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다른 사람들도 황태자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만 혹시 누군가가 또 피해를 보았을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고.
게다가 이 약 자체도 상품성이 대단했기 때문에 만일을 대비해 이 약의 생산량을 늘리는 걸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놈들이 딱히 무슨 짓을 하지 않아도 약 자체가 잘 팔릴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좋아. 모두 그 점에서는 동의하고 있으니 신속하게 설비를 갖추도록 하지. 그레이츠 후작과 함께 있던 그 레이디가 이 약의 개발자란 거지?”
“네, 황태자 전하. 이미 마수 핵도 준비해 놓았으니 바로 만들기만 하면 됩니다.”
어쨌든 놈들의 행적이 생각보다 빨리 발견된 건 다행이었다. 저렇게 경종을 울려놨으니 황태자도 놈들에 대하여 계속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일이 놈들의 음모라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좀 복잡해졌지만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나은 거 같았다.
그리고 로빈은 되도록 놈들이 황도에서 황태자랑 잘 놀다가 적당히 박멸당하길 기도했다. 괜히 지방까지 내려와서 쓸데없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말이다.
* * *
‘언제나! 자신 있게!!’를 대량 생산해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게다가 재정을 관리하는 크레톤 공작도 한 손 보태고 있으니 자금 문제도 전혀 없었고.
바로 부지를 선정하고 물량을 쏟아부어 생산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놈들이 인위적으로 전염병을 뿌릴 수 있다는 사실이 찝찝한 로빈도 영지에 연락해서 가능하면 빠르게 물약을 생산하라고 지시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레이츠 영지가 상당히 폐쇄된 곳이라 우버 마을을 제외하고는 외지인이 들어올 구멍이 없다는 거였다. 그 우버 마을 역시 모야족 전사들과 치안대가 득실대기 때문에 외지인을 감시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실비아를 보내 물약 공장(?) 건설에 한 팔 보태고 있었지만, 그걸로 이 일이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생산 단가 및 로열티 지급, 리퉁 보급에 대한 세세한 사항을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주노가 전적으로 맡아 처리하기로 했다.
“황태자 전하가 보내주신 분이 데리안 백작가의 첫째라던데요. 루텐 데리안이라던가요? 그 양반이 엄청 깐깐하더군요.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나 피가 끓어오르긴 했지만, 영주님이 말씀하신 게 있어서 그냥 적당히 넘어갔습니다.”
황태자 쪽에선 그 망종의 형인 루텐 데리안이 전권을 위임받고 나온 모양이다.
원래도 황태자의 상단을 관리하는 사람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인선이지만 그가 대표로 나섰다는 건 이 사업을 국책 사업이 아닌 황태자 개인 사업으로 넘길 거라는 의미였다.
하긴 아무리 크레톤 공작의 동의를 얻었다고 해도 국책 사업으로 넘기려면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야 했으니 한시라도 빨리 물건을 생산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황태자 개인 사업으로 처리하는 게 더 적당했을 것이다.
물론 영지 입장에서는 국책 사업인 게 더 든든하긴 하지만 황태자의 개인 상단도 망할 일이 없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래요. 이건 돈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차피 우리도 물건을 싸게 넘기려고 했었잖아요? 황태자 전하도 이걸로 큰돈 못 버실 테니 이런 건 좋게좋게 넘어가자고요.”
이게 일반적인 사치품이면 적당히 후려쳐 돈을 좀 만질 수 있을 텐데 생명과 연관된 문제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워낙 센세이션한 물건이다 보니 박리다매로 어느 정도 이득을 보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리퉁의 가격은 생각보다 높게 책정받았습니다. 시중에 거래되는 라카카 약초와 같은 가격이니 이 정도면 제법 짭짭할 거 같군요.”
이런 김선달 같은 양반을 봤나.
라카카 약초는 가장 흔하게 취급되는 보양 재료로, 현대식으로 따지면 아무 곳에나 빠지지 않는 감초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약초 중에서는 가장 저렴한 놈이지만 개도 안 먹는 리퉁을 결국 약초급으로 거래한다는 말이었으니 사실상 사기에 가까웠다.
시장 가격이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래서야…….
마수 핵 50개에 대한 사용료와 물약의 로열티, 거기다가 리퉁 판매 대금까지 포함하니 생각보다 영지에서 받아갈 수 있는 게 많았다.
