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그건 모르겠지만 심심하진 않을 거야.”
[좋아! 밤새 달리면 내일모레 도착해.]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셉 공작이 무슨 수를 써도 황도에 잔뿌리를 모두 제거한 상태라 바로 병력을 어쩌진 못할 것 같았다. 황도 저택에 남은 기사들도 만만한 녀석들이 아니었고.
황태자가 도착해 폭탄을 터트릴 시간까지 계산해 봤을 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조셉 공작이 이상한 발악을 할까 봐 걱정되긴 하지만 놈도 이 상황에 그런 정신머리가 남아있을 거 같지 않았다.
차라리 황태자나 황제를 공격하는 게 더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황도에서 난리라도 난다면 로빈의 몸을 보호할 영지의 최정예 전사들은 정말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영지의 일을 대충 마무리 지은 로빈은 바로 게이트로 향했다.
식구들도 로빈이 부인감으로 낙점 지은 앤이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염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숨길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솔직히 말한 건데 오히려 숨기는 편이 차라리 나았나 보다.
“자기 여자는 자기가 지켜야 하는 거야, 로빈. 꼭 무사히 데려오너라.”
“그래, 로빈. 혼자 황도에서 얼마나 무섭겠니. 가서 꼭 안아줘.”
“네, 걱정 마세요. 너무 예뻐서 놀라지나 마시고요.”
“호호. 그래, 한번 데려와 봐. 우리 아들이 얼마나 눈이 높은지 한번 확인해 보자.”
가족들에게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건넨 로빈은 바로 게이트를 타고 황도로 넘어갔다.
그 시간, 황도에 있는 로빈의 저택에서는 앤과 애니가 초조한 얼굴로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로빈!”
로빈을 보자마자 울먹이며 달려든 앤은 한참을 울며 불안에 떨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하며 자신의 정체부터 밝혔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그녀도 은연중 느끼고 있었나 보다.
왠지 너무 쉽게 밝히는 거 같아 맥 빠지긴 했지만 중요한 일을 끝까지 숨기다가 고구마를 처먹이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미안해요, 로빈.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난 그저…….”
“괜찮아요, 황녀님.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울지 말아요.”
“존댓말은 싫어요, 로빈.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줘요. 거리감 느껴진단 말이에요.”
“그래? 그럼 그럴게.”
자신이 1황녀라는 사실을 밝혔음에도 로빈의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안심한 다이앤은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걱정되는 문제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차기 황제로 유력한 황태자가 자신들의 결합을 반대하는 거였다.
“황태자 전하가 제게 경고하셨어요. 오빠가 무사하길 원하면 얌전히 있다가 국외로 시집가라고요. 그러지 않으면 자신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고 말이에요.”
“음……. 그래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네요. 황태자도 문제지만 그 아래의 귀족들도 문제니까요. 후환이 될 수 있는 2황자가 변경백과 결합하는 걸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죠. 사실 저도 황태자파 입장에서는 좀 애매한 존재거든요. 물론 황태자 전하도 문제긴 하지만요. 게다가 이게 또 다른 방향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요.”
황태자의 최측근들은 어느 정도 나를 믿고 있는 거 같고, 황태자 자신도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나를 꽤 믿고 있지만 다른 귀족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야말로 중간에 튀어나온 존재이니 신뢰할 수 없다는 거겠지. 어쩌면 내가 황태자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 시기하고 있을 수도 있고.
물론 황태자를 완전히 설득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잡음이 줄어들게 되겠지만 잡음이 아예 없을 순 없었다.
설령 황태자가 2황자를 안고 가기로 해도 내 부마로서의 자질이나 격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지들 구미에 맞는 신랑감을 황녀에게 붙이려고 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뻔뻔한 짓거리지만 그런 놈이 분명 한둘은 나올 것이다.
“그럼 어쩌죠? 저희는 이대로 헤어져야 하나요?”
