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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87화 (187/303)

187화

그러니까, 결혼이 확정되면 식장에 들어설 때까지 몸을 정갈하게 해야 한다는 황실의 관습이 짜증 나는 건 다이앤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었다.

결국, 저 두 비글은 로빈을 놀리는 데 정신이 팔려 다이앤의 짜증 지수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그야말로 제 무덤을 파고 있던 셈인데.

“원래 이걸로 첩실 길들이는 모습을 남자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네요. 로빈도 그래요?”

솔직히 좋으냐, 싫으냐를 따지면 끌린다는 쪽이었다.

좀 궁금하다고 할까?

물론 앤의 성격을 고려하면 그렇게 거칠게 하지도 못하겠지만 어쨌든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글쎄? 좋긴 한데, 너무 무리하진 마. 원래 그런 걸 즐기는 타입은 아니잖아?”

“헤헤. 그건 그렇죠. 하지만 로빈이 좋다면 조금씩 배워 보려고요.”

배워? 누구한테 배워?

“실비가 그러던데 영지에 가면 줄리 님이 계시다죠? 그분이 진짜 유명한 분이거든요. 제 우상과도 같은 분이라 기회가 되면 그분께 조금씩 배워 볼 생각이에요.”

줄리라면 그 줄리겠지?

경험 없이 이론만으로 주옥같은 명저서를 수도 없이 남겼다는 줄리.

이제는 경험까지 충만해져서 영지의 모든 처녀가 떠받들고 있는 줄리.

아무래도 다이앤 역시 그 줄리에 대하여 많은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거 말려야 되는 거 아냐?

하지만 줄리에타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눈을 반짝이는 앤의 모습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제 입으로 필요한 걸 다 말하라고 방금 말한 주제에 뭔가를 안 된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웠고.

로빈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줄리에타가 다이앤에게 이상한 물을 들이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 * *

시간은 흘러 드디어 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버 마을 항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와!! 영주님 만세!!”

“백작 부인 만세!!”

“미… 미친!! 여… 여신이다!!”

“영주님이 결국 여신님을 납치해 왔다!!”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항구에 몰려나와 로빈을 반겨주고 있었다. 그 기세가 너무 대단해 배에서 내리던 다이앤이 순간 움찔해 뒷걸음질 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납치는 좀 그렇지 않나? 대체 저건 누구야?

“이게 무슨……. 설마 이게 다 로빈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에요?”

“나라기보다는 우리?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생각보다 더 많네.”

“…로빈, 정말 인기가 엄청나네요. 영지민의 수가 대략 8만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까마득하게 모인 인파는 적어도 수천 이상, 항구 밖에 쭉 늘어선 사람들을 보니 어쩌면 만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누가 봐도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들이니 다이앤이 감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헉, 뭐야? 저분들이 왜 저기 있어?”

하지만 그 정도는 그저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로빈의 귀환을 반기는 가족들 사이에 황도에서 사라진 상황 폐하와 1황비 마마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로빈은 룩센 대제를 보는 순간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다이앤 역시 그 못지않게 당황한 거 같았다.

사방을 에워싼 환영 인파의 격렬한 함성부터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시댁 식구들이 모두 마중 나온데다가 그들 사이에 황도에서 사라졌던 그녀의 부모님까지 끼어있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게다가 항구에 내려 일주일간의 항해로 초췌해진 행색을 바로 하고 최고의 상태로 시부모님께 인사를 올리겠다는 야무진 꿈도 이미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어머~ 세상에… 사부인을 뵙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우리 아들이…….”

“내 손자가…….”

“대… 대박.”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가족들은 그녀를 보고 뭐라고 말도 잊지 못한 채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특히 톡톡히 시누이 노릇을 하겠다고 벼르던 세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그런 반응 덕분에 그녀도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어… 어머님. 다이앤 트와이… 아니, 다이앤 그레이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그래요. 1황녀 전하, 잘 왔어요. 먼 길 오느라 많이 고단하죠?”

