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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91화 (191/303)

191화

변장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라서 그런지 바로 알아볼 수 있다는 존.

하지만 저 정도 자신감이면 어느 정도 믿을 만한 거 같았다. 돌발 행동을 한 번 하긴 했지만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요, 존. 이게 생각보다 더 중요한 일이에요. 그러니 집중해 주세요.”

존에게 그렇게 당부한 후 옆에서 눈치만 살피는 릭스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고는 자기가 쳐놓고 당당한 존의 모습에 비해 릭스터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릭스터를 부른 건 예전의 일을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릭스터,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예전의 일로 부른 게 아니거든요.”

“하하, 그러십니까? 그러시다면야…….”

긴장한 릭스터가 한숨 돌리기를 기다렸다가 본격적으로 용건을 밝혔다.

“사실, 우리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영지에 자리 잡으신다고 하세요. 그런데 그분들이 상당히 고귀한 분들이라서요. 그분들 마음에 찰 정도로 대단한 저택을 짓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구색은 맞춰야 하지 않겠어요?”

“허, 처가면 그때 그분들이요? 딱 봐도… 아니아니, 백작 부인께서 황녀님이라니 그분들은 그럼……. 영주님, 안 됩니다. 설마 저한테 그분들이 지내실 집을 지으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릭스터도 오고 가며 두 분을 뵌 적이 있는지 딱 누구인지 알아듣고 생각을 정리하다 최근에 밝혀진 다이앤의 정체를 떠올리고는 기함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딱히 맡길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영지에서 집을 가장 많이 지어본 사람들은 릭스터와 그 똘마니들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부담 갖지는 마시고요. 그나마 이쪽 방면의 전문가가 릭스터라고요. 이제 와서 황도에서 전문가를 초빙할 순 없잖아요? 그분들이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는데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부담을 갖지 말라고 억지를 부린 후, 적당히 깔끔하고 운치 있는 작은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두 분과 두 분을 모시는 하녀 둘, 그리고 하인 하나까지 딱 다섯 명만 살 집이라 그리 큰 집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을 맡은 릭스터는 복통으로 꼬여 들어가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어디에 집을 지어야 하는지부터 물었다.

“최대한 신전 근처면 좋겠는데, 좋은 자리가 있을까요?”

“신전 근처라……. 앞쪽은 통행인이 너무 많아 번잡스러워서 별로 좋은 곳이 아니죠. 가장 좋은 곳은 아무래도 신전 뒤쪽 들판이랄까요? 거기는 신전과 바로 맞닿아 있는데다가 사람들도 나다니지 않는 곳이죠.”

“신전 뒤쪽……. 그런데 거기는 신전 밖이 아니라 안쪽이잖아요? 신전 안에 저택을 짓겠다고요?”

“어차피 다 영주님 땅인데 뭐 어떻습니까? 게다가 신전에서도 안 쓰고 놀리는 땅인데요.”

신전 뒤쪽 공터면 확실히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긴 했다. 신전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 장모님이 원하는 입지에 가장 부합하기도 하고. 다만 신전 쪽에서 뭐라고 반발할 수도 있는 문제라 그쪽의 협조도 구해야 했다.

“뭐, 우선 신전에 가서 물어보고 허락하면 그렇게 하세요. 작지만 아늑하게, 자재는 그거 뭐냐? 대수림의 그거 있죠? 튼튼하고 때깔 나는 거. 그걸로 부탁드릴게요.”

“겨울이라 좀 곤란할 뻔했는데, 다행히 집 하나 지을 정도의 목재는 남아있습니다. 대신 나중에 저한테 뭐라고 하시기는 없습니다?”

“그래요. 제가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최선만 다해주세요.”

“…네. 영주님.”

물론 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말하는 남자였지만 또 자신이 시킨 일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는 양아치는 아니었다.

“어디 보자, 대충 급한 건 다 마무리 지은 건가? 이제 병력 상황만 살펴보면 겨우내 별문제는 없겠군.”

그렇게 두 남자에게까지 일을 맡긴 로빈은 대충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을 나섰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이 남았지만, 이건 집무실을 떠나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 * *

로빈은 가장 먼저 연무장을 찾았다.

기사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연무장.

