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 * *
“정말입니까? 그건 정말 여신님의 보살핌이군요. 저희 교단이 드디어…….”
각 영지에서 파견 요청이 들어왔다는 말에 줄리에타 성녀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황도에서조차 밀려나 이런 오지까지 오게 된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 거 같았다.
물론 지금이야 일이 잘 풀렸지만 처음 황도를 떠날 때는 매우 서럽고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영지에서 자리를 잡은 것도 부족해 다른 영지로까지 세를 넓힐 기회를 얻었으니 저리 감격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말 영주님은 여신님의 은총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지. 원하신다면 저희 교단의 에이스 몇을 하녀로…….”
아니, 이 양반아. 아무리 그래도 성녀가 사제를 에이스라고 부르면 어떡하냐?
그리고 이미 황녀의 탈을 쓴 슈퍼 에이스 하나가 제 옆을 강탈했거든요. 솔직히 셋도 버거운 거 같은데 거기에 사제들을…….
정말 날 죽일 셈이에요? 이거 새로운 스타일의 암살 맞죠?
“하하. 괜찮습니다, 줄리에타. 마음만 받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다이앤이 교단의 사제 교육을 받은 것과 진배없어요. 그러니까 제 정실이 여신을 섬기는 신도라는 거죠.”
“아아, 그렇죠. 소피아 언니의 딸이……. 그럼 다이앤 자매를 교단에 보내주시겠습니까? 이래저래 도움 되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거예요. 겸사겸사 온 김에 여신님의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요.”
축복이라면 그거지? 혼전에 받는다는 부작용 제로의 미러클한 성형 수술.
그러니까… 가슴, 다리, 허리, 엉덩이, 얼굴, 피부. 음……. 우리 앤은 딱히 고칠 데가 없는데.
아니지, 아니야. 따로 고칠 만한 곳은 없었지만 받아둬서 나쁜 건 없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좋네요. 린과 실비도 같이 보낼 생각인데, 괜찮겠죠?”
“네, 린 자매와 실비아 자매도 같이 보내세요. 두 분 역시 여신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자매들이니까요.”
둘 역시 모자란 곳 없는 귀요미들이지만 앤과 같이 교육받고 축복을 받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실비아야 예전부터 그랬지만 린은 아니었는데, 언니 어쩌구 하더니 린도 결국 자매가 된 모양이다.
이 교단은 정말 전염성이 너무 강한 거 아냐? 대체 황도에서는 왜 실패한 거지?
“아, 모야족 여성분들의 사제 교육이 슬슬 마무리되고 있어요. 많은 분이 사제가 되시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서요. 영주님도 너무 서운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그런가요?”
몇 년 전부터 백랑이 추진했던 1머린 1메딕 프로젝트가 슬슬 막바지에 접어든 거 같았다. 하지만 줄리에타 성녀의 말을 들어보니 그 결과가 그리 대단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렇게 쉽게 사제가 될 수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백랑 님의 부인이신 월아 님은 사제가 되셨더군요. 그것도 정말 대단한 신성력을 각성하셨어요. 아무래도 부군에 대한 사랑이 정말 대단하신가 봐요. 사실 각성 비율만 봐도 처녀 분들보다 부군이 있으신 분들이 더 높았거든요.”
사랑과 봉사의 교단이라더니 아무래도 봉사 정신 못지않게 사랑 역시 사제에게 대단히 중요한 덕목인가 보다.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교리를 깨우친 게 아니다 보니 이런 벼락치기에는 애정을 품은 대상이 뚜렷이 존재하는 게 더 유리한 모양이고.
이건 확실히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어쨌든 네 곳에 파견할 사제님들은 충분하다는 거죠? 그럼 그렇게 알고 바로 준비할게요.”
“네, 영주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 아내들을 보내 드리는 건 그녀들과 상의해 시간을 정해볼게요. 그래도 괜찮겠죠?”
“그럼요. 아무 때나 편하실 때 오시면 됩니다. 실비아 자매님은 평소에도 이곳에 자주 들르시니 실비아 자매님이 오실 때 맞춰 오시면 편하겠네요.”
그 녀석, 역시 단골손님이었냐?
줄리에타의 말대로 그렇게 하면 제법 편할 거 같긴 했다.
신전에서의 용건을 마치고 다시 관저로 복귀했다.
그리고 바로 각 영지에 이 소식을 알린 후 신전부터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하. 정말인가? 백작, 정말 고맙군.]
