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그래. 내가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인간적인 매력만을 따지면 그 인간만 한 남자가 거의 없어. 다른 건 몰라도 우리 부황이 아내만은 끔찍이 아끼셨거든.”
“저희야 괜찮지만, 그랬다가는…….”
“아아, 걱정하지 말게. 물론 그렇게 되면 남쪽의 크라우와 작센, 그리고 북쪽의 그레이츠까지 엄청난 군벌이 탄생하지. 하지만 자네나 그레이츠 백작이나 어디 그런 거에 신경이나 쓸 사람들인가?”
“물론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지 않겠습니까?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훗, 다른 사람들? 그놈들은 분명 내가 크라우를 이용해 작센을 견제한다고만 생각할 거야.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난 크라우와 작센의 화합으로 남부가 더욱 안전해지길 원한다네. 물론 크라우 백작 영애의 행복까지 찾을 수 있으면 더 좋고 말이야.”
“…그 아이의 이상형이 작센 백작과 상당히 일치하는 건 사실입니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아이다 보니, 대단한 무장에게 강한 성적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니까요. 사실 그래서 그레이츠 백작을 남몰래 흠모했던 건데…….”
“그래? 그럼 오히려 라이언 작센이 더 낫겠군. 알다시피 우리 북방의 사자는 완전 물몸이잖은가? 그리고 그레이츠 백작령으로 시집가면 친정에 들르기도 눈치 보이지만, 근처인 작센 백작령으로 시집가면 수시로 드나들 수 있지. 라이언이 그런 걸 말릴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확실히, 더 좋은 조건이긴 합니다. 작센 백작이면 아버지도 인정하는 무장이고요.”
“그러니 우선 크라우 백작에게 연락해서 의중을 알아봐. 그쪽에서 허락하면 바로 추진하지.”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물론 작센 백작이 되면서 황위를 완전히 포기했지만, 라이언에게 엉뚱한 처가가 붙어 분탕질 치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크라우 백작가와 작센 백작가의 결합은 모두에게 긍정적이었다. 크라우 백작가와 크라우 백작 영애, 그리고 라이언과 자신 모두가 만족할 만한 거래였으니 말이다.
아마 부황도 크라우 백작 영애를 라이언에게 붙인 자신의 혜안에 감탄할 것이 분명했다. 소피아 황비 역시 누가 봐도 참한 백작 영애를 라이언에게 소개한 자신에게 고마워할 테고.
“이 정도면 남쪽의 방비도 확실하겠군. 두 백작 가문이 결합한데다가 리아누스 후작이 그 뒤를 받칠 테니 웬만한 문제는 알아서 해결할 수 있겠어. 이제 마수 가죽을 어떻게 보급할지만 고민하면 되는 건가? 물론 그 검은 놈들 쪽도 신경 써야 하겠지만…….”
이 정도면 한 가지 부담을 덜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황태자에게는 아직 많은 숙제가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 * *
“끙, 이 녀석들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로빈은 제 배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있는 린과 제 한쪽 다리를 끌어안고 아래쪽에서 잠든 실비아, 그리고 제 한쪽 팔을 끌어안은 채 손끝을 가랑이 사이에 잘 포개놓은 다이앤을 발견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침대는 넓어서 충분한데 말이야. 이래서야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으려나? 게다가 저 녀석들……. 저러다가 진짜 앤한테 혼쭐이 날 거 같은데.”
실비아와 린, 두 녀석은 모두 다 같이 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말에 신이 나 비장의 속옷을 꺼내들었다. 지금 입고 잠들어 있는 저 속옷 말이다.
실비아의 저 속이 다 비치는 하늘하늘한 녀석은 저번에도 본 것이지만 린이 입고 있는 속옷은 사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건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쪽이 훤히 뚫려있는 황당한 녀석이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속이 훤히 비치는 실비아의 것보다 더 파괴적이었다.
비록 앤과는 결혼식 때까지 개점휴업이었지만 자신들은 아니라면서 달려들던 두 강아지 녀석들은 도도한 살쾡이 앤의 나지막한 경고에 몸을 움츠리며 자신들도 결혼식 때까지는 꾹 참기로 약속했다.
그때 보여준 앤의 카리스마는 정말…….