물약 자체가 그리 비싸지 않아 남는 게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괜찮은 빨대를 뽑은 셈이랄까? 오히려 물약을 생산하는 황태자 측에서 남는 게 별로 없는 상황이 될 거 같았다.
하긴, 그 양반은 이걸로 돈 벌 생각이 전혀 없을 테니 상관없으려나?
어쨌든 그레이츠 영지에서 생산되는 물약은 기껏해야 북부 정도를 커버할 양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라 다른 지방은 황도에서 책임져야 했으니 리퉁부터 날라대야 할 거 같았다.
* * *
세세한 조율까지 마치고 다시 한가해지자 로빈은 계획대로 마지막 아카데미 생활을 향유하며 다이앤과 교정 데이트를 즐기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불청객 때문에 결국 접어야 했다.
저번 임시 회의에서 알게 모르게 신세를 지기도 했고, 평소에도 그럭저럭 잘 지내는 리아넨 공작가의 그릭스 대공자가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신세고 뭐고 워낙 자주 보는 사람이라 쿨하게 컷하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그릭스 대공자 뒤에는 2황자, 이젠 라이언 작센이 된 형님이 버티고 있었다.
“아니, 아카데미에 가야 하는데 왜 이러세요?”
“백작, 어차피 출석 일수랑 상관없이 졸업이라며? 다 알아보고 왔으니 이러지 말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황도가 원래 한 집 건너서 친구 먹고 그런 곳이야. 아카데미에 일하는 내 친구가 몇인데 그래?”
대체 그건 또 언제 알아본 거야? 쓸데없이 행동력만 좋은 양반이라니까.
권력을 사용한 것이 분명한 그릭스 대공자의 말에 로빈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속절없이 끌려갈 뿐이었다. 사실 뒤에 라이언이 있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대공자님도 이런 곳에 오시나요?”
“에이, 옆 건물은 너무 정적이랄까? 여자들을 변태적으로 가지고 놀 줄만 알았지 활기가 없어요, 활기가. 그래서 차라리 여기가 더 재미있더라고.”
“저 인간이 대공자랍시고 어깨에 힘준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사실 전에는 대공자라기보단 그냥 기사였지. 그러니 이런 곳이 더 익숙할 수밖에.”
심지어 그릭스가 로빈을 끌고 간 곳은 바로 푸시 캣츠.
예전에 한 망종 했다는 그릭스 대공자다 보니 이런 유흥 문화를 즐기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나 본데 그 장소가 주로 평민들이 논다는 푸시 캣츠인 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자주 찾아오는지 지배인 격인 마담도 너무 자연스럽게 반겨주고 있으니 말이다.
“어머~ 대공자님 오셨어요? 오늘은 동행이 있으시네요? 특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래. 마담. 특실로 안내하고 늘 먹던 것으로 세팅해 줘.”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담의 안내를 받아 특실로 안내된 로빈은 그릭스가 너무 자연스럽게 주문하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얼마나 자주 왔길래 저런 반응인지 어이가 없어서였다.
“넌 대체 얼마나 온 거냐?”
라이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인지 혀를 차며 친구인 그릭스를 타박하고 있었다.
“나 정도면… VVIP?”
“에이. 자랑이다, 이놈아.”
어쨌든 둘은 상당히 격의 없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라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한 상 거나하게 차려지고 여자들까지 붙었다.
“공자님의 전용 안주. 세라, 대령했습니다~ 요즘은 좀 격조하셨네요~”
“전용이라기엔 네 녀석은 엉덩이가 너무 가볍잖아?”
“에이~ 그렇다고 공자님만 기다리면서 멀쩡한 X지에 거미줄 칠 순 없잖아요~ 아시면서 그러신다.”
그리고 요염한 여자 하나가 그릭스에게 착 달라붙었다. 항상 먹던 걸 달라더니 그 먹던 거에 저 여자까지 포함된 모양이었다.
그릭스가 세라라는 여자와 끈적하게 지분대지만, 로빈과 라이언은 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백작님은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다른 분을 불러올까요? 지금 영웅이 오셨다고 달아올라서 젖은 애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킥킥. 영웅. 와. 그레이츠 백작, 진짜 대단한데. 역시 사자백인가. 하하.”
영웅이라는 말에 로빈은 마시던 술을 뿜어버렸다.