“고맙긴요. 서로에게 좋은 일인데요. 다만 신전은 좀 제대로 준비해 주시겠어요? 사제님들의 안전에도 만전을 기해주시고요. 그 정도는 믿어도 되겠죠?”
[그럼, 걱정하지 말게. 내 철저히 준비할 테니. 그나저나, 이제 곧 결혼한다던데 선물은 어떤 거로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군. 내가 받은 게 워낙 많아서 말이야.]
“에이, 뭘요.”
뭘 또 선물씩이나.
물론 주면 고맙게 받겠지만 결혼식에 초대도 못 하는 데 선물을 바라는 건 좀 염치없는 일이었다. 비록 영지민들이 모인 곳에서 공개적으로 식을 치르겠지만 주요 하객들은 친지들로만 모실 생각이었으니까.
교통편이 편하면 몰라도 오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다른 영주들을 초대하는 것도 서로 번거로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리 알고 준비하고 있겠네. 겨울은 아무래도 빡빡하니 봄쯤이면 되겠군.]
“네, 그러세요. 그때로 맞춰서 준비할게요.”
아무래도 결혼식과 영지 축제를 마친 후 사제들을 파견하면 될 거 같았다.
* * *
그렇게 네 영주에게 차례대로 통신을 돌리고 집무실로 돌아가니, 다이앤이 한쪽에서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 벌써 왔어?”
“네, 로빈. 왠지 두근거려서요. 참, 로빈이 말한 대로 이렇게 입었는데 마음에 드세요?”
“오… 그러고 보니.”
다이앤은 틈틈이 영주의 일을 보조하기로 했다. 다이앤의 전공과 능력을 썩히고 싶지 않아 영주 개인 비서 비슷한 거로 삼은 것이다.
솔직히 저 정도면 웬만한 관료보다 나은 대단한 능력자였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다만 이왕 하는 김에 개인적인 욕심을 좀 채우자는 생각에 오피스 룩을 갖춰 입으라고 은근히 종용한 것인데.
이곳에서는 스타킹이 아직 개발되지 않아 그게 좀 아쉽지만, 몸에 밀착된 검은색 미니 원피스에 하얀 재킷으로 꾸민 다이앤의 모습은 로빈의 마음에 쏙 들었다.
역시 다른 건 몰라도 여성복의 감각만큼은 전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다 보니 이런 옷도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정말 봉구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면 이런 점만큼은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여성들의 적극성 역시 감사하는 부분 중 하나였지만 말이다.
“굿 잡. 아주 좋아.”
“히힛. 그래요? 다행이에요. 그럼 역시 봉사부터?”
응? 아니, 이 아가씨가?
물론 저런 복장의 비서를 내 집무실에서 냠냠 하는 것도 숨겨진 야망 중 하나지만 그런 목적만으로 앤을 청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능력이 진짜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진 않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그녀가 업무를 빨리 익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자신이 영지를 비울 일이 제법 많을 거 같았다. 물론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지만 상황이란 게 꼭 원하는 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온과 함께 앤이 영지의 일을 담당해 줘야 했다. 솔직히 내 능력으로 밖에서 벌어지는 일과 내부의 일을 모두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았다.
내게 별다른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나마 가장 자신 있는 건 역시 주제 파악이었다.
“그건 나중에. 우선 일부터 하자. 서류를 보니 어땠어?”
로빈이 우선 일부터 하자고 하자 속으로 혀를 찬 다이앤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웃으며 자신이 보고 느낀 걸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재정 상태가 상당히 좋네요. 솔직히 이곳 영지의 규모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예요.”
“그래?”
“네, 물론 자금 대부분을 약품 공장에 쏟아붓고 있어서 당장은 여유 자금이 없는데 이번 분기 그레이트 A의 판매 수익금과 로열티, 그리고 그레이트 V의 추가 판매 대금. 또 혼 래빗 가죽의 판매 대금과 시크릿 웨폰? 이건 뭐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걸 판 돈이 들어오면 다시 자금 사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와요.”
“응. 맞아.”
“물론 황실에 빚지고 있는 게이트 건설 대금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그만큼 다른 영지에 빌려준 돈도 상환될 테니 문제는 없어 보이고요.”
“그럼 앞으로 우리 영지에 무엇이 필요할까?”
