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로빈은 자신이 가장 단순한 이치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물약을 가장 비싸게 살 수밖에 없는 불편한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돈은 어차피 국적도, 인격도 없는 놈이었다.
“형님, 그냥 그 물약 중 일부를 밀매로 넘기죠. 저놈들은 이걸 살 수밖에 없잖아요? 물량 조절해서 고가로 넘기면 물약 값 정도는 충분히 뽑지 않을까요?”
[밀매로 놈들한테 넘긴다?]
당연히 밀매는 범죄였다. 하지만 이 물건의 용도는 단순한 치료제가 아니었고, 상대의 정체도 모호한 상황이라 남부 연합국의 상인에게 팔았다고 하면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지금 상황에 저 약을 비싼 값으로 사갈 놈들은 해상 왕국 놈들뿐이라 눈 가리고 아옹이었지만 어차피 약의 존재를 알게 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갈 테니 그냥 대놓고 팔아서 돈이라도 버는 게 더 나았다.
그리고 라이언은 상황에 따라 그 정도 밀매는 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괜찮은데? 그만큼 놈들의 군비도 줄어든다는 거잖아? 좋아. 이 기회에 놈들의 돈을 뜯어낸다.]
게다가 그렇게 하면 라이언의 말처럼 놈들의 군비를 갉아먹을 수 있었다.
물론 고가로 판매하면 결국 귀족들 정도만 사먹게 되겠지만 대량으로 물건을 넘길 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적국이라 그렇게 사정 봐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차라리 잘되었군. 여름에 홍수가 난대서 이것저것 준비하기도 빡셌는데 돈이라도 좀 만지면 편해지겠는걸?]
“그런가요?”
약품에 대한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자 공적인 부분은 모두 해결되었고, 사적인 이야기로 넘어갔다. 앤이 잘 지내고 있느냐는 이야기부터, 부모님이 무탈하신지까지.
생각보다 꼬치꼬치 물어대는데 그도 분명 룩센 대제와 따로 연락하고 있을 텐데 저에게까지 따로 그걸 묻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괜찮다고만 하시더군. 사람의 삶이란 게 하루하루가 다른 법이거늘. 맨날 괜찮다고만 하시니…….]
설마 이 인간, 맨날 연락하고 있는 건가? 저 정도면 룩센 대제의 성격상 아마 귀찮아서라도 그냥 괜찮다고 할 거 같았다.
어쨌든 라이언이 대단한 효자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두 분과 다이앤 모두 잘 지내고 있다고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흠흠. 고맙군, 매부. 자네가 그렇게 신경 써준다니 나도 마음 편히 이곳에서 생활할 수 있겠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이제 그쪽도 우리 식구잖아요.
“그나저나, 형님도 결혼하신다면서요? 신부는 마음에 드시던가요?”
[하하. 그렇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솔직히 마음에 들어. 지금 벌써 영지에 내려와 같이 지내고 있거든? 황태자 전하가 황제로 등극하시면 바로 결혼할 생각이야.]
뭐야? 벌써 그렇게 됐다고?
잠깐. 지금 크라우 백작 영애가 저기 내려가 있다는 건…….
벌써 한 건가? 난 결혼이 아직이라 못 하고 있는데 저긴 벌써 했다고? 이건 너무 불공평한데.
“…괜찮던가요? 속궁합이라든지…….”
[아아, 좋았어. 보기에는 얌전해 보였는데 제법이더라고. 취향도 은근히 내 스타일이라 서로 흡족했달까? 하하. 나도 처복이 괜찮은 모양이야.]
“아, 네. 축하드립니다.”
세상에 정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우리 형님이 그런 스타일이었어? 보기에는 점잖은 거 같은 분이 강하게 압박하면서 즐긴다고?
라이언의 성적 취향도 물론 충격적이지만 더 충격적인 건 황녀에게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제한이 붙어있는 주제에 황자에게는 아무런 제한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라이언이나 황태자는 결혼 전에도 마음껏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쓰레기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물론 이제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어쨌든 결혼식에도 데려갈 테니까. 그때 보자고.]
“네, 뭐.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라이언과 통화하며 역시 세상이 더럽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로빈은 다음 날 바로 남쪽으로 보낼 물약 박스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바로 배에 실어 남쪽으로 보내버렸다. 생각보다 급하게 저 물건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였다.
