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남부 연합국 쪽에선 이런 공문을 보내왔군.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이걸 이대로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당연히 황실은 남부 연합국 쪽에 시정 조치를 요구했으나 남부 연합국은 민간에서 사사롭게 이용하는 것뿐이고 왕실도 제작자를 조사하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는 항상 똑같은 그런 답변을 보내올 뿐이었다.
공문 정도로 귀찮은 일이 해결되길 바랐던 귀족들의 희망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전하, 그렇다고 무역 제재를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국은 남부 연합국에서 아르마늄을 거의 전량 수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놈들이 그걸 믿고 이리 배짱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오나…….”
“무역 제재는 안 된다? 그럼 남부 연합국을 정벌하면 되겠군. 그렇게 되면 아르마늄을 수입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도 본때 정도는 보여줄 수 있겠군.”
“그… 그건.”
지금이야 적당히 잘 지내고 있지만, 남부 연합국이랑 크게 갈등을 빚고 서로 전쟁을 하던 시기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실제로 남쪽으로 쳐내려가 남부 연합국을 상당 부분 정복한 황제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낯선 기후와 풍토, 익숙지 않은 관습 때문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전례가 없는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귀족들은 수많은 군비가 낭비되고 인적 손실을 야기하는 전쟁이 일어나는 걸 절대 원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들의 주머니에서 많은 군비를 게워 내야 하기 때문이다.
제국에는 명예 기부금이란 제도가 있었다.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 시 작위에 따라 거액의 기부금을 내는 제도를 말함인데, 이 기부금을 빙자한 세금을 내지 않으면 바로 귀족 사회에서 퇴출당하거나, 재수가 없으면 작위를 몰수당할 수도 있었다.
특히 전쟁의 경우 가장 많은 금액의 기부금이 책정되어 있어서 전쟁이라면 모두 난색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가 제대로 된 무력 도발을 일삼는다면 몰라도 성인 용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거기에 군비를 대는 건 너무 기가 막힌 일이었으니 말이다.
“황실의 권위가 무너졌다. 이는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지. 다들 대책을 마련해 오라. 최소한 그 빌어먹을 아르마늄의 소비를 줄여 무역 제재라도 할 수 있게 방법을 생각해 오란 말이다. 만약 그렇게 못한다면, 황실의 권위를 위해 군을 움직일 수밖에 없도다. 다음 회의까지 말미를 주겠다.”
대리 황제, 황태자의 선언으로 회의가 마무리되고 귀족들은 한숨을 쉬며 회의장을 나섰다.
“빌어먹을 남부 연합국 놈들, 적어도 미안하다고만 했어도 뭐라고 할 말이 있을 텐데…….”
“그걸 인정하면 더 곤란하겠지. 괜히 이상한 빌미가 될 테니 말이야.”
“황태자 전하의 말처럼 분명 알아보지도 않고 공문부터 찍어 보낸 걸 거야. 어차피 이 정도로 전쟁이 일어날 리도 없고, 아르마늄이 있으니 거래를 끊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잘못 걸렸어. 지금은 정권 교체기라고. 황태자 전하가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진짜 전쟁을 일으킬지도 몰라. 본인 자체도 대단한 기사고, 군부에서 황태자 전하에 대한 지지가 굉장하니 불가능도 아니지.”
“크라우, 작센, 리아누스. 남부는 솔직히 황태자 전하의 텃밭이나 마찬가지야.”
“거기다 외척이 된 레오니스와 북부의 그레이츠까지 손을 보탠다면…….”
“정복 전쟁은 몰라도 징벌 전쟁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황태자 전하의 세력만으로도 남부 연합국을 손볼 수 있을 거야.”
“물론 군비는 우리 주머니에서 나갈 테고?”
대전에 있던 모든 귀족의 표정이 떫은 감을 먹은 듯 떨떠름하기만 했다. 정말 황태자의 말대로 징벌 전쟁을 일으키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황위 계승권을 두고 형제가 경쟁하다 한쪽이 황제로 즉위해 정권이 바뀌게 되면 새로운 황제를 따르던 귀족들이 자연스럽게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정권 교체는 막판에 반란을 일으킨 조셉 공작 때문에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황태자를 따르던 황태자파가 조셉 공작의 기습적인 반란과 황태자의 누명에 당황하며 사태를 관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황태자가 스스로 황위를 쟁취한 셈이라 공을 챙겨줘야 할 귀족들의 대부분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공을 인정받을 만한 귀족들은 모두 권력에서 발을 빼버렸다.