로빈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다이앤은 뭔가 깨달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 그러네요. 영지에 유흥 거리가 거의 없네요. 이미 영지 소득은 상당 수준까지 올라갔고, 영지민들도 여윳돈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마땅히 쓸 곳이 없어요. 원래 배가 부를수록 즐거운 걸 찾기 마련이라죠? 그나마 있다면 작은 미술관과 남쪽 마을의 풀장 정도가 끝이니…….”
앤이 정확히 맥락을 짚었다. 역시 옆에 둘 가치가 있는 여자랄까? 확실히 앤은 정말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거 같았다.
“맞아. 사실 지금까지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렇게 살았어. 하지만 이젠 아니지. 고생한 만큼 즐길 것도 있어야 좋은 영지가 아니겠어?”
물론 이게 필수적인 건 아니지만 여유가 있는데 굳이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네요.”
“그러니 앤은 우선 그것부터 생각해 봐. 영지민들이 즐거워할 만한 무언가를 찾는 거지. 우선 영지 상황을 살펴보고, 자금은 다음 분기에 들어오는 수익금의 반 정도를 생각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맞춰서 계획을 세워.”
“네, 로빈. 그럴게요. 재미있을 거 같아요.”
이 일을 시작으로 점점 앤의 업무를 늘려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앤이 영주인 나보다 더 일을 잘하게 되면?
그때 나는 도장만 찍는 바지 영주가 될 수도 있었다. 셔터 맨이야말로 진정 꿈의 직장이었으니 말이다.
로빈의 원대한 계획이 뜻대로 이루어질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꿈만은 정말 야무졌다.
“그리고 시간 나면 신전에 들러 줄리에타 성녀님을 만나면 될 거야. 그분도 앤을 만나고 싶어 하시네. 실비아나 린이랑 같이 와달라니 시간 한번 맞춰 봐.”
“정말이요? 헤헤. 마마랑 자매처럼 지냈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봐요. 꼭 한 번 만나보라고 하셨거든요.”
역시 장모님이 그날 마차에서 이런 이야기도 해준 모양이다.
앤에게 언질을 줬으니 알아서 둘과 시간을 맞출 테니 이걸로 이 건도 대충 해결이었다.
앤이 집무실을 떠나고 다음 면담 대상은 존과 릭스터였다.
“존은 안색이 정말 좋아졌네요.”
“하하. 형님께서 꿈에 나와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더군요. 그리고 그날부터 악몽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씐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진 듯 환한 표정의 존을 보니 뭐라고 할 말이 없어졌다. 원래는 주의를 좀 주려고 했는데 저렇게 좋아하니 말문이 막힌 것이다.
“후. 뭐, 좋아요. 하지만 저번에는 순전히 운이 좋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시죠?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돌발 행동하시면 정말 곤란해요.”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주님. 이제 그럴 일도 없습니다.”
하긴 원수도 죽고 자신이 죄가 없다는 것도 인정받았으니 앞으로는 무슨 일이 생길 것도 없긴 했다.
힐데 후작과 조셉 공작이 모두 죽은 후, 그 일의 마무리는 황태자가 맡았다.
힐데 후작이 남긴 각종 자료를 모조리 긁어와 조사해 본 결과 예전에 그 사기극을 벌인 자가 힐데 후작이란 것도 밝혀냈고.
이미 20년도 넘게 지난 일이라 그럴 의무가 없었지만 힐데 후작의 남은 재산을 처분해 그때 피해를 본 황도 주민들을 찾아 따로 보상까지 했다. 당연히 존과 동생들에게 내려진 수배령까지 해제되었으니 존으로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된 셈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망자 생활을 한 그들에게도 어느 정도 보상이 뒤따라야 하지만 사실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너무 무리였다. 물론 잡히면 거의 사형 확정이라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황실의 명령을 어기고 도주한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존도 그런 것까지 바라지는 않는 거 같았다.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니 그냥 접어두고, 사실 앞으로의 일 때문에 존을 불렀어요.”
“네, 영주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우버 마을을 찾는 이방인들을 더 철저하게 살펴주셔야 할 거 같아요. 어쩌면 이상한 놈들이 영지에서 분탕질을 칠 수도 있거든요.”
로빈은 황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존에게 설명하고 영지에 들르는 이방인들의 감시를 강화해 달라고 지시했다.
“영지민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그들 특유의 묘한 느낌과 분위기가 있거든요. 사실 그런 건 흉내 내기도 어려워서 딱 보면 이방인이란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죠. 제 동생들도 그 정도는 구별할 수 있으니 모야족 전사들과 의논해서 잘 찾아보겠습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