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하지만 앤이 레니아 공녀처럼 할 수 없다는 것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앤은 겉보기에는 포스가 넘치지만 사실상 쭈구리 같은 존재고,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 오히려 하찮은 맏내(막내 같은 맏이)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여자였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초장에 기를 잡아놔야 하나?
오래전 아버지 윌리엄이 어린 저를 붙잡고 아내들 간의 서열은 자기들까지 정하는 거지 거기에 남자가 간섭하기 시작하면 가정의 불화가 깨진다고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어머니 마리아나가 작은어머니 세릴을 이리저리 조교하기도 했었단다. 당연히 심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누가 위인지 정도는 정확히 인식시킨 모양인데.
물론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지만,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서열을 잡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랄까?
그런데 그런 걸 저 앤이 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뭐, 지금까지는 상당히 잘 해내고 있는 거 같았지만 말이다.
두 여자와의 즐거운 티타임을 마치고 앤과 오랜만에 교정을 거닐었다.
이제 이 생활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아 마지막으로 기분을 내는 중이랄까?
염색을 푼 그녀의 화려한 금발이 뭇 학생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런 거야 이미 익숙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윤기 있는 머릿결이 찰랑거리는 모습은 참 매혹적이었다.
처음에는 갈색 머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제대로 된 금발이 눈앞에서 살랑대니 정신을 차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분명히 이 여자의 매력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예고편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완전체(?)로 돌아온 그녀의 파괴력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금발 백마(?)의 로망이나 병신 같다고 치부한 머리카락 페티시가 대체 왜 생기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앤이 황녀인 건 솔직히 별로 상관 않거든. 그런데 이 머릿결은 정말……. 머릿결 자체는 예전에도 좋았던 거 같은데 염색 마법을 푸니까 또 다르네.”
“헤~ 예쁘죠? 솔직히 저도 황족인 건 별로인데 이 머릿결은 마음에 들어요. 사실 어머니도 머릿결만은 정말 좋으셨거든요. 그리고 염색 마법을 쓰면 머릿결이 좀 변하거든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좀 답답하긴 했어요.”
“그래? 확실히 지금이 더 보기 좋네. 느낌도 좋고.”
“그래요? 로빈이 좋으면 저도 좋죠. 헤헤.”
그렇게 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다 문득 아까의 대화가 생각나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 녀석들이 널 그렇게 따르는 거야?”
“별거 아닌데요. 음……. 내 말 안 들으면 로빈의 침대에 들이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바로 꼬리 내리더라고요.”
…그렇게 단순한 거로?
물론 내가 앤의 말을 잘 듣는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그 녀석들이 물러났다고?
“왜요? 안 믿기세요? 둘 다 제 생각보다 더 로빈을 좋아하더라고요. 은근히 마성의 남자? 물론… 그 손길에 한 번만 몸을 맡겨도 절대 못 잊을 거 같긴 하지만…….”
마지막 말은 작게 중얼거린 거라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그 녀석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말에는 조금 민망했다. 제대로 뭔가 해준 것도 없는데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솔직히 저가 앤을 좋아하는 것과 둘을 좋아하는 건 방향이 좀 달랐기에 미안하기도 했고.
앤이 사랑이라면 둘은… 미운 정 고운 정? 어쨌든 좀 미묘하긴 했다. 물론 둘을 좋아하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러니 둘에게도 좀 더 잘해주세요. 키스조차 아직이죠?”
“…그거야 그렇지. 물론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거지만.”
“그러니까요.”
“그런데 앤도 경험은 아직이잖아? 너무 우쭐대는 거 같은데? 그러다가 첫 기회를 빼앗기면 서운하지 않겠어?”
두 여자에게도 잘해달라는 앤의 모습이 좀 귀여워 장난을 걸었다.
아끼는 여자의 삐친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내가 이상한 걸까?
