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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81화 (181/303)

181화

“그러니까 지리상으로 따져봐도 불가능하다고요. 작센 백작령 주변에 굵직한 영지들만 봐도 딱 답이 나오는데요.”

“음.”

다른 귀족들이 생각하고 있을 때 재빨리 답부터 냈다. 어차피 황태자만 이해하면 되니 다른 귀족들의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작센 백작령 서쪽에는 크라우 백작가가 있고, 동쪽으로는 레오니스 공작가가 있군요. 그리고 그 위에는 조셉 공작가가 있지만, 그곳은 이제 황태자 전하가 가장 믿는 신하를 내려보내시겠죠. 그러니까 작센 백작령에서 병력을 일으키면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됩니다. 세 곳 모두 황태자 전하의 충신들이 버티고 있어서 어떤 영지도 반란에 호응해 주지 않겠죠.”

“허허.”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중부의 리아넨 공작가인데, 거긴 아시다시피.”

“혈통을 가장 중요시하는 곳이지. 안 그런가, 리아넨 공작?”

“맞습니다, 황태자 전하. 평민 황비 출생인 2황자를 지지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황태자조차 혈통이 별로라고 고개를 젓는 리아넨 공작가가 2황자를 지지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결국 2황자가 작센 백작령에 들어서는 순간 황태자파 귀족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저런 상황입니다. 그러니 반란이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누구라도 죽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가능성도 없는 일에 누가 매달리겠습니까?”

“하지만…….”

“군권을 가진 이상 외세와의 결탁도 생각해야 할 겁니다.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와, 이 정도면 그냥 2황자가 싫다는 거겠지? 너 이 자식, 누군지 내가 딱 기억해 놓는다.

“외세라… 기껏해야 남부 연합국이나 해상 왕국인데, 남부 연합국 사람들은 원체 낙천적인 성품이라 남의 나라에 병사를 파견할 만한 사람들이 못 되고, 해상 왕국은 제가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곳은 작센 백작령과는 원수 같은 사이지. 아마 2황자가 그쪽과 손을 잡는 순간 백작령 내부에서 들고일어날 거야.”

“네, 참고로 해상 왕국 쪽에서도 2황자에게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저번 토벌 때 그쪽 고위 인사 몇이 2황자 전하께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끙.”

“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2황자 전하가 작센 백작의 양자로 들어갈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황족이 황실의 성을 버리고 귀족의 양자로 들어가겠습니까?”

“어? 모르셨나요? 이미 입양 신청서를 냈는데요.”

확실히 이쪽 세계 귀족들은 혈통에 대한 프라이드와 가치 평가가 대단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그랬고, 그중 황족에 대한 자부심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나중에 들은 건데 단순히 황족의 상징인 허니 블론드와 푸른 눈만을 가렸을 뿐인 다이앤의 정체를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런 맥락이란다. 즉, 황족이 황실의 상징과도 같은 저 두 가지를 숨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황족의 성을 아예 버린다는 2황자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있나.

황망해하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로빈은 2황자와 이 이야기를 나눌 때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인가?

작센 백작령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고, 혹시나 해 2황자에게 물어봤는데 처음에는 그 역시 심각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혈통을 부정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황족으로서의 자부심보다 가족을 더 중요시하는 남자였고, 그렇게 황위 계승권을 버려야 황비와 다이앤 모두 행복할 수 있다는 말에 결국 자기 뜻을 꺾었다.

“하, 이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겠군.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좀 아쉬운데?”

그렇게 황족만이 가지는 그 많은 혜택을 모두 포기하기로 한 라이언이 아쉬워한 건 어이없게도 룩센 대제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홍길동이 율도국을 세울 정도로 호부 호형은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그래도 이 와중에 그것부터 찾을 줄은 몰라서 로빈도 당황했었다.

하지만 왠지 그런 모습도 라이언답다고 할까?

그리고 그날로 바로 작센 백작령을 찾아가 입양 절차를 밟았다.