“앤이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어머님. 이제 황녀가 아니라 그레이츠가의 며느리인걸요.”

“어머~ 말도 어쩜 이렇게…….”

“엄마, 우선 저택으로 돌아가죠. 계속 여기 계실 거예요?”

말이 길어질 거 같아서 우선 말부터 끊었다. 이렇게 인파가 몰린 상황에서 그냥 서있는 것도 오히려 민폐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어머. 그래. 그래야지. 어서 가자. 여러분! 우리 며느릿감이에요! 오호호호!”

“와!!”

“미… 미쳤다!!”

하지만 마차로 돌아가는 길에 동네방네 자랑하는 어머니를 막을 순 없었다.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니 얼굴이 홧홧해지긴 했지만 어쩔 수 있나. 이 정도는 받아들여야지.

솔직히 이 정도면 자신이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양호했다.

첫 번째 마차에는 우리 가족이 탑승하고, 두 번째 마차에는 상황 폐하 내외와 다이앤이, 그리고 마지막 마차에 린과 실비아, 세이라가 올라탔다. 미리 그렇게 약속되었던 모양인데, 다이앤도 자신의 부모님이랑 나눌 말이 있을 테니 적절한 자리 배분이었다.

다만…….

“어머~ 로빈, 정말 대박이잖니!”

“월척도 이런 월척이 없어. 완전 참다랑어라니까.”

“역시 내 아들답게 여자 보는 눈 하나는 확실하구나. 하하하.”

“생긴 건 엄청 고아하게 생겼으면서 말투는 어쩜 그렇게 사근사근하다니?”

“황족의 허니 블론드가 그렇게 대단하다더니 정말 명불허전이더구나.”

“우리 집안에 무려 황족 며느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계속 수선을 떠는 가족들을 상대하는 건 제법 피곤한 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앤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였기에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지만 말이다.이곳까지 내용 확인 부탁드립니다.

마차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앤의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로빈에게 달려오더니 상황 내외가 그를 찾는다는 말만 전하고는 쏙 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리 오렴, 우리 며느리. 호호. 우리도 이야기나 좀 할까?”

“네, 어머님.”

저렇게 마리아나와 팔짱을 끼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로빈은 뭔가 껄끄러운 저 마차로 들어가 불편한 처가 식구들과 면담을 해야 하는 모양이다.

“어서 와요~ 많이 놀랐죠? 호호.”

마차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제 장모님이 되신 소피아 황비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심각한 표정의 룩센 대제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리고 황비가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자 룩센 대제도 마지못해 로빈에게 인사를 건넸다.

“흠흠. 오랜만일세, 백작.”

“네, 상황 폐하. 강녕하셨습니까?”

“에이, 상황 폐하라니요. 장인어른이라고 부르셔야죠, 사위님.”

“네?”

“따라 해보세요. 장.인.어.른.”

“아, 네. 장인어른.”

“그래요. 호호.”

소피아 황비의 답정너에 결국 로빈은 룩센 대제를 장인어른이라고 부르며 굳어있는 룩센 대제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아무 말 못 하고 있던 룩센 대제는 소피아 황비가 다시 옆구리를 쿡쿡 치자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비답게 행동하지 못했지. 저 아이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 것이 페리안과 페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네. 물론 다른 귀족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때 내 생각은 그랬어.”

“아, 네.”

힘없는 황비를 둔 황제의 자식들을 편애하게 되면 당연히 귀족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 관심이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라이언과 다이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등을 떠밀려서 되지도 않는 황위 쟁탈전에 끼어들게 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암살 위협에 시달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황태자와 3황자를 제대로 된 황제감으로 키우고 싶었던 룩센 대제는 둘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둘 모두에게 정을 주지 않았는데, 자식들 간의 형평성을 위해 다이앤과 라이언에게도 정을 줄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생각이 옳은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결과만 보면 룩센 대제의 황제 육성 프로젝트는 완전 최악이었다. 지금까지 제국을 잘 이끌어놓고 잘못된 자식 농사로 나라를 말아먹을 뻔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황태자가 예쁘게 삐뚤어져서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정말 제대로 망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황태자가 예쁘게 삐뚤어질 수 있었던 것에는 저 소피아 황비의 역할이 상당했을 거로 추측된다. 3황자 패거리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성품만은 모자람 없이 번듯하게 자란 라이언과 다이앤만 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같은 조건이었던 3황자 페루의 인성이 엉망이었던 걸 보면 거의 확실한 거 같았다.

