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내가 귀족가 영애들과 마님들을 대상으로 고객 조사를 해봤는데 이런 물건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영지에 연락해서 신제품으로 만든 거야.”
이런 게 팔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로빈은 그릭스의 설명에 아연해질 뿐이었다. 게다가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니 구매층이나 판매 전략까지 제대로 생각해 놨기 때문이다.
“물건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어. 이건 마나석을 이용해 만든 물건이거든. 하지만 그래서 소재 역시 더 고급스러운 걸 쓸 수 있지. 어차피 타깃은 첩실을 둘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마님들이야. 물건만 좋으면 비싸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
“음…….”
만약 그릭스의 설명대로라면 이 물건의 황도 판매권을 준다는 건 상당한 이권을 양보한 거였다.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 이 황도였기 때문에 지방에서 파는 물량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팔릴 테니 말이다.
물론 이 물건을 영지에서 만들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물건을 생산하는 리아넨 공작가도 제법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사실 진짜 돈이 되는 건 판매 마진이기 때문에 그레이츠 쪽이 더 많은 순이익을 누릴 게 분명했다.
그릭스 대공자가 말한 결혼 선물이란 건 그 판매 수익을 말하는 거였다. 게다가 기존의 그레이트 A 옆에 높고 같이 팔기만 하면 되니 자신들에게 발생하는 추가 비용마저 없는 깔끔한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곧 결혼하는 새신랑에게 이런 걸 선물하는 건 대체 무슨 센스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준다니 그저 웃으며 고맙게 받아들였다. 물론 이걸 다이앤에게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선물 증정식까지 마치고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막 성인이 된 그릭스 대공자가 마음에 들던 하녀를 첩으로 삼기 위해 했던 온갖 눈물겨운 애정 행각은 가슴속이 쫄깃해지는 뭔가가 있었다. 무슨 질펀한 통속 소설의 해피엔딩을 본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그 하녀가 그릭스 대공자의 첫 번째 첩이 되어 지금도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더 그런 거 같았다.
오늘 알게 된 건데 그릭스 대공자는 벌써 첩만 셋이란다.
아직 정실도 없는데 첩이 셋이나 된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첩이 셋이나 되는데 이런 곳에서 노는 그릭스 대공자가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니 맨날 그걸 찾지. 저 인간이 주노 상단의 초VVIP인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로 담소를 나누다 헤어질 때쯤, 그릭스 대공자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
“요즘 황도에 이상한 애들이 돌아다니는 모양이에요. 웬만하면 저택 경비도 삼엄하게 하고, 주변에는 믿을 만한 사람만 두세요.”
“그래? 하긴…….”
원작에서는 황제의 서거를 시작으로 황도 내 여기저기에서 전염병이 발생하는데, 시기도 워낙 이르고 상황도 많이 달라져 확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이 그냥 넘어갈 거 같지는 않았다.
물론 황태자가 눈에 불을 켜고 황도를 샅샅이 뒤질 테니 쉽진 않겠지만 리아넨 공작의 저택이라고 무조건 안전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에 황실에서 재미있는 약을 팔 건데 그걸 많이 사두시고요. 당분간은 자주 드시는 게 좋을 거예요.”
“다른 사람 말이라면 몰라도 그레이츠 백작이 하는 말이니 잘 들어야지. 그래. 내 기억해 두지.”
놈들도 자신들의 독이 실패한 이상 뭔가 개량하긴 하겠지만 실비아가 만든 약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보면 쉽게 어쩌지는 못할 거 같았다. 만약 그게 쉬우면 퀘스트가 그렇게 대놓고 세상을 구할 약이라고 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걸 먹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노파심으로 충고한 것이다. 자신의 말을 그런대로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이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형님도 남쪽으로 내려가시면 목숨을 소중히 하세요. 형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아, 물론 해적 놈들은 예외지만요.”
“그러지. 원래 살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매부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꼭 기억하겠네.”
항복한 기사들이랑 병사들을 모두 안고 가는 걸 보면 확실히 라이언은 군공보다 생명을 소중히 하는 남자였다. 그러니 남쪽에서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작센 백작령으로는 차후 자신이 대량으로 물약을 보낼 생각이니 이쪽으로도 문제가 없을 거고.
