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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84화 (184/303)

184화

“크레톤 후작이라……. 하긴 지금 상황에서는 영주 귀족보다는 관료 귀족이 공작을 맡는 게 바람직하겠지. 게다가 황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가문이니 뒷일을 생각해도 그게 낫겠군.”

“네.”

“그리고 후작 영애가 만난다는 자가 네 녀석의 심복이니 더 뒤를 생각해도 나쁘지 않아. 확실히 괜찮은 인선이야. 경력과 전통을 봐도 이의를 달 수 없을 정도고.”

“빈 후작의 자리는 리아누스 백작에게 올리고 조셉 공작령을 맡길 생각입니다.”

“리아누스라……. 좀 답답하긴 하지만 지시한 일 하나는 확실히 처리하는 친구지.”

“지금까지처럼 크라우 백작과 작센 백작에게 남쪽의 방위를 맡기고, 그 뒤를 리아누스 백작에게 지원토록 할 생각입니다.”

“나태한 남쪽의 영주들을 깐깐한 리아누스 백작으로 견제할 생각이군. 리아누스 그 친구가 영지에 부임하자마자 군비부터 확충할 테니까.”

“이제 남쪽도 자력으로 스스로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해이했죠.”

“둘 다 황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충신이지. 즉위 초반에 끼어드는 불가피한 잡음에도 부화뇌동하지 않고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킬 인사들이고.”

그 후로도 한참이나 여러 가지 사안을 논의하던 황태자는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 넌지시 물었다.

“정말 떠나실 겁니까?”

“그래야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알게 모르게 나의 영향력이 대단하다. 황제 위에는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멀쩡한 상황이 버티고 있으면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을 거야. 무슨 문제만 생기면 나에게 쪼르르 달려올 귀찮은 녀석이 한둘이 아니니까.”

“음…….”

황태자도 이 부분에서는 룩센 대제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문제없이 제국을 다스려온 룩센 대제의 저력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좀 한가한 곳을 둘러볼 생각이야. 지금까지 평생을 이렇게 살았으니 이제는 좀 평안해도 되지 않겠나?”

“왠지 홀가분해 보이시는군요.”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박차고 나왔음에도 룩센 대제의 표정에는 일말의 아쉬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듯 표정부터 달라졌으니 말이다.

“황제의 자리를 아쉬워할 놈은 아마 폭군뿐일 거다. 내 판단 하나하나가 제국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항상 고민하고, 걱정해야 하니까. 그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지. 그러니 이제는 좀 쉬고 싶구나.”

황태자는 피곤한 듯 늘어놓는 룩센 대제의 말 속에 죽은 황후와 그 일가에 대한 회한이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제국은 너의 제국이다. 좋은 황제가 되리라 믿고 있겠다.”

룩센 대제는 이 말을 남기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황궁을 떠났다. 그런 그의 옆에는 소피아 1황비가 함께할 뿐이었다.

* * *

옛 역사에서도 멀쩡한 황제나 왕이 선위하겠다고 쇼를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는 결국 자신의 권력을 더 강하게 움켜쥐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귀족 몇몇은 룩센 대제의 양위 선언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병으로 누워있는 동안 황태자가 국정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으니 그 권한을 다시 회수하기 위해 그런 퍼포먼스를 벌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권력이란 건 한 번 잡으면 절대 놓을 수 없는 오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룩센 대제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로빈은 룩센 대제가 참으로 그다운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보다 제국을 더 생각하던 황제였으니 쓸데없이 잡음이 일어나는 걸 절대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런 황제라도 자신의 손으로 황후와 3황자뿐 아니라 2황녀마저 처단한 건 충격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래도 사위인데 딸자식이 어떤 놈이랑 혼인하는지 확인도 안 하고 그렇게 갈 줄은 몰랐네. 덕분에 결혼식은 영지에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만 시집가는 다이앤을 만나보지도 않고 그냥 사라진 건 조금 실망이었다.