어쨌든 연무장이 영지 방위의 핵심이었으니 한번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영지를 떠나있으며 적어도 1년도 넘게 기사들을 살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악!! 마녀 단장!!”

“아직 멀었어!! 그동안 참 편했지?”

“편하긴 뭐가 편합니까? 개같이 구르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것이 반가웠는지 사정없이 기사들을 굴리고 있는 린.

기사들은 이를 바득 갈면서 린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실력 테스트 겸, 실전처럼 대련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날 욕하지 말고 주인을 욕해. 이게 다 주인 때문이니까!”

“대체 영주님께서 뭘, 어쨌다는 겁니까?”

“주인이 어젯밤에 날 마구 주물러대고 그냥 잠만 잤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짜증 났는지 알아?”

그 동기만은 왠지 너무 불순해 보였다.

아니, 저 린나니가 뭐래? 너에게 공과 사를 분별하길 바라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이니?

“그게 우리랑 무슨… 억!”

“시끄러워!”

따지던 기사 하나가 린의 대검에 얻어맞고 뒤로 넘어가고 다시 다른 기사가 린에게 덤벼들었다.

“마녀!! 그러니까 영주님이 단장을 안 먹는 겁니다!”

“이 미친놈이! 나랑 진짜 해보자는 거지?”

결국 린의 정식 호칭은 마녀 단장으로 통일된 건가?

로빈은 린을 자극해 굳이 매를 버는 기사의 모습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린을 도발하고 달려든 기사를 보고 있자니 얻어터지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움직임은 상당히 괜찮았다.

“예전보다 기사들의 수준이 제법 올라갈 거 같은데. 르보른 부단장도 그간 수고가 많았겠어.”

마지막으로 기사들을 살펴본 게 대략 1년 전이던가?

고작 1년의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기사들의 수준이 그때와 또 달랐다. 숫자도 그렇지만 기량 역시 점점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매년 실전에 실전, 그리고 훈련을 거듭하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물론 폴이 기사단을 맡았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어느 쪽이 더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각자 장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으악! 미친 마녀 단장. 거기서 실력이 더 올라간 거야?”

그렇게 계속 이어진 대련에서 기사들은 하나둘씩 자빠져 나갔고,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린을 쓰러트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린을 이겨보겠다고 이를 갈며 덤비는 건 좋은데 기사들의 기량이 올라가는 것보다 린의 실력이 더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저러니 앞으로도 계속 린에게 얻어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사들의 기량이 만개하는 시기를 대충 서른 전후로 본다. 그 말은 서른까지는 꾸준히 기량이 느는 경우가 많고, 서른이 넘어서면 이제 완숙기에 들어 은퇴할 때까지 기량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훈련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영지의 기사들의 나이가 이제 20대 중반에서 서른 초입인 경우가 많았고, 신임 기사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으니 앞으로도 당분간은 실력이 계속 올라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우리 기사단장 린 역시 무려 10대 후반.

아직 앞날이 창창했다.

“주인! 두고 봐!! 내가 무조건 깔아뭉갠다!!”

어제 자극이 너무 심했나? 어쩐지 심하게 움찔거린다 싶더니.

앤과 실비아에게 엄청난 자극을 주는 일명, 갓 핸드가 린에게도 통하는지 궁금해서 체면 불고하고 슬슬 쓰다듬었는데 역시 린에게도 제법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물론 자신이 무슨 대단한 테크니션일 리는 없으니 결국 뭐가 있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신의 보은(S+)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단순히 사제들의 생체 바이브가 되는 것 외에 여신을 믿는 모든 여성에게 유효하다는 거지? 혹시나 했던 앤조차 장모님의 말대로라면 여신님을 믿고 있는 거니까.”

전혀 쓸데없는 거로 생각했지만 이러면 말이 좀 달랐다. 현실에서도 충분히 쓸 만한 능력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아수라장의 파괴자, 마스터, 연금 여제, 흉포한 검은 야수. 이런 거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 실생활에 유용하긴 한 거군.”

로빈은 버럭 고함을 지른 린이 기사들을 상대하는 걸 잠시 지켜본 후 몰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 접근했다가는 괜히 봉변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기사들의 상태가 언제나처럼 준수하다는 걸 이미 확인한 후였다.

그렇게 슬슬 자리를 피하고 있자니 연무장 구석에서 듀발과 대련하는 세이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헤헷! 어떠냐? 이제 나도 많이 늘었다고! 예전의 세이라가 아니야!!”