다이앤의 이름으로 보낸 후 꼭 챙겨 먹으라고 신신당부하면 라이언도 절대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자네도 기억하게. 앤의 눈에서 눈물 빼는 날에는 내가 군함을 끌고 북부까지 달려갈 거야. 알겠나?”
“후후. 그녀가 흘릴 눈물은 쾌락과 기쁨의 눈물뿐일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끙, 말이나 못 하면.”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작별 인사를 건넨 라이언은 다음 날 바로 황도를 떠나 작센 백작령으로 출발했다. 아마 결혼식이 열릴 봄이 되어서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 *
실비아가 황도의 생산 시설을 완벽히 정비하고 일을 마무리 지을 때쯤, 로빈과 다이앤이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이제 영지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물론 황태자는 겨울 귀족 회의에 참여하라는 서신을 보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로빈, 결국 가는구나. 이게 권력의 힘인가?”
“공부나 잘해, 인마. 맨날 그 짓만 하면 뼈 삭는다.”
“후후. 집에서 주기적으로 그걸 보내주고 있어서 괜찮거든. 기대해. 내가 꼭 임신 졸업해 버릴 테니까.”
“…그래, 힘내라.”
혼자 먼저 떠나는 로빈에게 툴툴거리던 레닌은 반드시 애인을 임신시켜 졸업할 거라는 포부를 당당하게 밝혔다.
만남의 장인 아카데미지만 만약 귀족 영애가 임신하게 되면 여러 가지 이유로 남녀 모두 졸업시키는데, 사실 그렇게 졸업하는 남녀는 거의 없었다. 이쪽 세상이라도 그건 나름 창피한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다들 피임만은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망둥이는 무조건 상대를 임신을 시키겠다니 정말 남다른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었다.
로빈이 레닌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영지로 떠나는 다이앤도 자신의 절친인 두 영애와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황녀님도 황도에서 지내시면 좋을 텐데요.”
“게이트만 타면 금방이잖아요? 배로 와도 일주일밖에 안 걸려요.”
“그러네요. 그러니 종종 다시 만나면 좋겠어요.”
“그래도 대관식 때는 오실 거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대관식이랑 혼례식이 같이 진행되니 아마 그럴 거예요. 그쯤에는 영지도 한가하다니 문제도 없을 거고요.”
“그래요. 그럼 그때 뵈어요.”
“호호. 그때까지는 꼭 애인을 구해놓으세요, 크라우 백작 영애.”
“에이, 그게 맘대로 되나요? 황도의 영식 중에는 영 마음에 차는 분이 없어요.”
그렇게 한참이나 수다를 떨며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이앤은 조금 울적한 얼굴로 로빈을 따랐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살아온 황도를 떠나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하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다.
로빈은 그런 다이앤을 그저 따듯하게 안아줄 뿐이었다.
“그레이츠 영지는 어떤 곳이에요, 로빈?”
“황도하고는 많이 다를 거야. 솔직히 말하면 많이 촌스럽긴 하지. 좋은 드레스 숍도 없고, 물건들도 투박하고. 조신한 아가씨들보다 괄괄한 처녀들이 더 많은 곳이기도 하니까.”
“그래요?”
“응.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멋과 재미가 있긴 해.”
“어떤 곳일지 궁금하네요. 그곳 사람들이 절 반겨줄까요?”
“글쎄,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려나…….”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아는 그레이츠 백작령의 영지민이라면 다이앤을 보자마자 엄청난 환호성을 터트릴 것이다. 미녀들이 많은 영지에서도 다이앤의 외모는 독보적인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단순히 반겨주는 수준이 아닐 정도로 환영 인파가 몰려나오겠지. 물론 그 뒤로 속 뒤집는 소리들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그녀를 반갑게 맞이해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카데미에서는 마음에 맞는 영애를 만날 수 있었지만, 그전까지 황궁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던 다이앤이라 그런 걱정이 드나 본데 솔직히 정말 괜한 걱정일 뿐이었다.
“왜요?”
“아니, 영지민들이… 좀 솔직하거든. 직접 보면 알겠지만 설명하긴 어려워서. 어쨌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진 마.”
사실 로빈도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곳까지 내용 확인 부탁드립니다.
