돌이 일어나지 않겠어? 내가 또 남의 목소리 따라 하는 건 자신 있거든.”
“이런, 미친. 그러다가 모야족 전사들이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모야족 전사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릭스터의 말에 그게 말이나 되냐고 코웃음을 치는 존.
“아예 작정하고 최정예만 선발해 보냈던데 그럴 리가. 어림도 없는 소리지. 백랑을 봐. 내가 외치자마자 바로 튀어 나가서 기사단장부터 날려버렸잖아? 영주님도 분명 그럴 작정으로 정예 전사들만 추려 보내신 거야.”
“와, 이런 무책임한 양반을 봤나. 그거 확실한 거요?”
“몰라. 내게 잘못이 있다면 나중에 영주님에게 따로 말해서 벌이라도 받으면 되지.”
“끙, 난 모르겠소. 어쨌든 이제 돌아가는 거죠?”
“응. 그래야지. 어서 가자고. 영주님한테 보고해야 하니까.”
그렇게 터벅터벅 영지로 돌아가는 길.
존은 물론 릭스터나 동생들까지 번갈아가며 피식피식 실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데 그 새끼, X나 당황하던데요.”
“자기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는데 당연하지.”
“큭큭, 말 X나 잘하는 새끼가 입도 벙긋 못 하고 뒤졌으니.”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존과 힐데 후작의 악연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존의 동생들은 사실상 그 사건의 피해자들이었고.
그러니 그 힐데 후작이 뭐라고 말도 꺼내보지도 못하고 황태자에게 목이 날아간 걸 보고 통쾌함을 느낀 것이다. 뒷일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앞으로는 잠도 푹 잘 수 있을 거 같았다.
* * *
“뭔가 이상한데요. 준비된 기습이라기엔…….”
“그렇군. 하지만 어쩌겠나, 일은 다 벌어졌는데.”
모야족 전사들 사이에 숨어있던 젝트는 일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데 후작의 공격 명령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들어 놈의 목을 벤 건 좋은데 생각보다 상대의 반응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기습을 준비했으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황태자의 무위를 알면서도 그렇게 대놓고 전장을 활보하다니. 마치 빨리 죽여달라고 보채는 거 같지 않은가.
“병사들은 황태자 전하의 환영 사열식이라고 알고 있더군요. 아니, 애당초 병사도 아니었습니다. 다 마을에서 밭일하던 장정들이더군요.”
“기사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갑작스러운 공격 명령에 자신들도 당황했다고…….”
“음…….”
“그놈의 품 안에서 이상한 게 나왔습니다.”
뭔가 일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황태자는 급하게 달려오는 남자의 말에 이거다, 싶어 그가 내미는 걸 서둘러 받아들었다.
“…조셉 공작이 힐데 후작에게 날 죽이라고 보낸 서찰이야.”
“네? 그때 그겁니까?”
“아니, 다른 거. 그놈이 이런 서찰은 한두 번 보낸 게 아닌 모양인데.”
상황은 좀 이상했지만 이런 서찰까지 나온 이상 굳이 따질 것도 없었다. 조셉 공작의 인장까지 박혀있는 서찰을 찾아냈으니 이걸로 조셉 공작을 압박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한 번에 놈을 실각시킬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자중하게 만들 순 있을 것이다. 룩센 대제도 증거가 명확한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갈 리는 없었고.
지금처럼 영지 순방이 마무리된 시점에 이런 일이 발생하면 당연히 조셉 공작 쪽에 줄을 섰던 귀족들도 동요할 테고 그 세력 역시 점점 힘을 잃어갈 것이다.
“이번에는 거지 같은 내전 없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겠어.”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이 이제 머지않은 거 같았다.
한편 힐데 후작의 몸을 뒤져 서찰을 찾아 황태자에게 건넨 백랑은 크게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전사들을 점검했다.
“야, 다친 놈들 있냐?”
“없습니다, 족장. 다들 대가리가 죽으니까 항복하더라고요.”
“매가리가 없던데요.”
“그거야 황태자 전하가 놈의 목을 날려버린데다가 백랑 족장이 기사단장부터 기습해서 그렇지. 원래 대가리가 잘려 나가면 맥을 못 추는 법이지.”