“글쎄. 어떨까? 앤은 내가 아니면 안 돼? 우리가 사귄 지 이제 겨우 반년 남짓이잖아?”
“…안 돼요. 시간이 뭐가 중요해요? 첫눈에 반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음, 그렇다기에는 첫 만남이 너무 강렬하지 않았나? 내 잘못도 있지만, 이상한 놈 취급받은 것도 같고.
“첫눈에 반했다기에는 앤의 행동이 영 그랬는데. 연회에서 만난 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잖아?”
“그거야…….”
별거 아닌 이야기에 나와 시선도 못 마주치면서 피하는 앤의 모습이 좀 미심쩍긴 했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고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했다.
“우선 앤은 건강부터 관리해.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2황자 전하와도 이미 말을 맞춰 놨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오빠랑요? 벌써 오빠를 만나셨어요? 그럼 제가 황녀인 것도 아셨겠네요.”
“우연히 그렇게 됐어. 어차피 내가 널 좋아하는 건 황녀이기 때문은 아니었거든. 그냥 너라서 좋은 거야. 그러니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자고.”
“로빈…….”
언젠가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대사를 던지고 조금 감동한 듯한 앤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뭔가 인위적인 감이 없지 않았지만, 자신의 말이 거짓인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황녀의 신분은 솔직히 서로에게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차라리 그냥 남작 영애였으면 이것보다는 더 깔끔하게 혼인할 수 있었을 테니까.
어쨌든 로빈은 그렇게 앤과 진심을 나누고 황도의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황태자가 던지는 폭탄이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그 역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 * *
황태자가 터트린 폭탄은 생각보다 더 거대한 녀석이었다.
힐데 후작과 조셉 공작이 황태자 암살을 모의했음을 입증하는 서신뿐만 아니라 3황자파 귀족들의 비리 정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힐데 후작의 비리 장부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연중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힐데 후작이 구명줄처럼 몰래 숨겨놓은 그 비리 장부에는 황태자파 귀족들의 비리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그 자료들이 지금 고스란히 황태자의 품 안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귀족들은 황태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어쨌든 황태자가 직접 조셉 공작을 고발한 상황에서 마나 폭탄을 빼낸 것도 조셉 공작의 지시를 받은 하급 관리인 것이 밝혀졌고, 다른 3황자파 귀족들도 자신들이 예전에 저지른 비리 때문에 곤란을 겪으며 3황자파 세력 자체가 지리멸렬해 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어이없는 건 하급 관리가 조셉 공작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한 부분이었다. 지금 조셉 공작이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로빈은 황도의 저택에 머문 채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 들으며 열심히 황태자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가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다가 황태자가 알아서 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래도 걱정스러운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었는데.
“조셉 공작이 그냥 무너질 리는 없는데 말이야. 물론 황태자도 제법 신경을 쓰고 있긴 하지만…….”
악역의 특성상 마지막에는 무조건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된다.
최후의 승자는 물론 주인공이지만 유리하던 상황이 악역의 숨겨진 한 방으로 전세가 뒤집히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의미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그런 반전의 반전이 극의 매력이라지만 현실에서 그런 반전을 경험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태자도 그걸 잘 알고 있는지 저택에 기거하는 조셉 공작의 사병은 물론 조셉 공작의 영지에서 병력이 움직이는 것까지 감시하고 있단다. 게다가 3황자파 다른 귀족들의 사병들까지 감시하고 있다니 어느 정도는 안심할 수 있었지만…….
“뭔가 불안해. 지금 상황에서 조셉 공작에게 뭐가 남았을까?”
고민하며 정원을 거닐던 로빈은 한쪽에 파라솔을 펼쳐놓고 티타임을 즐기는 세 여자를 발견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트로이카도 은근히 불안한 건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며칠 전 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던 날.