다만 단 한 가지.

지금까지 라이언이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건 룩센 대제의 무관심 덕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룩센 대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열 명의 포졸이 한 명의 도둑을 막는 건 어려운 일이었으니 누군가가 진지하게 암살하려 들었으면 그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힘없는 황비의 아들이 저렇게 멀쩡히 장성한 것도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상당히 드문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저쪽의 사정은 정말 복잡했다.

“그러니, 내가 이제 와서 그 아이의 아비 노릇을 할 생각은 전혀 없네. 그 아이가 좋다는 결혼을 막을 자격도 없고. 하지만 그래도 그 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네, 뭐…….”

“앤을 행복하게 해주시게나. 어차피 그거면 된 거지. 모정은 충분하지만, 부정을 모르고 자란 아이일세. 그러니 자네가 남편으로, 때로는 아비처럼 그렇게 살뜰히 아껴주게나.”

회한과 후회로 가득한 룩센 대제.

로빈은 장인어른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확답했다.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예쁜 딸을 낳아주신데다가 결혼을 반대하거나 간섭할 생각도 전혀 없다니 충분히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본인이 저렇게 말해도 앤과 라이언 모두 자신의 아버지를 철석같이 따르고 있었으니 당연히 성의껏 대해야 했다. 아버지로서는 좀 꽝이었지만 황제로서는 또 대단했기에 그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고.

사실 나였으면 절대 그렇게는 못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아, 그렇군. 그걸 말해야지.”

로빈의 물음에 룩센 대제보다 소피아 황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남쪽으로 내려가 라이언을 만나고 그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낼 생각이에요. 그 문제로 영주인 사위님의 허락을 받아내려는 거고요.”

“…그렇군요.”

“사돈댁도 너무 좋고, 영지도 마음에 들어서 이왕이면 이 근처에서 살면서 앤과 가끔 만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요.”

어쩐지 다이앤의 발걸음이 가볍다 했더니 부모님을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로빈에게도 딱히 거부감이 드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영지에 상전(?) 하나가 새로 생기는 일이지만 룩센 대제의 성향을 봤을 때 영지 일에 참견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소피아 1황비, 그러니까 장모님의 말을 가만 듣고 있자니.

“게다가 교단의 성물까지 있는 곳이잖아요? 이곳에 오니 마음이 평안해지는 게 딱 여기다 싶더라고요.”

“그렇군요.”

“자매들과 줄리도 근처에 있으니 너무 마음이 편한 거 있죠.”

원체 효능이 탁월(?)한 성물이라 그에 관한 이야기는 그럭저럭 넘어갈 만했지만, 자매들과 줄리라는 이야기에는 뭔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줄리에타 성녀를 상당히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거기에 대하여 슬쩍 물었더니.

“호호. 줄리와는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던 자매간이랍니다. 상공과 만나며 사제로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여신님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굳건하달까요?”

그러니까 우리 장모님인 소피아 1황비는 사랑과 봉사의 교단 출신으로 줄리에타 성녀와 자매처럼 자란 사이고, 황도를 거닐던 룩센 대제가 첫눈에 반해 황궁으로 데려간 것이다.

설명을 들어보니 사제 교육을 받고, 현장 업무에 투입되기 직전에 그렇게 된 모양인데 그 정도면 거의 사제나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여신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대단할지 역시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저, 혹시 그럼 우리 앤도…….”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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