“아직 하체가 많이 약합니다, 아가씨.”

“익! 두고 봐!”

우리 집안의 두 번째 비글 세이라.

불과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성장기는 성장기인지 제법 많이 자랐다. 물론 아직 멀었지만, 슬슬 기틀 정도는 잡았다고 할까?

예전에는 듀발이 여유 있게 봐주면서 상대해 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듀발도 어느 정도 최선을 다해야 한달까?

하긴 마나를 저렇게까지 잘 다루는 녀석이 제대로 된 근력과 체력까지 기르고 있는 거니 성장 속도가 놀라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러다가는 성장기가 끝나기 전에 듀발을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듀발이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는지 아는 로빈으로서는 눈물이 앞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듀발이 계속 세이라를 전담하는 건가? 저러면 진짜 피곤할 텐데.

“에이, 진짜 더러운 세상이라니까.”

로빈은 혀를 차며 슬슬 연무장을 빠져나가 다음 목적지인 공방으로 향했다. 이 양반들이 겨우내 뭘 하면서 놀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 여유가 있다면 새로 지을 처가댁에 몇 가지 마법 기구를 추가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오, 영주. 새로운 보금자리는 마음에 들던가? 욕실이며 풀장이며 정말 신경 써서 만들었다네. 하하.”

“우리의 역작이란 말이지.”

“그러니 영주도 좀 쉬엄쉬엄하게나. 이게 곧 신혼이지 않은가?”

“네, 마음에 들었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뭐라고 묻기도 전에 선수를 치고 나오는 마법 공학자들.

바쁠 때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얼굴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왔었는데 그래도 좀 쉬었는지 지금은 혈색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뭐라도 더 시켜야 하나 고민되는 찰나에 저렇게 선수를 치고 너스레를 떠니 웃음이 나 뭘 더 시키기도 뭐 했다. 그냥 계획대로 겨울은 쉬게 하고 몇 가지 부탁만 덧붙여야겠다.

다른 건 몰라도 상황 전하와 관계된 일이니 저들도 그 정도는 흔쾌히 받아들일 거다.

“사실은요. 제 사돈댁, 그러니까 상황 전하 내외분이 영지에서 머물 집을 짓고 있어요.”

“사… 상황 전하? 아아, 그렇지. 백작 부인 되실 분이 1황녀 저하라고 했었지?”

“그래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분들이 보통 분들이 아니잖아요? 언제 돌아오실지 몰라서 서둘러 집을 올리고 싶기도 하고, 몇 가지 마법 장치들도 필요하단 말이죠.”

“그런 일이라면 우리에게 맡겨주게나. 우리가 확실히 처리하겠네.”

“그러시겠어요?”

히센과 도리아, 알버스를 필두로 한 평민 출신 단승 귀족 엘리트들은 대부분 황실, 그러니까 룩센 대제의 교육 정책에 수혜를 입은 자들이었다.

평민들이 마음 놓고 전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전대나 전전대 황제 시기부터였으니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그런 특혜를 대대적으로 확대한 것이 바로 룩센 대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룩센 대제가 살 집이라는 소리에 저렇게 발 벗고 고생을 자처하는 거였다. 사실 그 알버스조차 황실에 충성하는 마음 때문에 억지에 가까운 황태자의 명을 받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런 엘리트들의 충성심 역시 귀족이 따라올 수 없는 황실만의 숨겨진 힘이 분명했다.

그렇게 일을 맡겨 방문한 목적을 달성한 로빈은 공방을 둘러보며 요즘은 뭘 하고 지내는지 물었다. 마법 갑옷이나 무기에 인챈트하는 건 여름쯤에 대부분 마무리되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시간이 좀 나서 다시 미스릴을 살피고 있다네. 자네가 입은 거야 그냥 외형만 바꾼 거고, 좀 더 제대로 사용할 방법을 연구하고 있어.”

“그런가요?”

“미스릴에 마법만 부여할 수 있어도 정말 굉장한 녀석이 탄생할 거야. 그 방법만 찾아도 완전무결한 방어구를 열 벌은 제작할 수 있다는 거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딱 봐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미스릴이 사용될 당시에는 마법 부여나 마법 공학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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