분명 정예 전사들만 출동하라고 했는데 이상한 이물질이 하나 끼어있었다. 바로 실비아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바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황태자가 일방적으로 두드려 패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데다가 황도에 생산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실비아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둔 것이다.
다만 실비아의 목적이 다이앤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그냥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린과 실비아가 다이앤과 처음 만나는 날.
다이앤은 영지에 머무는 제 첩실 둘이 이곳으로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전투 모드에 들어갔다.
염색했던 머리와 눈까지 원래대로 되돌린데다가 황실 연회에서 처음 만났던 그 도도함과 날카로움으로 무장하고 손에는 귀부인 전용 액세서리인 손부채까지 들고 두 여성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물론 속은 전혀 아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고급스럽고 앙칼진 러시안 블루 같은 느낌이었다.
“…미친. 멋있잖아? 진짜 여왕님 같아.”
“저 포스로 남작 영애라고?”
그런 무장이 효과가 있었는지 확실히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다이앤의 정체가 1황녀라는 사실까지 밝히자 둘 다 머릿속이 하얘진 듯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는데.
상대를 보고 만만해 보이면 이겨 먹겠다고 의기투합하던 둘의 각오가 한 번에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도도하게 웃으며 지켜보던 앤이 둘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자 그때부터 둘 다 방끗방끗 웃으며 다이앤을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대화가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앤이 두 녀석을 모두 제압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안면을 튼 세 여자는 매일 이 시간이 되면 저렇게 파라솔을 펴고 자기들만의 티타임을 즐겼다. 이 순간만은 로빈 없이 자신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
마치 강아지 둘과 고양이 하나가 옹기종기 모여 사이좋게 햇볕을 쬐는 느낌이라 눈은 참 즐겁지만, 마음은 좀 불편했다. 조셉 공작의 일은 남의 일이지만 이건 눈앞에서 벌어지는 내 일이라고 할까?
그나마 정상적인 앤이 저 두 녀석에게 이상한 걸 배우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 그 양반 표정은 아직도 못 잊겠다니까. 정말 걸작이었지.”
“존도 그렇고 릭스터도 그런 깡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존이야 그렇다 치지만 릭스터가 진짜 걸작이지. 아마 울면서 도망갔을걸.”
힐데 영지에서 공을 세운 모야족 전사들과 백랑은 지금도 종종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그 일이 자신이 계획한 게 아니라 존의 독단이었다는 걸 알고는 아연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상관없다는 분위기였다.
하긴 자신도 그 내막을 전해 듣고는 그 무모함에 혀를 찰 정도였으니 그걸 직접 목격한 전사들의 충격도 상당했을 것이다.
존은 정말 원한 만큼이나 깡도 대단한 양반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양아치 같은 힐데 후작이 그렇게 응징당한 건 쌤통이었지만 말이다.
* * *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될 수가 있지? 도대체 그 서신은 뭐냐고?”
황태자 시해 미수의 피의자 신분으로 자택에 연금당한 조셉 공작은 갑자기 꼬여버린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중 가장 어이없는 건 황태자가 결정적인 증거라며 내민 서찰이었는데 자신의 인장이 정확히 박혀있어서 빼도 박도 못하게 됐지만, 전혀 기억에 없는 물건이었다.
“대체 왜 그딴 짓을 한 거냐, 힐데 후작? 혹시 미치기라도 한 건가?”
황태자는 서찰을 얻은 후 바로 황도로 복귀했기 때문에 그걸 위조할 틈도 없었다. 그 정도로 정교하게 위조하려면 보통 솜씨로는 불가능하고, 시간도 제법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그걸 위조해 들고 있던 놈이 바로 힐데 후작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말은 자신이 기르던 개에게 덜미를 물렸다는 말이었고, 그런 점이 조셉 공작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게다가 그놈조차 황태자를 시해하려 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즉결 처분되지 않았던가.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이대로 그냥 무너질 수는 없어.”
악수 중의 악수지만 정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조셉 공작은 지금의 상황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