영지로 돌아갈 때는 배편을 이용하기로 했다. 원래 로빈과 다이앤만 게이트를 사용하고, 남은 인원은 배를 타려고 했는데 다이앤이 배를 꼭 타보고 싶다고 조르는 바람에 그렇게 결정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배를 타보지 못했다는 다이앤의 말에 그녀가 피곤할까 걱정하던 로빈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 * *
기본적으로 배로 여행하는 일은 아무리 준비가 철저해도 뭔가 조금씩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역시 씻는 물이었고.
게다가 세 아가씨에게 가장 먼저 물이 배당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선원들이나 전사들은 물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모두 쾌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실비아가 만든 물약 덕분이었다. ‘언제나! 자신 있게!!’가 항상 몸을 청결하게 유지해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거였군. 어쩐지 저번 원정 때 린 아가씨 혼자 뽀송뽀송하더라니.”
“정말 물건이야. 다음에 대수림 쪽으로 정찰 들어갈 때도 먹고 들어가야겠어.”
로빈 역시 이 물약의 위력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씻지 않아도 전혀 찝찝하지 않은 물약이라니. 정말 세기의 발명품다웠다.
전사들과 뱃사람들까지 실비아의 물약을 찬양하고 나선 것 외에는 대체로 한가로운 여행이었다.
뭔가 한번 낚아보겠다고 낚싯대를 들고 설치던 기사들이 아무것도 낚지 못하고 시무룩해지거나, 아무 생각 없이 낚싯대를 던져놓고 놀던 실비아가 다랑어처럼 생긴 대형 물고기를 낚아 큰 소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묘하게 로빈의 신경을 거슬리는 게 있었으니.
“후후. 결혼식까지는 언니를 못 먹는다죠? 우리 영주님, 짜증 나시겠다.”
“그러게. 우리 주인의 인내심이 대단하다지만, 저 언니를 눈앞에 두고 먹질 못한다니. 얼마나 답답할까?”
“우리가 영주님을 눈앞에 두고 못 먹는 거랑 마찬가지겠지. 헤헤. 뭔가 쌤통?”
두 강아지 녀석이 다이앤의 옆에 찰싹 붙어서 그를 은근히 약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웃고 넘어갔는데 저 녀석들이 볼 때마다 음흉한 웃음을 지으면서 놀리니 이젠 슬슬 열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의식하고 나니 뭔가 억울한 것도 같고 기분이 이상해진달까?
물론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두 강아지를 안아주는 다이앤 때문에 참고는 있지만, 저 녀석들을 응징할 무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거 같았다.
그렇게 무탈하게 여행하던 중 다이앤의 가방에서 뭔가 이상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로빈이 경악했던 그 물건, 그레이트 V.
정말 예상치도 못한 물건이 예상치 못한 장소에 나타난 것이다.
“앤, 이건 뭐야?”
“아, 이거요? 헤헤. 크라우 백작 영애가 선물로 준 거예요. 요즘 이게 황도에서 그렇게 인기라던데요. 예약해야 겨우 받을 수 있는 물건이래요. 이게 로빈의 상단에서 파는 물건이죠?”
…그 영애는 얌전하게 생겨서 이런 걸 선물했단 말이야?
그런데 앤은 이걸 쓸 생각으로 가지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장식품?
“그래? 이게 그렇게 인기 있어? 필요하면 나한테 부탁하지 그랬어? 우리 상단에서 취급하는 물건이잖아.”
“에이, 그럴 수야 있나요. 이건 너무 비싼 사치품이잖아요. 솔직히 크라우 백작 영애가 선물했을 때도 극구 거절했는데 영애가 저 몰래 가방에 넣어버린 거예요. 물론 탐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제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다 구해줄 테니까.”
다이앤의 성격상 뭔가 이상한 걸 요구할 리도 없으니 부탁하는 건 무조건 들어줄 생각이었다. 화려한 황도에서 살다가 시골 영지도 들어가는 거니 그 정도는 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앤의 말을 들어보니 이 물건을 쓸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닌 거 같았다.
“그런데 이걸 어디다 쓰려고?”
“음……. 글쎄요. 언젠가는 쓸 일이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한 다이앤은 요사스럽게 웃으며 슬쩍 로빈에게 다가와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데.
“원래 전혀 쓸 생각이 없었는데요. 언젠간 쓰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황실의 그 개 같은 관습은 저도 좀 짜증 나거든요. 호호. 아니었으면 이미 수십 번은 했겠죠?”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