“헤헤. 글쎄요. 삽입만 없었지 할 건 다 했잖아요? 아예 집에 데려다놓고 막막. 거기다 삽입이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길들여지는 기분이었어요. 처음에는 이 남자가 나한테 왜 이럴까? 날 정말 죽일 셈인가? 이랬는데 제가 황녀인 걸 알았다니 대충 이해할 수 있었고요.”
사실 삽입 외에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했다.
앤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정성 넘치는 펠라를 즐기거나, 그녀의 촉촉하고 깊은 그곳을 마음껏 만끽하기도 했으니까.
다만 삽입만 하려고 하면 전 우주가 방해하는 바람에 결국 포기했는데 그걸 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어쨌든 그건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문제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제 결혼하면 완벽하게 할 수 있겠죠. 헤헷.”
“뭐, 그래. 그래야지, 황녀니까.”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좀 억울했다. 때가 무르익었음에도 먹지(?) 못하는 거지 같은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황녀의 경우 혼인이 확정되면 그때까지 몸을 정갈히 한단다.
그 말은 퀘스트가 완료됐음에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세상에 왜 그런 이상한 풍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게 퀘스트의 농간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정말 더러운 세상이다.
“헤헤. 하지만 봉사는 괜찮잖아요? 오늘도 입으로 만족해 주세요, 로빈.”
뭔가 비릿한 게 거지 같다고만 알고 있는데 앤은 입으로 봉사하는 걸 정말 좋아했다. 가끔은 오히려 자신보다 더 즐기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그러지 말라는 데도 굳이 삼키면서 마무리 짓고 혀로 깨끗이 닦아내기까지 하니 솔직히 자신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먹어보진 않았지만, 그것의 맛이 어떨지는 매체를 통해 대충 짐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기분 좋긴 했다.
뭔가 제대로 배운(?) 여자처럼 간간이 올려다보며 눈 맞춤하고, 마지막까지 그렇게 정성껏 봉사하니 어떤 남자가 싫어할까?
적어도 자신은 그게 너무 좋았다.
성적 스킨십이 연인 간의 애정을 끌어올리는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더니 그 이후로 점점 앤이 더 좋아지는 걸 보니 확실히 그런 거 같았다.
이 여자도 그러고 보면 은근히 테크니션이라니까.
* * *
로빈이 그렇게 한가롭게 데이트를 즐길 때쯤 룩센 대제가 눈을 떴다.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잠시 눈을 뜨고 멍하니 있던 룩센 대제는 황태자가 다가오자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어떻게 되었지?”
“조셉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지금은 제압되었고요. 황제 폐하와 황비님께 알 수 없는 약을 쓴 황후와 그 소생 3황자, 2황녀는 연금된 상황입니다.”
“그랬군, 역시 황후였나?”
“네, 증거도 확보했고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후,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겠구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당당하게 승복하길 바랐거늘. 결국 그렇게…….”
황태자는 한탄하는 룩센 대제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고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2황자와 1황녀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허, 고얀 녀석 때문에 결국 멀쩡한 아들내미까지 내보내게 생겼군 그래. 아니지, 오히려 목숨을 부지하고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해줬으니…….”
2황자의 이야기에 헛웃음을 짓던 룩센 대제는 조용히 눈을 감고 황태자를 불렀다.
지금까지 자신을 부르는 룩센 대제의 목소리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페리안, 날 원망하느냐?”
“…….”
“하긴……. 그렇겠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황태자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황제의 잘못된 판단 하나로 수백만 백성들이 고통을 겪게 되지. 그래서 황제는 완벽해야 한다. 강인한 의지와 냉철한 판단력. 언제나 냉정을 잃지 말고 결정했으면 흔들리지 마라. 누구도 믿지 말고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라. 그러면 넌 나보다 더 좋은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다.”
“폐하…….”
“내일 바로 대전 회의를 열겠다. 내 마지막 과오는 내가 안고 가야겠지. 그럼… 나가 봐도 좋다.”
부드러우면서도 회한 깃든 목소리였지만 룩센 대제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저 황태자에게 좋은 황제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충고해 줄 뿐이었다.
룩센 대제의 분위기가 전과 달라서일까?