원래 이상한 명성이 퍼져있긴 했지만 이번 일 때문에 더 이상해져버렸다. 사실 반란을 제압한 건 결국 황태자가 다 했는데 주민들이 기억하는 건 나랑 2황자가 전사들을 이끌고 황도를 활보하던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고작 미끼일 뿐이었는데 임무(?)를 너무 잘 수행하다 보니 뭔가 대단한 걸 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 모양이다.
특히 그때 제가 입은 화려한 미스릴 갑주에 새겨진 사자 문양은 너무 눈에 잘 띄었다. 그래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니 사람들의 머릿속에 붉은 사자 문양만 남은 것이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영웅이라는 말에 얼굴이 확 붉어졌지만 애써 침착하게 말을 돌렸다.
“난 먹던 것만 먹는 주의라서 말이야. 입맛이 제법 까다로워.”
로빈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자 조심스럽게 묻던 아가씨는 애써 말을 돌리는 쿨한 대답에 얼굴을 더욱 붉히며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다.
대체 이 반응은 뭔가 싶어 황당해하는데 주변에 남자들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저런 풍류를 모르는 녀석 같으니라고. 남자는 편식을 하면 곤란한 법이거늘.”
“역시 남자라면 그래야지. 이놈처럼 함부로 헛심 쓰는 것보다는 자기 여자에 충실한 게 남는 거야. 역시 내 동생이 남자 하나는 잘 봤군.”
두 남자의 반응만 봐도 딱 성향을 알 만했다.
어쨌든 자신 외에 두 남자 모두 여자와 노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릭스는 여자들을 모두 물렸다. 차라리 여자들이 없는 가운데 대화를 나누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뭐, 오늘은 그렇게 놀려고 온 게 아니니까 이야기나 좀 하자고.”
간만에 방문한 대물 셋을 놓친 것이 안타까운지 입맛을 다시던 여성들이 모두 나가자 그릭스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올겨울이 지나면 공작이 될 거 같아. 아버지가 은퇴를 생각하시더라고. 아무래도 상황께서 그렇게 떠나시는 걸 보고 생각이 많으신가 봐.”
하긴 한때는 정적으로, 혹은 동지로 수십 년간 얼굴 맞대온 조셉 공작이 그렇게 가고 상황께서도 궁을 떠나셨으니 그런 생각이 들 만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던 황태자가 그렇게 황제에 오르게 되니 그 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테고.
처음부터 대안은 황태자뿐이란 걸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니 말이다.
“그렇군요. 이제 공자님도 바쁘시겠습니다.”
“바쁠 게 뭐 있나. 어차피 일은 아랫사람들이 다 하는 건데. 그 일도 있고, 이제 라이언도 다시 작센 백작령으로 내려가니 겸사겸사 같이 한번 보려고 부른 거야.”
지금 로빈이 황도에 머무는 건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였고, 이제 로빈이나 라이언 역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황도를 자주 찾지 않을 것이다. 변경백이란 자리가 그리 단순하고 여유 있는 자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전혀 만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쉽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 그릭스가 이런 자리를 만든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네는 라이언을 금방 다시 볼 수 있겠군. 결혼식을 영지에서 하게 되었다지?”
“아무래도 그렇죠. 상황 폐하나 1황비도 안 계시는데 이곳에서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어차피 축하해 줄 사람들도 다 영지에 있으니 그곳에서 하는 게 낫죠.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도 내년 봄에 열리는데 제가 먼저 결혼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그렇구만. 친지끼리만 참석하는 결혼식이라 난 못 가겠지만 미리 축하하겠네. 아,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군. 결혼 선물이랄까? 내가 특별한 걸 준비했거든.”
로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시종을 부르는 그릭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엉뚱한 양반이 또 무슨 이상한 걸 꺼내놓을까 의아해서였다.
“사실 결혼 선물은 이 물건 자체라네. 하하. 리아넨 공작령에서 개발한 최신 그레이트 V. 이 물건을 넘겨줄 테니 황도 쪽은 자네의 상단에서 한번 팔아보게나.”
“음…….”
그러니까… 저거 페니스 밴드지?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복잡해 보이지만 형태 자체는 페니스 밴드가 분명했다.
이걸 팔라고?
“그러니까 여길 이렇게 하면…….”
윙~
“호, 진동이 대단하군.”
팬티형 밴드에 양쪽으로 가죽 막대가 붙어있고 장치를 조작하면 양쪽에서 진동하는 흉악한 물건.
하지만 신기하긴 한지 라이언도 호기심 깃든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