자신의 후계자를 걱정하던 작센 백작이 두말없이 반긴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그도 5년간 라이언을 지켜보며 황자만 아니면 이곳을 맡기고 싶다고 항상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긴 후계자가 없는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2황자를 보면 탐낼 수밖에 없었다. 황제로서는 낙제지만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로서는 최고의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서기관, 사실을 확인해라.”

귀족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황태자는 서기관에게 명해 사실부터 확인했다.

“맞습니다. 며칠 전 작센 백작 쪽에서 공문이 올라왔고, 그곳에 작센 백작과 2황자 전하의 서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요. 이제 황족도 아니요, 단순히 변경백이 될 2황자 전하께 쓸데없이 심력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황태자도 2황자가 이미 황족의 자리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계획했을 로빈을 보니 그저 헛웃음만 났는데.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머리를 굴린 이유가 단순히 1황녀 때문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저 녀석이 아니면 황자에게 감히 황족의 혈통을 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전부터 묘할 정도로 사람을 잘 파악하는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좋다. 라이언의 뜻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겠다.”

[완료!]

2황자 라이언 트와이드를 지켜내라.

보상: 다이앤 트와이드

페널티: 남부 해안가의 비극

기한: 라이언 트와이드의 사망. 황태자의 확답

그리고 황태자가 그렇게 선언하자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아무래도 황태자가 2황자를 살리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하긴 이번에 2황자가 조셉 공작을 향해 칼을 휘두른 것도 있는데 불안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어쩌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황가의 성을 버려버렸으니 2황자를 어쩔 명분조차 사라진 거고.

“그리고 1황녀 다이앤 트와이드를 그레이츠 백작과 혼인시키겠다. 그레이츠 백작, 라이언 트와이드가 라이언 작센이 되었지만 1황녀와의 혈연관계만은 그대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그건…….”

“그래. 만약 라이언 작센이 반역을 일으키면 그레이츠 백작 역시 그와 같은 처벌을 받는다는 의미다. 제국에서 유일하게 연좌제로 처벌받는 게 바로 반역이니까. 그러니 자네도 잘 감시해야 할 거야. 라이언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도록.”

와, 이 양반이 인심 쓰네. 이걸 이렇게 엮어준다고?

적어도 오늘만은 황태자 전하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고 싶을 정도였다.

“흠흠, 그레이츠 백작에게 황녀라니요. 부마의 자질을 다시 살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이야 백작가지만, 따지고 보면 자작가에 불과한데…….”

로빈을 부마로 임명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자 몇몇 귀족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게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다이앤 1황녀에게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외가가 한미하다는 것과 황태자의 눈 밖에 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떡하니 남부 변경백인 오빠가 나타났으니 어찌 탐나지 않을까?

게다가 2황자가 조셉 공작에게 달려든 것도 그렇고 황태자와 2황자 사이에 자신들이 모르는 묘한 유대감까지 감지된 상황.

그러니 지금까지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1황녀가 제대로 된 신붓감, 혹은 며느릿감으로 급부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저들은 지금 다이앤이 아카데미에 다니며 연애를 즐기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니 말이다.

그런 귀족들의 작태가 어이없었는지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리아넨 공작이 입을 열었다.

“자질이라……. 재미있는 말이군. 조셉, 리아넨, 레오니스, 크라우, 크레톤, 그리고 리아누스. 이 가문을 제외하고 다른 가문이 감히 그레이츠의 혈통에 대하여 논할 자격이나 있나? 누가, 무슨 자질을,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거지?”

리아넨 공작이 입에 올린 여섯 개 가문은 그레이츠와 함께 직계만으로 혈통을 이어온 일곱 개의 가문이었다. 신년마다 황제의 친필 서한으로 황궁 연회에 초대를 받는 가문들이기도 했고.

즉, 혈통 면에서는 그레이츠에게 뭐라 할 수 있는 가문이 거의 없다는 표현이었다.

저 중에 레오니스 공작과 크라우 백작 자제는 골수 황태자파였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었고, 크레톤 후작은 황제만 따르며 웬만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데다가 리아누스 백작은 황태자의 명으로 조셉 공작령으로 출진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리아넨 공작의 말은 지금 저기서 불평하는 가문 중 한 가문도 로빈의 자질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었다.

