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역시 이쪽 세계의 귀족에게는 혈통 공격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능글맞게 말을 이어가던 조셉 공작이 크게 노하며 바로 공격 명령을 내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수가 더 적어서 상대가 성문 밖으로 나오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 긁어본 건데 제대로였다. 성벽이라 봤자 담벼락 정도고 입구도 넓지만 그래도 저쪽이 나와주는 게 더 상대하기 편했기 때문이었다.
공격 명령을 내릴 때만 해도 조셉 공작은 자신만만했다.
자신들이 골라 뽑은 기사들에다가 정예라는 황궁 근위대까지 합쳐 대략 1,500여 명.
상대의 수는 기껏해야 500 남짓밖에 안 되니 절대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조셉 공작의 명을 받고 기사들이 밖으로 뛰쳐나오자 큰 함성이 울려 퍼지며 알 수 없는 병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역적 조셉 공작을 잡아라!!”
상대가 뛰쳐나오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던 로빈도 갑자기 영문 모를 병사들이 달려들자 이게 뭔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그레이츠 백작님. 백작님이 놈들의 시선을 끌어주셔서 쉽게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조단 크라우가 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단 크라우가 이곳까지 병력을 몰고 왔다는 건 황궁 안에 들어간 황태자 역시 자기 일을 마치고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역적 조셉 공작을 잡아라!!”
아니나 다를까 황궁 안에서 황실 근위대를 앞세운 황태자가 조셉 공작의 뒤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황궁에 들어가 레니아 공녀를 구하고 억류 중이라던 황실 근위대까지 모두 회복시킨 모양이었다.
조셉 공작은 자신의 뒤에서 느닷없이 병력이 튀어나오고 분명 마나 독에 중독된 황태자가 멀쩡히 검을 휘두르며 병력을 지휘하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패닉에 빠져있었다.
“이거, 우리가 들러리가 됐군요. 저희는 빠지죠.”
“그게 좋겠군. 이 전투는 황태자 전하가 마무리 지어야지.”
로빈의 말에 2황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 외에 대안이 없다면 몰라도 저렇게 상대를 압도할 만한 병력이 등장했으니 자신들은 빠져주는 게 더 좋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변경백과 2황자가 병력을 몰고 황도를 활보한 것 자체도 훗날 꼬투리 잡을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크라우가 몰고 온 병력은 대략 2,000명 남짓.
하지만 상당히 단련된 기사와 병사들이었는데, 예전부터 황태자가 숨겨놓은 병력 같았다.
아마 로빈이 준 마수 핵으로 저 병사들을 따로 육성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 정도 병력이 황도에 숨어있었다는 건 처음부터 황태자가 궁지에 몰릴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하, 그러니까 저 양반이 가지치기를 한 거네. 조셉 공작이 몰렸으니 이제 황태자파 귀족 중에서 옥석을 고르겠다는 거군. 거기에 속아 넘어간… 이런 걸 속아 넘어갔다고 할 수 있나? 어쨌든 그렇게 막판에 넘어간 놈들만 병신 된 거네. 물론 레니아 공녀가 납치된 건 예상외의 일이었겠지만 말이야.”
조단 크라우가 지휘하는 병력이 2,000 남짓.
그리고 황태자가 몰고 나온 근위대의 수가 대략 500 정도.
조셉 공작의 병력도 1,500 정도였기 때문에 상대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의 격차는 아니었지만 이미 정신을 놓아버린 수뇌부 때문에 애꿎은 병사들만 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기사들을 몰아 상대 진영을 일점 돌파해 조셉 공작에게 달려가더니 바로 목부터 날려버렸다.
악당과는 전혀 다른 주인공의 품격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조셉 공작이 무너지자 나머지는 바로 항복했고, 황태자는 귀족들을 연행하면서 기사들에게는 근신을 명했다. 죄상에 따라 어느 정도 처벌받을 수도 있겠지만 기사들에게는 웬만하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려는 모양이다.
“역시 가차 없구만. 바로 목을 날려버리네.”
로빈이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는데 전장을 정리하던 황태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이 정도로 일이 풀렸으면 환하게 웃을 만도 한데 황태자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다른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 같아 로빈도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심각하게 황태자를 맞이했다.