그리고 어제 황태자와의 대화를 통해 갑자기 생각난 퀘스트를 확인해 보기 위해 퀘스트 창을 한번 살펴봤는데.
[완료!] (Loading… 47%)
페루 3황자의 황제 등극을 저지하시오.
보상: ???
페널티: 인류의 종말
기한: 3황자의 황제 등극, 황태자의 사망
확실히 퀘스트 자체는 완료되어 있었다. 3황자의 황제 등극을 저지하는 퀘스트인데 3황자가 이미 죽어버렸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뭔가 로딩에 걸려 완료 창이 뜨지 않았던 모양이다.
“로딩은 무슨. 장난하냐?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로딩 질이야?”
진짜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에 어이가 없어 그냥 퀘스트 창을 치워 버렸다. 어차피 완료되면 알아서 완료 창이 뜰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요즘 생각해 보니 저 퀘스트에서 뭔가 보상을 바라는 건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받은 보상이란 게 다 쓸데없는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이앤을 받은 건(?) 대단한 보상이었지만 그 전에 이미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다이앤을 퀘스트 보상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사실 의문이었다.
다만 퀘스트의 존재가 길잡이가 되어 자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그냥 퀘스트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순순히 따르는 게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으리라.
그래도 그나마 시스템이 하나둘씩 업그레이드되고 있으니 퀘스트를 적당히 잘 따라가는 것도 크게 손해는 아니었다.
“원래 진짜 주인공은 퀘스트의 맹점을 파고들어 이득을 취한다던데, 저놈은 설명도 거의 없고 보상이나 페널티조차 숨기는 게 다반사라 뭘 어쩔 수도 없구만.”
물론 로빈이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 * *
지금까지 생산된 ‘언제나! 자신 있게!!’를 대부분 남쪽으로 보내고 며칠이 지나니 황태자가 보낸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
대놓고 완전히 긁어가려는 모양인지 큰 배가 무려 세 척이었다.
중급 마수의 가죽을 대부분 싣고, 남은 공간은 리퉁으로 가득 채우고 난 후, 상급 마수의 가죽은 딱 연구할 수 있을 만큼만 실었다.
어차피 당장 가져가봤자 히센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상급 마수 가죽으로 만든 갑옷에 인챈트를 넣지도 못하기 때문에 굳이 미리 다 보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황도에도 전문가가 즐비하겠지만 마수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마법 공학자가 아니라면 저걸 그렇게 쉽게 인챈트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당장 쓰지도 못할 건데 이렇게 순순히 다 보내주면 또 배가 아프단 말이야. 그 인간이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그럴 수야 있나. 게다가 리아넨 쪽도 생각해야 하고.”
게다가 마수 가죽으로 만든 마법 갑옷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리아넨 공작가와의 관계도 생각해야 했다.
예전에 상급 마수를 사냥하고 그냥 머리만 잘라서 돌아간 리아넨 공작가.
물론 그릭스 대공자가 크게 다쳐서 급히 움직인 거였지만 사실 그 전리품은 다 리아넨 공작가 쪽의 소유였다.
하지만 그때 잡은 상급 마수 칸누라스는 이미 갑옷이나 무기로 변한 지 오래였으니 이게 문제가 되려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들도 이제 와서 그걸 내놓으라고 하진 않겠지만 약간의 성의를 보이는 건 필요하달까?
원작대로 그냥 그렇게 사라질 가문이라면 굳이 그런 걸 신경 쓸 이유도 없었지만 겨우 이런 일로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리아넨 공작가와 신임 리아넨 공작의 마음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리아넨 쪽으로도 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보내 성의를 보일 생각이었다. 그것도 빅 테일로 만든 갑옷과 무기로 말이다.
원래 그때 잡은 그 칸누라스로 만든 갑옷과 무기를 몇 벌 보내주는 게 순리였지만 굳이 황태자 몫으로 남겨놓은 빅 테일을 잘라내 따로 무구를 만들어 보내기로 한 것이다.
“후후. 은근히 기분 나쁠 거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겠지. 원래 이런 게 가장 찝찝한 법이거든.”