지극히 혈통 지향적이고 편협한 발언이었지만 다른 귀족들의 입을 닫기에는 충분했는지 다들 뭐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그래, 우리 영지가 좀 작긴 하지만 혈통 자체는 좋고(그게 뭐가 대단한 건지 이해는 안 가지만), 공장도 있는데다가 워프 게이트까지 있잖아?

내가 꿀리는 게 뭐야?

좀 이상한 걸 팔아서 그렇지, 우리도 이제 웬만한 영지보다는 훨씬 부자거든.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같이 딜도를 파는 사업적 파트너라고 지원 사격해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안 드는 놈들에게 일침을 먹인 리아넨 공작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묵례하자 그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인맥의 힘은 참 달달했다.

“좋다. 경들이 그리 이의를 제기하니 정정하겠다. 1황녀의 배필감은 1황녀가 직접 정하게 할 것이며, 만약 1황녀가 그레이츠 백작을 거부한다면 다른 귀족 자제를 배필로 정하겠다. 그러니 더 이상 불손한 불만을 품는 건 자제하도록 하라.”

황태자가 명쾌하게 결론을 냈다.

나를 부마로 확정 짓지 않고 여지를 둔 게 마음에 들었는지 뭔가 기대에 찬 놈들이 보였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미 앤은 내 여자였기 때문이다.

1황녀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건 결국 허울에 불과했다.

음……. 여기서 앤이 내 뒤통수를 치면 그것도 환장하는 대반전이 되긴 하겠군.

* * *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되고 입이 귓가에 걸린 나를 바라보며 황태자가 인상을 썼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내가 1황녀를 선택한 게 못마땅한가 보다.

“혈통 좋고 가문 좋은 여자를 소개해 준다는데 굳이 다이앤을…….”

“황녀님 정도면 혈통도 좋죠. 자그마치 황가의 피가 반이나 들어있는데요. 거기다가 오빠가 남동부 변경백. 집안도 좋네요. 외모는 원래 완벽했고요.”

자신이 황가의 피를 입에 담자 황태자도 할 말이 없는지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뭔가 깨달은 듯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로빈에게는 어딘가 불편해지는 그런 음흉한 미소였다.

“이제 백작도 좋은 시절 다 갔군. 부마가 되면 당연히 명예 후작에 오르게 될 테고, 그러면 변경백이든 뭐든, 어쩔 수 없이 정기 귀족 회의에 참석해야 하지 않나.”

“…네?”

부마가 되면 명예 후작으로 승격하게 된다. 물론 이 작위는 단승 작위이며 로빈의 아들은 다시 백작으로 돌아가겠지만, 로빈 본인은 후작으로 대우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부마의 사회적 체면을 위해 고안된 제도였는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황녀가 후작가나 공작가로 시집갔기 때문에 로빈도 잘 모르고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황태자의 말처럼 단승이라도 후작이 되면 최소한 정기 회의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

“쯧쯧. 그러게, 왜 다이앤을 욕심냈나. 얌전히 내가 소개해 주는 귀족 영애를 만났으면 북부 지방에서 조용히 잘 지냈을 텐데. 이런 걸 자업자득이라고 한다지?”

“…말씀은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저 황태자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하는 태도는 매우 얄미웠다. 막 깨소금이 떨어진다는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정기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건 좀 그렇지만 기껏해야 분기에 한 번이었다. 얼굴이나 몸매, 게다가 성격까지 내 타입인 앤은 이제 영원히 내 옆에 있을 거고.

이 정도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물론 오늘처럼 헛소리를 늘어놓는 그런 회의라면 굳이 참석하고 싶지 않지만 뭐, 어쩌겠나. 알아서 적응해야지.

그렇게 생각을 다잡아먹는데 황태자가 사뭇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자신이 잘 알던 그 약이 아니라 실비아가 따로 약을 만든다는 이야기에 조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와 황비 마마를 잘 부탁하네.”

“네, 약을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그 약으로 정말 황제 폐하께서 쾌차하실까요? 이건 그냥 섹스 보조제에 불과한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약만 정상이면 반드시 회복하실 테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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