그리고 어제의 일은 분명 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경종을 울렸음이 분명했다. 참고 있는 앤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제 동정을 겟하기 위해 자신들의 욕심만 차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잘못은 세 여성을 골고루 아껴주지 못한 자신에게 있는 거 같았지만 이대로 괜찮을지 모르겠다.
이제 앞으로는 그녀에게 해주는 만큼 다른 둘도 충분히 아껴줘야 할 거 같았다. 물론 저 둘은 언젠가 앤에게 응징당할 거 같았지만 말이다.
“에휴, 그건 나중 일이고. 우선 일이나 하자고.”
어쨌든 그건 결혼 후의 이야기였고, 자신은 영지의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1년도 넘게 외부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제법 많은 일이 쌓여있을 테니 말이다.
* * *
“축제 준비, 결혼식 준비, 그리고 마수 문제… 이 정도면 평소랑 별로 다를 바도 없네요.”
“네, 기본적으론 그렇습니다. 영지는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다만 영지의 여유 자금 대부분이 그 약을 생산하는 것에 사용되고 있는데 만약 이 물건이 예상대로 판매되지 않는다면…….”
“이게 과투자는 아닐 거예요. 지온도 알겠지만 이게 생각보다 쓸모가 많은 약이더라고요. 앞으로도 이게 안 팔릴 일은 없을 거 같달까요?”
자고 있는 그녀들의 차진 엉덩이를 찰싹찰싹 두드려 그렇게 깨운 후, 다 같이 아침을 먹고 집무실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게 또 손맛이 아주 그냥.
그리고 지금, 도착하자마자 바로 지온에게 현 상황에 대하여 브리핑부터 받은 것이다.
지온의 말을 들어보니 내가 영지를 비웠음에도 그리 빡빡한 일은 없었다. 다만 그의 일이 그렇다 보니 급속도로 쌓이는 약의 비축 물량에 대한 염려는 놓을 수 없었는지 이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물약이 재고로 남을 일은 절대 없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입소문이 퍼지는 순간 엄청나게 많은 구매 요청이 쏟아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지온도 이거 써보셨죠? 어때요, 이게 안 팔릴 거 같던가요?”
“저보다는 부인이 애용하고 있습니다만, 흠흠. 좀 끝내주긴 하더군요.”
“그거 봐요. 이건 안 팔릴 수가 없다니까요.”
전염병에 대한 건 일시적인 특수일 수밖에 없었고,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기능성이었는데 이 물약은 단순히 좋다는 수준을 아득히 초월한 물건이었다.
나조차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물건의 놀라운 성능에 감탄만 터져 나왔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마음 놓고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황태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자자, 내부적인 문제는 이걸로 됐고요. 이제 겨울인데 다른 영지들은 어때요? 작년은 별 탈 없이 잘 넘겼다죠?”
로빈이 없는 1년간, 다른 네 개의 영지에서는 혼 래빗으로 얻은 각종 수익을 모조리 영지 방비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결과 병사들까지 대부분 마수 가죽 갑옷과 마수 뼈로 만든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제작 과정을 그레이츠 영지에서 해결해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1년 동안 마법 공학자들이 인챈트한 무기와 갑옷의 수는 정말 엄청난 양이었다.
로빈은 모르고 있었지만, 마법 공학자들이 저택에 풀장을 설치한 건 거의 뇌물에 가까운 선물이었다. 이제 겨우 숨 좀 쉬게 되었으니 제발 거기서 놀면서 일 좀 늘리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요청.
물론 겨울에 풀장에서 모야족 처녀들과 놀고 싶다는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도 자신들이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곳을 뜨고 싶어도 또 은근히 눈이 맞은(사실 히센이 노리고 붙여준) 처녀들이 마음에 걸려 떠나지도 못하는 입장이니 참 안쓰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네, 무장을 잘 갖춰서 그런지 작년은 수월했죠. 마법 공학자 분들이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영주님이 워낙 많은 일거리를 던져주고 가시는 바람에…….”
“하긴, 그건 그렇죠? 네 개 영지가 쓸 갑옷이랑 무기를 전부 인챈트해 달라고 했으니…….”
생각해 보니 이 정도면 노동청(?)에 신고당해도 뭐라고 변명할 수 없는 작업량이긴 했다. 그러니 겨울 정도는 그들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물론 다시 봄이 되면 바빠질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각 영지의 중급 마수의 가죽이랑 뼈의 비축 상태도 양호하죠? 아무래도 이건 제법 물량이 많잖아요?”