자신의 몫을 빼앗긴 거라 은근히 기분 나쁘겠지만 황태자 체면에 그걸 지적하기도 애매해 인상만 찌푸릴 테니 이 정도면 충분히 뒤끝을 보인 거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겨우 이 정도로 황태자를 향한 분노(?)를 가라앉히는 건 무리였지만 더 이상 개기면 괜히 또 얻어맞을 수도 있기에 로빈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게 리아넨 쪽에 보낼 물건을 따로 준비하고 다른 물건들을 실어 보낸 후, 다시 영지 축제와 결혼식 일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 결혼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 시기에 맞춰 이번 결혼식의 유일한 외부 손님인 라이언과 그의 아내가 될 크라우 백작 영애, 릴리아 작센이 게이트를 타고 영지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겸사겸사 상황 내외께 직접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인 거 같았다.
“오, 벌써 오셨어요? 그러니까……. 작센 백작 부인께서도 같이 오셨네요.”
“하하. 잘 있었나?”
“그런데 호위도 없이 두 분만 오신 거예요?”
아무리 게이트를 타고 왔다지만 호위나 시녀들도 전혀 대동하지 않은 건 조금 의외였다.
“게이트를 타고 가족들을 만나러 온 건데 무슨 호위. 그냥 몸만 오면 되는 거지. 이 사람도 딱히 시녀가 필요한 사람은 아니라서.”
“뭐, 그건 그렇지만요.”
라이언이야 원래 그런 사람인 걸 알고 있었지만, 작센 백작 부인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인데 시녀가 필요 없다니.
확실히 황태자가 자신할 만한 성품의 아가씨가 아닌가? 어쨌든 처가에 상당히 괜찮은 여자가 들어온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다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백작, 아니 이제 후작님이시죠. 황녀님은 잘 계시죠? 결혼 전에 꼭 한 번 만나뵙고 싶은데요.”
그래, 이 여자도 은근히 다이앤을 좋아하는 여자였지. 아카데미에서도 엄청 친하게 지냈고. 원래 예쁜 걸 좋아하는 취향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사이가 좋았으니 결혼을 앞둔 다이앤이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네, 잘 있죠. 그럼 우선 어른들께 인사를 올리고 계시겠어요? 나중에 앤과 함께 그쪽으로 찾아뵐게요.”
“어머,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어차피 혼전에 마지막으로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인사를 올리려고 했었다.
상황 내외분뿐만 아니라, 실비아의 부모님과 린의 부모님까지 모두에게 말이다.
* * *
다음 날.
비록 요식 행위에 불과하지만, 어른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전하기로 마음먹은 로빈은 해가 떠오르자마자 바로 모야족 마을을 찾아갔다.
지온과 상황 전하는 영주 성에 계시고 백랑만 모야족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 곳을 먼저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모야족 마을만 방문하고 나면 영주 성에 있는 두 곳은 비교적 늦은 시간까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앤과 나눌 이야기가 많은 릴리아 작센을 위해서도 이 방법이 가장 좋았다.
아무래도 남부와 북부로 나뉘어 살 게 된 두 여자가 다시 만날 기회가 그리 흔하지 않을 거 같아 신경 써서 배려한 것이었다.
“음, 모야족 마을이라. 어떤 의미로는 상황 전하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지.”
“아무래도 다들 나와서 기다리지 않을까? 나도 모야족이긴 하지만 솔직히 무슨 짓을 할지는 잘 모르겠어, 주인.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간들이라서.”
“에이, 그래도 설마 그러겠어요?”
모야족을 잘 모르는 다이앤만 고개를 갸웃거릴 뿐 이미 익숙한 린과 실비아는 평범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그래봤자 쭉 늘어서서 린과 관련된 음담패설을 내뱉는 정도겠지. 그 정도로 놀라지 말자고.”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도착한 모야족 마을 앞에는 저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쭉 늘어선 상태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 크게 놀라지 않았다. 저들이 들고 사정없이 흔드는 저 플래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결혼을 축하하고 빨리 린을 먹으라는 둥의 문구가 쓰여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경축! 결혼! 이제는 아기씨다!]
[한 방에 득남!!]
저런 너무 당연한 문구들 사이에 이상한 놈들이 끼어있었다.
[우리는 빠른 세대교체를 원한다! 어서 아기씨부터!]
[악덕 족장 물러나라!]
[마을은 나 몰라라 하고 밖으로만 나도는 족장은 각성하라!]
백랑을 규탄하는 플래카드가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아니, 대체 얼마나 악독하게 굴렸길래 저 사람들이 저래? 게다가 아이를 낳아도 언제 키워서 족장으로 만들겠다는 건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