리아누스 후작은 영지를 돌본다는 핑계로 황도를 떠났고, 레오니스 공작은 외척이 정사에 관여하는 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영지로 돌아갔다. 크라우 백작과 그레이츠는 어차피 변경백이라 중앙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고.
일이 이렇게 되니 중앙 정치는 황태자가 홀로 주도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중앙에서 물러났다고 황태자의 지지 세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각 지방에 남아 군권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황태자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었다.
결국 귀족들이 황태자의 뜻을 꺾으려면 귀족들의 힘을 모아 세를 과시하기는 게 아니라 정치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중앙 귀족들에게는 황태자가 합리적인 인물이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말은 자신들이 적당한 대안을 찾아내면 황태자가 스스로 의견을 접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하, 리아넨 공작 각하라도 무슨 말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 일의 직접적인 관련자가 그 리아넨 공작 각하시네. 물론 그분도 전쟁까지 가길 원하시진 않겠지만 뭐라고 할 말은 없으실 거야.”
그런 황태자에게 그나마 말을 붙여볼 만한 인사라면 리아넨 공작뿐이었다. 하지만 이 일 역시 그가 시작한 일이었으니 따로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 * *
“푸하하. 황태자 전하 진짜 웃기네. 이러려고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한 거였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전에서 나가는 귀족들을 지켜보던 신임 리아넨 공작, 그릭스 리아넨은 귀족들이 모두 나가자 대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뭐, 전쟁이 목적일 리는 없으니 한번 지켜봐야겠네. 역시 황태자 전하는 재미있다니까. 이거 그레이츠 백작도 알고 있으려나? 솔직히 나보다 그쪽이 직접적인 당사자잖아? 로열티도 거기로 들어가고.”
이 일을 알면 로빈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해지는 그릭스였다.
그리고, 그 시각 황제의 집무실.
대전에서 크게 호통 친 황태자는 집무실에서 참모들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호통을 쳐놨으니, 아르마늄 사용을 줄이기 위해 마수 갑옷 사용을 확대하자고 해도 별말 못 하겠지. 군비를 대는 것보다 마법 갑옷 몇 개를 바꾸는 게 훨씬 더 싸게 먹힐 테니 말이야. 마법 부여사들에게는 알아봤나?”
“네, 견본만 있으면 금방 만들 수 있답니다. 어차피 상급 마수의 것이 아니라 중급 마수의 것이라 별로 복잡한 건 없다는군요.”
“그건 그치들이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거고, 일 자체가 쉬운 건 아니랍니다. 그 인간들이야 마법 부여 쪽으로는 최고의 권위자잖습니까? 안 돼도 된다고 해야죠. 물론 가능하긴 할 텐데 아무나 그렇게 하진 못할 겁니다.”
“그런가? 하지만 어쨌든 된단 말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거야 그렇죠.”
황태자의 목적은 이 일을 계기로 아르마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거였다. 우선 병사들 위주로 마수 가죽 갑옷을 널리 보급해, 만일의 사태에도 최소한의 방어력을 갖출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수 가죽으로 된 마법 갑옷을 많이 만들수록 제국이 더 안전해지는 시기가 이제 곧 다가올 것이다.
“좋아. 이제 이 건은 그레이츠 쪽으로 넘기고. 우리가 논의해야 할 건 다른 거군. 우선 장마를 대비한 치수 상황은 점검해 보았나?”
“네, 전하. 몇몇 영지에서 미진한 구석이 있어 따로 시정을 명령했습니다. 남부 쪽은 아예 리아누스 후작이 나서서 점검한다니 별문제 없을 거고요. 동부 쪽도 레오니스 공작 각하가 신경 쓰신답니다.”
“좋아. 그럼 마지막 문제는 해상 왕국의 전염병이군. 이게 딱 봐도 그때 그 병인 거 같은데 어쩌면 좋겠나?”
“그쪽과는 거래도 트지 않았고, 거의 적국인 상황이라 사실 방법도 없습니다.”
“하지만 경계는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더군요. 공식적인 거래는 없지만 밀거래는 생각보다 많다고 합니다. 만약 그쪽에서 병이라도 옮긴다면…….”
“그건 그렇군. 남쪽의 경계를 확실히 해야겠어.”