몰론 자신은 괜찮았다. 상황이 된 룩센 대제와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다이앤은 크게 상심할 게 분명했다.

솔직히 상황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한 1황비만은 다이앤을 만나봤어야 하지 않을까?

“처가가 참…….”

정말 끝까지 곤란한 처갓집이었다.

그리고 오늘 로빈은 황태자의 요청으로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바로 황도에 ‘언제나! 자신 있게!!’의 생산 시설을 확충하는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서였다.

집무실에는 황태자 외에도 크라우 백작 영식, 젝트, 그리고 이번에 공작으로 승작하게 된 크레톤 공작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크레톤 공작을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크레톤 공작은 재무부 관료로 평생을 바친 사람답게 냉정하면서도 꼬장꼬장한 인물이었는데 저런 인물을 장인으로 두게 될 젝트가 왠지 좀 안쓰러울 정도였다. 재무부의 일을 배우면서 갈굼당할 미래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다만 저 삭막해 보이는 크레톤 공작이 아버지 윌리엄의 그림에 반해 주노와 안면을 텄다는 건 좀 신기했다. 어떤 사람이라도 취미를 잘 파고 들어가면 어떻게든 끈을 만들 수 있긴 한 모양이다.

“그레이츠 후작, 계획서는 잘 봤네. 대부분 흔한 재료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겠더군.”

“…아직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 그냥 백작으로 불러주시죠.”

후작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두드러기가 일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황태자는 항상 자신을 후작이라고 불렀고.

저 인간은 제 떨떠름한 반응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모양인데 참 악독한 상관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좋네. 후작, 이번 분기 정기 귀족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가면 되겠군. 그럼 후작이 될 테니 말이야.”

“정기회의 시기에는 아직 백작이니 영지로 돌아가서 다음 해 봄 정기 회의에 참석하도록 하죠. 그때까지는 백작이니 변경백이 굳이 정기 회의에 참석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봄에 대관식과 결혼식을 하시니, 그때 맞춰 찾아오면 되겠군요.”

“그러지 말고 견학하는 셈 치고 정기 회의에 참석하게나. 정기 회의가 겨울 끝자락이니, 회의에 참석하고 봄에 있을 대관식까지 기다리면 되겠군.”

아니, 이 양반이? 그럼 영지에는 언제 가라는 거야? 영지에 가야 결혼을 하고, 후작이 되든 말든 할 거 아냐?

“황태자 전하, 본론은 언제 들어갑니까? 역당의 무리에게 파손된 황도 가택을 정비하는 문제로 바쁩니다. 사담은 나중에 나누시죠.”

뭐라고 반박하려는 찰나 크레톤 공작이 나서서 말을 끊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약에 대한 중요한 사안을 논의해야 하는데 말이 이상하게 새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게 다 저를 이용해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황태자 때문이었다.

“그러지. 기분은 적당히 풀었으니 일부터 진행해야겠군.”

“죄송합니다, 크레톤 공작 각하.”

“괜찮네. 어서 진행하지.”

“황태자 전하께서 재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사과는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다 이렇게 새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조단 크라우가 작게 속삭였다. 역시 황태자 진영 최후의 양심다운 훌륭한 마음 씀씀이였다.

“네, 재료는 대부분 대량으로,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황도에서 생산하기 시작하면 금방 물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그런데 생소한 게 하나 끼어있던데……. 리퉁? 이건 대체 뭔가?”

놀랍게도 실비아가 개발한 이 엽기적인 물약에는 리퉁이 들어갔다. 이게 왜 들어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리퉁에 포함된 안 좋은 마나가 마수 핵과 상호 작용을 일으켜 뭔가 새로운 현상을 발생시킨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 물약에 리퉁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레이츠 영지 및 북방 5대 방벽은 이 물약 생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리퉁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곳은 북방 5대 방벽뿐이었기 때문이다.