선두에서 워낙 설쳐댄 황태자랑 린, 그리고 백랑 때문에 별로 할 것도 없었다며 투덜거리던 전사들이 주위를 슥슥 살펴보더니 백랑에게 다가와 작게 소곤거렸다.
“아까 그거, 존 맞죠? 보니까 릭스터도 있던데요?”
“봤냐?”
“네, 릭스터가 워낙 튀잖아요. 그 새끼는 수백 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걸요. 문어 대가리잖아요.”
“뭐? 하하. 그건 그렇네. 그나저나 그 양반이 갑자기 미쳐 날뛰는 바람에 식겁했다. 왜 저기 있나 싶어서 눈인사하는데 갑자기 그 지랄하는 거야.”
“아…….”
“아마 영주님이 미리 작업을 쳐놓은 모양이야. 나이도 어린 양반이 참 영악하다니까.”
“역시…….”
“그러니까 다들 모르는 척해. 우린 그저 황태자 전하의 명대로 역적 놈들의 목을 벤 거뿐이야.”
백랑의 말에 모든 전사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허겁지겁 도망치던 존의 모습과 반짝이던 릭스터의 뒤통수까지 모두 기억 속에서 지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 * *
그 시간 힐데 후작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로빈은 다른 일로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앤이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공격당하는 걸 기사들이 구해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황태자가 황도에 숨어있던 조셉 공작의 암살자들을 미리 추려내지 않았으면 한 번의 공격으로 큰 낭패를 볼 뻔했다.
“그 미친놈이 진짜 앤을 노렸다고? 하, 이 새끼 봐라. 그래서 앤은 안전한 거죠?”
[네, 영주님. 아가씨는 지금 저택에서 요양 중이십니다. 다치신 데는 없고요. 수는 제법 많았는데 그렇게 강한 녀석들은 없어서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알았어요. 제가 빨리 가야겠네요.”
아직 조셉 공작의 마수가 2황자를 노릴 때가 아닌데 벌써 앤을 납치하려 한 걸 보면 북부에서 벌어진 습격이 실패로 돌아가 그의 마음이 많이 급해진 거 같았다.
그리고 상황이 긴박해지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자신도 서둘러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2황자와 앤의 입지를 확정 지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복귀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황실에서 연락이 왔다.
발신자는 크라우 백작 자제. 아무래도 앤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넣은 모양이었다.
[조단 크라우입니다, 백작님.]
“네, 크라우 영식. 무슨 일인가요?”
[앤 라빗츠 영애가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피해자로 조사해야 하는데 저택의 기사들이 영애를 보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군요. 백작님의 허락을 받아야 보낼 수 있다고 해서 제가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피해자 조사요?”
분명 이치에 맞는 말이었지만 상대가 조셉 공작임이 뻔한 상황에서 저러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저런 일로 조셉 공작을 어쩌지 못하는 건 자신도 알고 저들도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앤을 우선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저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는 게 뻔했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남작 영애가 괴한에게 습격당한 일로 크라우 백작 자제까지 나설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태자 측에서 2황자와 앤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앤을 바로 내어줄 수는 없었다.
[네, 백작님.]
“제가 오늘 황도로 넘어가니 동행하겠습니다. 약혼녀의 일인데 그냥 이렇게 있을 수가 없어서요.”
[…약혼이요? 약혼하셨습니까?]
“구두로 나눈 약속이지만 그렇긴 하죠. 졸업하면 바로 앤의 부모님을 뵙고 결혼을 허락받을 생각입니다.”
당연히 순 개뻥이지만 이 정도는 해줘야 자신이 앤의 일에 개입할 명분이 생기기 때문에 얼굴, 아니 목소리에 철판을 깔았다.
[하…….]
가볍게 사귀는 사이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지 자신이 약혼했다고 하니 한숨부터 내쉬는 조단.
분위기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대충 알 만했다. 역시 앤의 진술을 확보하기 위해 데려가는 게 아닌 것이다. 어쩌면 단순히 보호하기 위해 데려가는 걸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앤을 감금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할 수도 있었다.
[백작님, 이 일은 가벼운 납치 미수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앤 라빗츠 영애는 다이앤 트와이드 1황녀 전하시고, 오늘 일은 조셉 공작이 1황녀 전하를 납치하려고 벌인 일입니다. 저희는 1황녀 전하를 모셔 조셉 공작에게서 보호할 생각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조단은 조심스럽게 앞뒤 사정을 밝혔다.