“우선 만들어진 물량부터 남쪽으로 푸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병이 퍼지기 시작하면 늦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이것도 그레이츠와 논의해 봐야겠어. 크라우 백작가 쪽은 황도의 물건이 들어가겠지만, 작센 쪽은 그레이츠가 책임지는 게 좋은 그림일 테니 말이야. 사실 두 곳을 모두 커버할 정도로 물량이 쌓인 것도 아니니까.”
“그레이츠 백작이 바빠지겠군요.”
“그렇겠지? 아무래도 황도에 한 번 들르라고 해야겠어.”
“글쎄요. 그 사람이 쉽게 황도로 들어오겠습니까? 이제 결혼이 코앞인데요.”
로빈의 성격을 떠올리며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젝트.
하지만 황태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아니면 지가 황제 하든지.”
“끙.”
젝트와 조단 크라우는 그레이츠 백작에게만 유독 억지를 부리는 황태자의 태도에 혀를 차며 로빈의 안녕을 빌어줄 뿐이었다.
* * *
로빈에게 기막힌 소식이 전해진 건 겨울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무렵이었다.
영지 미인 대회 선발 시 알몸 퍼레이드를 할지, 단순히 속옷 심사 정도로 완화해야 할지를 논의하다 통신 수정구를 관리하는 관료에게 연락을 받은 것이다.
로빈은 “보X가 예뻐야 진짜 미인이지!! 다른 건 사실 다 소용없는 거야!”라는 백랑의 개소리에 혀를 차며 황태자와 통화하기 위해 통신 수정구를 건네받았다.
“로빈 그레이츠입니다.”
[후작, 수고가 많군. 북부의 상황은 어떤가?]
“예년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전체적으로 여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네요.”
북부의 상황과 안부 인사, 그리고 각자 결혼식 준비가 잘되고 있는지까지 일상적인 안부를 물은 황태자는 회의에 올라온 리아넨 공작의 요청을 설명하고, 가능하면 빨리 황도에 입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로빈으로서는 정말 뜬금없고 황당한 이야기였다.
“그 회의에 제가 참석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결론은 다 난 거 같은데요?”
[그건 아니지.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큰일이 아닌가? 후작이 이해 당사자니, 후작의 첨언은 생각보다 중요하다네.]
전쟁은 개뿔. 저 양반이 전쟁을 절대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데 내 불알 두 쪽을……. 아니, 이건 내 여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취소하고.
어쨌든 뭐든지 다 걸 수 있었다. 뇌가 완전히 비어있는 3황자라면 몰라도 앞으로 어떤 난리가 일어날지 뻔히 아는 저 양반이 전쟁을 일으켜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3황자는 죽었는데 퀘스트 완료는 왜 안 뜨는 거야? 까맣게 잊고 있었네.
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너무 어이가 없어서 갑자기 정신이 산만해졌지만 어쨌든 황태자는 지금 나에게 개뻥을 치고 있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저번에 그릭스 대공자(이제는 리아넨 공작이 되었지만)와 만났을 때 그는 분명 제국 내 물량을 소화하는 것도 벅차다며 다른 협력 업체와 손을 잡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었다.
그 말은 해외 쪽은 생각할 겨를도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남부 연합국에서 짝퉁이 만들어진다고 신고했다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되었다.
그렇다면 결국 무슨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는 발의라는 건데. 그 야합 뒤에는 분명 저 뻔뻔한 양반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하~ 전하, 그냥 알아서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전 이제 결혼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요. 국외에서 들어오는 로열티라고 해봤자 별 의미 없으니 그냥 결과만 말씀해 주시죠.”
[그럴 수야 있나.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데.]
이 양반이 정말. 진짜 계급장이라도 떼고 한 판…….
아후. 더러운 세상, 진짜. 그냥 계급이 깡패였다.
“황태자 전하, 어떤 황제도 결혼 직전에 있는 귀족을 황도로 불러들인 적은 없었습니다. 솔직히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 아닌가요? 전하께서도 이제 곧 결혼하시는데 사정 좀 봐주시죠.”
[내가 최초라니 또 제국의 역사를 새로 쓰겠군. 마음에 드는 일이야.]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왜 저렇게 풀 발기해 있지?
아니면 그냥 심통 부리는 거야? 자기가 찍어준 영애랑 결혼하지 않고 앤이라 결혼한다고 저러는 거냐고?
“전하, 진짜 그러시면 제가 가서 난장판을 만들어버립니다?”
[깽판이라도 치겠다는 건가? 뭘,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