“북방에서 대량으로 자생하는 특별한 놈입니다. 원체 쓰고 몸에 좋지 않기 때문에 먹지는 못하는 놈인데 그 물약에는 그게 들어간다는군요.”

“흠, 이걸 대량으로 황도에 납품할 수 있겠나?”

리퉁이야 솔직히 황무지 아무 곳에 적당히 뿌려만 놔도 알아서 쑥쑥 자라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생산량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개도 안 먹는 이놈을 대체 얼마를 받고 넘기냐는 건데.

“물량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다섯 개 영지에서 계속 생산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단가가 문제인데…….”

“그렇군. 하지만 그리 높게 쳐주진 못하네. 이 약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싸게 팔아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당연히 전염병 치료제로 쓸 약이니 대량으로 생산해야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황태자의 설명을 들으니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는데.

“이곳에 모인 자들을 믿고 이야기하자면, 상황께서 병에 걸린 게 우연이 아니었네.”

황태자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로빈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그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는 내용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명이 마무리된 후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니까……. 폐황후가 독을 쓴 거라고요?”

“이게 독인지도 잘 모르겠군. 흑마법사들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어. 하지만 폐황후가 1황비께 뭔가 먹인 것만은 분명하더군.”

다른 사람은 그저 상황을 암살하려고 한 폐황후의 악랄함에 혀를 찰 뿐이었지만 로빈에게는 이 일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전염병이 누군가의 음모로 발생한 인재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첫 번째 재앙이었던 그 언데드 난리 역시 누군가의 음모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래도 좀 이상하군요. 폐황후의 시녀장은 그녀를 오랫동안 보필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자백했다는 게……. 솔직히 그 정도면 기다렸다는 듯 자백한 정도 아닙니까?”

“나도 그 점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부자연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어떤 이상한 점도 찾지 못했어. 시녀장은 선황 폐하를 배신했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고, 자신 역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는군.”

“그건…….”

“시녀장이 예전에 황제 폐하께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말이 전혀 안 되는 건 아니죠.”

“자신도 그 물건이 상황 폐하를 해치는 물건인지는 모르고 있었다는군. 폐황후가 그저 1황비를 혼내주겠다고 말해서 그 정도로만 생각한 모양이야.”

“그렇군요.”

“시녀장이야 그렇다 치고. 진짜 문제는 그 검은 옷을 입은 남자겠지.”

황태자가 폐황후를 심문한 결과 룩센 대제와 1황비를 해친 그 문제의 독이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황태자에게 몰래 써온 다양한 독과 최근에 사용한 마나 독까지 그 남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폐황후조차 그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한심하군요. 제국의 황후란 자가 정체도 알 수 없는 자와 그런 물건을 거래하다니요.”

“모든 거래를 직접 했다는데 한 번도 황궁을 나서지 않은 폐황후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결국 그자가 황궁에 잠입해 거래했다는 거지. 그것도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몰래.”

이 경우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황궁의 경비가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그자의 목적이 암살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정말 어이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어.”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로빈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흑막의 일원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린도 항상 검은 옷을 입고 등장했고, 이 소설에서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면서 검은 옷까지 입고 다니는 녀석들은 그들밖에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황궁에 몰래 들어올 정도로 능력 있는 집단은 아마 그놈들뿐일 것이다.

“황실의 인원은 대거 물갈이했네. 그리고 그 검은 옷 입는 남자에 대해서도 계속 수소문하고 있지만 그리 성과가 있을 거 같진 않군.”

“그 정도로 은밀히 움직이는 놈들이라면 꼬리를 잡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 맞아. 그러니 그놈들보다 우선 당면한 일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다들 들어서 알겠지만 그레이츠 후작이 이번에 개발한 그 약은 놈들이 만든 정체불명의 독에 특효약이야. 물론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호재인 거지.”

전생에서 전염병을 겪은 황태자는 놈들이 그 독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했을 때를 염려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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