황태자 역시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 깊이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는… 폐하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네 어미는 좋은 황후요, 훌륭한 파트너였다. 소피아처럼 불같은 사랑은 아니었지만 따듯한 햇살 같은 여자였지. 그렇게 병사하지만 않았어도…….”
“정말……. 병에 걸려 돌아가신 게 맞습니까?”
“맞다. 그녀는 특별한 체질이었다. 어떤 독도 그녀를 해할 수는 없었노라. 네가 독에 유독 강한 것도 다 그녀 덕분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그녀와 나만의 비밀이었지.”
“그런…….”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녀를 존중했다. 물론 그건 지금 황후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너와 페루 둘 다 황제의 아이로 자라길 원했다. 더 완벽하고, 더 위대한 황제로 자라길 바란 거지.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그런 완벽한 황제 말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뭔가 어긋난 거 같지만……. 그래도 후회하진 않는다.”
“하…….”
“난 네게 언제나 황제일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건 사실이었다. 매사에 매정하고 냉정한 황제였지만 한 번도 허튼소리를 내뱉은 적은 없었다.
황태자 역시 지금 황제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섞여있지 않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버지 룩센 대제는 자신에게 항상 그런 남자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당부하자면, 황제의 자리는 외롭고 고된 자리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한결같을 수 없지. 그래서 가끔은 쉬기도 하고, 숨 돌릴 틈도 필요해. 레니아 그 아이는 심지도 굳고 너에게 헌신적이니 많이 아껴주면 좋겠구나. 그러면 그 아이가 너의 유일한 휴식처가 되어줄 거다.”
그렇게 말을 마친 룩센 대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아예 몸을 돌렸다
잠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태자 페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 후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룩센 대제는 건재한 모습으로 대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들이 놀랄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두 룩센 대제가 다시 황제로 돌아와 정국을 주도할 거로 생각했지만 그는 등장하자마자 폭탄부터 터트렸다. 그것도 생각보다 후폭풍이 거센 대형 폭탄이었다.
“반역자 조셉 공작의 일가는 모조리 처단하고 조셉 공작가를 귀족 명부에서 삭제한다.”
조셉 공작에게 응징의 철퇴를 날린 룩센 대제는.
“반역으로 황실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명예를 더럽힌 황후 루티아 트와이드와 3황자 페루 트와이드, 그리고 2황녀 우에나 트와이드에게는 자결을 명하겠다. 그리고 이들 역시 황실 명부에서 삭제하겠다.”
자신의 부인인 황후와 친족인 황자, 그리고 황녀에게조차 일말의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황제의 철혈이 어떤 것인지 황태자에게 직접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룩센 대제의 선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 역시 내 부덕의 소치이며 내가 안고 가야 할 아픔이다. 이미 장성한 황태자가 벌써 여러 번 그 능력을 선보였으니 어찌 때가 무르익었다고 하지 않을까?”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모든 귀족이 룩센 대제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는데.
“이에 짐은 황족이 역모에 가담한 이번 일에 책임을 통감하며 퇴위를 결심하게 되었다. 지금껏 국정을 훌륭하게 돌본 황태자 페리안 트와이드에게 황제의 위를 넘길 것이니 이번 일의 논공행상은 역시, 신 황제 페리안 트와이드가 내리게 될 것이다. 모든 귀족은 조속히 대관식을 준비하도록 하라.”
룩센 대제의 갑작스러운 양위 선언으로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바로 대전을 떠나버렸다.
마치 어떠한 반대도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깊은 밤 룩센 대제의 개인 집무실.
황태자 페리안은 비어버린 고위 귀족의 인선과 차후 국정 운영에 대하여 룩센 대제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공작위는 크레톤 후작을 생각 중입니다.”
공훈으로 승작하는 것과 상관없이 제국은 최소 세 명의 공작과 다섯 명의 후작을 두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조셉 공작가가 멸문하면서 공작의 자리 하나가 공석으로 남았다. 그리고 후작 하나를 공작으로 올리면, 다시 후작 하나가 비게 되니 결국 두 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