하지만 로빈으로서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게, 당장은 보호지만 앞으로는 일이 어떤 식으로 흐를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 제가 동행해야겠네요.”
[백작님,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물론 믿죠. 황태자 전하와 크라우 영식은 믿는데……. 황태자파는 글쎄요. 크라우 영식처럼 신사적인 분들만 계시는 건 아니라서 말이죠.”
[백작님, 말이 심하십니다.]
“1황녀 전하가 2황자 전하의 아킬레스건인 걸 모르는 분이 없으실 텐데, 이 기회에 2황자 전하까지 어떻게 해보려는 과잉 충성이 없다고 장담할 순 없죠. 조셉 공작이 무너지기 직전이니 그쪽에서도 슬슬 말이 나오지 않나요?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2황자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그건.]
“역시 아니라고 말씀하시진 못하는군요.”
황비 소생인 2황자의 황위 계승권은 애매한 데가 있었다. 당연히 황후 태생의 황자들이 남아있을 때는 계승권이 없지만, 3황자와 황태자가 모두 사라지면 황후 태생의 황녀들과 같은 황위 계승권을 가지게 되니 말이다.
어떻게든 3황자와 황후, 그리고 조셉 공작까지 모조리 제거하려는 황태자파의 계획이 모두 이루어지게 되면 황위 계승권자는 오로지 황태자만이 남게 되지만, 그 황태자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다음으로 2황자가 황위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3황자와 조셉 공작을 잃고 구심점이 사라진 3황자파 귀족들이 2황자에게 들러붙어 다시 일을 꾸밀 수도 있는 것이다.
황태자와 황태자파 귀족들이 염려하는 건 바로 그런 점이었다.
사실 2황자 자체도 군부에서 신임이 상당한데다 일신상의 무위도 대단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딱 봐도 그런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 2황자지만 사람 일이란 건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아마 소설상에서 궁지에 몰린 조셉 공작이 2황자를 이용해 정국의 분위기를 바꾸려는 걸 눈치챘음에도 굳이 그걸 막지 않은 건 황태자 역시 그런 계산을 하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제가 황도로 넘어가 직접 앤을 보호할 겁니다. 우선 조셉 공작 쪽 일부터 마무리 짓고 2황자 전하의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죠.”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앤 라빗츠 영애가 1황녀 전하라는 걸요.]
“물론 몰랐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지금은 알아버렸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1황녀 전하를 잘 보호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분이 조셉 공작의 손에 넘어가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걱정 마십시오. 최소한 2황자가 황태자 전하를 공격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지금 가장 걱정하는 건 그런 거 아닙니까?”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저도 1황녀 전하를 미워하거나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그 점을 오해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다른 황태자파 귀족들이면 몰라도 조단 크라우 같은 경우는 정말 1황녀를 무시하거나 그러진 않았을 거다. 고지식한 면이 있긴 해도 기본적으로 사려 깊은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황태자가 2황자를 안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면 1황녀의 짝으로 가장 어울리는 남자가 조단 크라우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물론 이제 자신이 있으니 그것도 의미 없는 가정이긴 했다.
통신을 끊은 로빈은 바로 황도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하는 건 역시 병력이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병력이 황태자를 호위하고 있다는 건데.
“린, 그쪽은 어떻게 된 거야?”
[상황 종료. 힐데 후작의 목을 베고 조셉 공작이 암살에 연루된 정황을 찾았다, 라고 황태자가 그랬어. 황태자는 황도로 떠났고, 우린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야.]
뭐야? 힐데 후작의 목을 베었다고? 게다가 증거?
물론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었지?
하지만 이것저것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어서 죽어 나자빠진 놈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황태자가 거기서 뭔가 찾았다는 게 반가울 뿐이었으니 말이다.
“서둘러줘. 도착하자마자 백랑, 흑웅, 그리고 너를 포함한 최정예 스무 명만 추려서 게이트를 타. 황도에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바로 갈게. 이번에는 손맛만 버렸는데, 황도에선 한바탕 크게 가는 거야?]
하여간 이놈의 모야족은 진짜.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