“수고가 많았네, 그레이츠 백작. 자네가 생각보다 거칠게 움직여주는 바람에 상대의 눈을 쉽게 피할 수 있었으니 말이야.”
“제국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옵니다.”
“됐네. 아마 라이언 때문이었겠지? 당연히 황도를 빠져나가야 할 백작이 여기 이렇게 있는 걸 보니 그런 거 같은데.”
“네, 뭐.”
아우. 진짜 저 궁예, 정말…….
대체 뭔데 모르는 게 없냐? 진짜 내 스토커였어?
로빈이 허탈해하는 사이 2황자에게 다가간 황태자는 심각한 얼굴로 더 심각한 이야기를 꺼냈다.
“라이언,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뭔가 독에 당한 거 같은데 뭔지 모르겠어. 그리고… 1황비님도 같이…….”
왜 저렇게 심각한가 했더니 황제와 1황비가 같이 쓰러진 모양이다.
그러니까 조셉 공작이 발표한 황제가 쓰러졌다는 말은 사실인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보다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한 황제가 어째서 쓰러졌는지는 정말 의아한 일이었다.
물론 소설에서는 2차 재앙 때 전염병에 걸려서…….
응? 설마 아니겠지?
소설에서 황제가 병에 걸려 쓰러진 후, 얼마 안 있어 황도에 전염병이 창궐한다. 그리고 그 병으로 황제까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시기상으로 너무 일렀다. 황제가 그 병에 걸리는 건 내년 겨울, 적어도 1년은 넘게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황제가 쓰러진 건 사실이었고, 황태자와 2황자 모두 서둘러 황제의 침실까지 뛰어갔다. 물론 옆에 있던 로빈도 덩달아 그 대열에 합류했고 말이다.
* * *
황제의 침실에는 황제와 1황비 소피아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소피아 황비는 다이앤이 10년쯤 지나면 저렇게 변할 거라 생각될 정도로 똑 닮은 여인이었는데 황제가 첫눈에 보고 사랑에 빠졌다는 게 이해가 될 정도로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황비와 준수한 황제가 저렇게 나란히 누워있으니 뭔가 그림이 되긴 했지만, 흑마법사와 신관들의 설명을 들어봐도 아무런 증상도 없이 저렇게 못 일어나고 있는 거라니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저 장면이 소설 속에서 묘사한 장면이랑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황태자 역시 로빈과 같은 생각인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에게 다가가 등 부분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았는지 아까보다 더 굳은 얼굴로 주위를 완전히 물러나게 한 후 앞으로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황태자의 반응을 확인한 로빈 역시 지금 황제가 전염성이 강한 그 병에 걸렸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대체… 왜 지금 저 병에 걸린 거지? 말이 안 되잖아? 느닷없이 전염병이 저렇게 왔다고?”
황태자는 뭔가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2황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1황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황태자의 명대로 접근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고 있는 걸 보면 이성은 남아있는 거 같은데 분위기만은 너무 심각했다.
그리고 로빈은 바로 영지로 연락을 넣었다.
만약 저게 진짜 그 병이라면 어떻게든 약을 구해 황도로 실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곤란하네. 처음에 만든 약은 이미 다 나누어준 지 오래야. 게다가 그것도 한참 전이라 남은 걸 구할 수 있을지는…….]
로빈이 바로 영지에 연락해 약부터 찾았지만, 알버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생산 시설이 없는 상황이라 약을 만들기도 어렵고, 예전에 실험용으로 만든 것들은 이미 다 나누어줬기 때문에 지금은 따로 구할 방법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떻게 안 되나요? 처음에 만든 것도 생산 시설 없이 만든 거잖아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생산 시설 없이 약을 만들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지금 당장 급한 게 아닌가?]
“그렇죠. 그런데 약이 없다니…….”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그 약이랑은 조금 다르지만, 효과는 더 탁월한 걸 실비아가 만들 수 있네. 사실 이 약도 그 녀석이 만든 걸 열화시킨 것에 불과하거든. 열화판이 오리지널보다 더 복잡하게 만들어진다는 건 좀 웃긴 일이지만, 애당초 이 물건의 시작이 실비아의 특제품이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실비아가 고유 마나로 가공한 물약이란 거죠? 절대 대량 생산할 수 없는 거요.”