“네, 영주님이 당부하신 바가 있어서 그런지 제법 많이 모아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요. 다 쓸모가 있을 거예요.”
그렇게 각 영지 역시 올겨울을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음……. 사제들의 파견 요청. 이건 그건가요?”
“네, 아무래도 저희가 처음에 겪었던 그런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한때 영지의 주력 상품 중 하나인 혼 래빗 고기.
사실 혼 래빗 고기는 수익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이유로 판매를 중지한 지 오래였다. 배는 한 척에 불과한데 그것보다는 그레이트 A나 네 영지에서 몰아 받은 혼 래빗 가죽을 실어다 파는 게 압도적으로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기를 판 이익이 배를 한 척 늘려야 할 정도로 좋은 것도 아니라 그냥 쿨하게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판매를 중단하자 특별한 풍미가 있는 이 고기를 찾는 사람들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요가 있으면 당연히 공급이 뒤따르는 법.
황도에 고기가 들어오지 않자 상인들이 직접 냉동 마차를 이끌고 와 고기를 사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영지에서 직접 내다 팔던 냉장육보다는 품질이 다소 떨어지는 면이 있는데다가 가격도 예전보다 비쌌지만, 나름 머리를 쓴 상인들이 각 영지와 장기 계약을 맺고 단가를 낮추는 등의 방법으로 제법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고기를 사가는 상인들은 혼 래빗 그것을 전매하는 그레이츠 영지보다 다른 네 곳의 영지를 더 선호했다. 아무래도 고기 중 그것이 가장 많은 마진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황도 및 각지에서 상인들이 방문하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자 네 개 영지도 여러 가지 부대 시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처음에 그레이츠 영지에서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봉사의 교단을 초청한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그들에게는 벤치마킹할 좋은 대상이 있었다.
그건 당연히 그레이츠 영지.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영지가 바로 옆에 있었으니 따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레이츠 영지로 교단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럴 만하긴 하네요. 서로 나쁠 게 없는 일이긴 한데……. 교단에 그 정도의 여유가 있을까요? 일이 이렇게 됐는데 누군 해주고, 누군 안 해줄 수 없는 일이잖아요?”
하나의 영지였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 개의 영지에서 동시에 요청한 거라 해줄 거면 네 곳 모두 해줘야 했다.
문제는 교단에 네 개 영지를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사제들이 남아있냐는 거였다.
“저, 사실 요즘 교단이 사제들로 미어터질 정돕니다. 아마 충분하지 않을까요?”
“네? 예전에 얼추 다들 모인 거 같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그게…….”
로빈이 바친 남근상 네 개로 더욱 강력해진 성물은 그 존재감마저 대단히 강렬해졌단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성심이 대단한 사제들만 이 성물의 존재감을 느꼈다면, 지금은 모든 사제가 성물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결과 전국에 흩어져 있던 남은 사제들이 모조리 성물을 향해 모여드는, 일명 2차 순례가 대규모로 발생했고, 한 번 방문한 사제들은 다시 떠나려고 하지 않아 사제의 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사실 사제의 수를 정확히 알지 못하던 줄리에타로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긴 사제도 아니신 장모님까지 느끼실 정도였으니……. 그런데 진짜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대체 몇 년째 모이는 거야”
장모님인 소피아 황비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로빈의 가족을 만나보는 것도 있었지만 성물의 존재를 느끼고 꼭 한 번은 기도를 드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제도 아닌 소피아 황비가 황도에서 이 성물의 존재감을 느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사제들이 다시 모여드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시기가 잘 맞아떨어지긴 했네요. 이 일은 신전의 줄리에타 성녀님과 의논해 봐야겠어요.”
그레이츠 영지가 우버 마을에 준비한 신전 정도의 규모라고 생각했을 때 영지마다 사제 50명 정도는 파견해야 했다.
그러면 최소 200명.
현역에서 뛸 수 있는 사제가 그 정도나 될지는 좀 의문이긴 했지만 우선 줄리에타 성녀를 만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밖에 식량 사정과 각 관문의 경계 상태, 그리고 제정 상황까지 보고를 받고 업무를 마무리 지었다.
결혼식과 축제에 대한 안건이 남긴 했지만 그건 겨우내 차차 해결하면 되는 거고 우선 공고와 함께 참가자 신청을 받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정확한 일정 조율은 그 이후에 하면 충분할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