효과가 약해진다고 해도 실비아만 만들 수 있는 걸 대량 생산하려면 당연히 과정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비아가 이쪽 방면으로는 보통 뛰어난 녀석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그렇게라도 약을 만들 수 있다니 우선 녀석을 청해야 할 거 같았다.
[하지만 황실에서 그걸 허락할지 모르겠군. 실비아가 그 약을 만들려면 상대의 체질을 완벽하게 파악해야 하는데…….]
“아, 그건…….”
상대가 무려 황비와 황제인데 체질을 완벽하게 파악해야 한다라.
로빈은 알버스의 말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는 걱정부터 들었다. 황족이 자신의 체질을 완전히 공개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금기시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약이나 독은 체질을 좀 많이 타는 경향이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 땅콩을 갈아 넣은 음식을 주는 것처럼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거나 소음인에게 따듯하고 혈액 순환에 좋은 음식을 쓰는 것처럼 특정 약초를 사용함으로써 더 좋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약의 경우 더욱 두드러졌다. 같은 효과를 내는 약을 만들 때도 체질을 분석한 후 그에 맞춰 약을 만들면 그 효과를 더욱 증폭시킬 수 있었다.
전생에 살던 세계에서도 한의학에 그런 이론이 있었지만 명확하게 체감하기는 힘든 정도였는데 이곳은 정말 느낌이 확 올 정도로 큰 차이를 보여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체질을 분석한 후 가장 효율적인 조합을 찾아내는 게 바로 실비아의 특기였다. 어렸을 때부터 실비아가 만든 맞춤 약들은 다 그런 식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로빈의 특질을 분석해 만들었음에도 아직 효과가 뭔지 오묘하기만 한 체질 개선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녀가 대놓고 만든 약들은 대단한 효과를 자랑했다.
그렇게 체질을 정확히 분석하는 건 의학의 기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황족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아무리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한 황족이라도 체질을 완전히 간파한 후 맞춤 독을 만들어버리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로빈이 나서서 약을 만들겠다고 할 때 암살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반대해도 딱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물론 죽어가는 사람부터 살리는 게 우선이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가 들어가면 그 당연한 일조차 다반사로 외면당하는 게 이 바닥이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로빈도 굳이 쓸데없이 나서고 싶진 않은데 다이앤이 사랑하는 1황비를 생각하면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장모님이었으니 말이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이렇게 씨암탉 한 마리도 못 얻어… 흠흠.
그건 걸 떠나서 다이앤의 가족도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니,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좀 난감하긴 하지만 어쨌든 실비는 보내주세요. 마나석은 아직 남아있겠죠?”
[몇 개 남아있긴 하다더군. 당장 작업에 들어갈 물건이라 좀 그렇긴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 아, 그리고 그 특제 약에는 마수 핵이 들어간다네. 실비아에게 들려 보내도록 하지.]
“네, 부탁드릴게요.”
천재(天災)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 망할 전염병이 왜 벌써 난리를 피우는지도 의아했지만 그런 건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생각할 일이었다. 이 병은 전염성이 제법 강한 것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 시체를 태워도 사방으로 퍼지는 아주 악독한 놈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매장을 하면 오히려 피해가 줄어들긴 하지만 만일의 사태도 생각해야 했다.
알버스와의 통신을 끊은 로빈은 가장 먼저 황태자를 찾았다. 아무래도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황태자의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황태자가 마음을 먹으면 잡음이 거의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럴 수가, 그 약이 벌써…….”
로빈 입장에선 이 전염병을 알고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둘째 치고 그런 섹스 보조제가 황제나 황비에게 특효약이란 걸 어떻게 이해시킬지 난감했는데, 그의 영지에서 이런 약을 개발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황태자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운을 띄우자마자 상대가 철석같이 알아들은 건 좋은 일이지만 저 반응을 보니 뭔가 미묘하다고 할까?
아무래도 전생의 로빈 역시 이 약을 개발했던 모양이다. 다만 저 반응을 보니 그 시기는 지금보다 많이 늦은 거 같지만 말이다.
“그래, 바로 그 약이야! 그걸 바로 황제 폐하께…….”
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다가 다시 의뭉스럽게 반응을 바꾼 황태자는 바로 약을 쓰자고 말하다 순간 표정을 굳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