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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97화 (197/303)

197화

로빈이 당황하는 사이 저쪽에서 환한 얼굴로 다가오던 백랑.

그리고 일행에게 인사하기 직전,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이제야 저걸 발견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야, 이 미친놈들아. 쪽팔리게 이게 무슨 짓이야!”

“걸렸다. 튀어!”

“잡히는 놈이 덤터기 쓰는 거다? 물고 늘어지기 없음!”

울분에 찬 백랑이 거칠게 외치며 놈들에게 달려들자 녀석들은 플래카드를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마치 미리 그렇게 하기로 계획한 듯 완벽한 도주 경로가 아닐 수 없었다.

“…저게 뭔가요?”

“그러게. 오늘은 또 뭔가 다르네.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인간들이라니까.”

“아우, 창피해.”

그렇게 백랑과 말썽쟁이 전사들이 한바탕 추격전을 벌이는 사이, 로빈과 일행은 모야족 여성들의 안내를 받아 마을 안에 들어섰다.

백랑이 자신에게 반기를 든 전사들을 적당히 어루만져주고 집으로 돌아온 건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아무래도 놈들의 도주 작전도 날쌘 백랑을 따돌리긴 무리였나 보다. 딱 봐도 상당히 두들긴 듯 후련한 얼굴이었으니 말이다.

“흠흠.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잘 왔어, 영주님.”

“영주님, 그간 잘 지내셨지요?”

“네, 잘 지냈죠. 월아 님도 잘 지내셨어요? 무책임한 족장 때문에 월아 님이 항상 고생하시네요.”

“호호. 아니에요. 주인님이야 원래 그런 분이신걸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요.”

…지금 그게 백랑을 두 번 먹이는 말이란 걸 알고 하시는 건가요? 엉뚱한 플래카드로 이미 한 방 먹었거든요?

이제 작은 장모님이 된 월아는 정말 여전했다. 처음 만난 지가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변함없이 곱고 단아하달까?

게다가 사제가 되면서 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푸근하면서도 농염한 분위기까지 더해졌다. 뭔가 알 수 없는 여유까지 느껴졌으니 말이다.

왠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완전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월아의 나이가 대충 30대 중반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느낌만 조금 바뀌었을 뿐 처음 만났던 20대 시절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린과 같이 있으면 그냥 자매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이곳이 적당히만 관리해도 50대까지는 젊음을 유지하는 이상한 곳이라지만 저건 좀 심한 거 같았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어머니인 마리아나 여사도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는 거 같긴 했다. 그보다 연배가 높은 도리아 여사님이나 큰 장모님인 소피아 황비 역시 마찬가지였고.

큰 장모님이야 여신님 파워로 노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은 거라지만, 도리아 여사님은 또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미스터리한 일이랄까?

어쨌든 우리 린나니도 나이가 들면 왠지 저렇게 될 거 같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장모님이 된 월아 님께 인사를 올렸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이제 제가 린을 책임지겠습니다.”

“그래요, 영주님. 정말 감사해요. 혹시 가지고 놀기만 하다가 버리실까 걱정 많았답니다. 그저 거둬 주시는 것만 해도 더 바랄 게 없어요.”

쟤를… 가지고 놀다가 버린다고? 그랬다가는 녀석이 각성해서 저 대검으로 날…….

이곳이라고 치정 살인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가는 사람 안 막는 분위기였지만 개중에 유별난 인간이 없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여자 둘은 분명 그쪽 부류였다.

로빈이 아연해하는 와중에도 월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주인님은 분명 잘될 거라고 하는데 전 걱정이 많았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시간을 끌었죠?”

이건 솔직히 내 잘못이다. 처음에 그런 목적으로 데려간 게 아니다 보니 그쪽으로는 별로 신경 써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정말 악역으로 넘어가지 않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데려간 거였다. 뭐, 결국에는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많이 부족한 아이라서요. 정실이 아닌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래도 귀족의 아내가 되기에는 소양이 많이 부족해요. 섬기는 마음이나, 봉사하는 마음, 그리고 받드는 마음까지 모두 부족해서……. 거기다가 밝히기만 해서 자기 욕심만 차리려고 할 거 같아 지금도 걱정스럽습니다.”

자신의 친모에게 디스(?) 아닌 디스를 당한 린은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자신이 그렇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나 보다.

원래 모야족 여성들은 대부분 그런 걸 미덕으로 삼고 있으니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 역시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린이 기존의 모야족 여성이랑은 많이 다르단 걸 말이다.

하지만 이건 좀 그렇지 않나? 물론 모야족이 원래 그런 부족이긴 하지만 뭔가 좀.

“전 하녀를 구하는 게 아니라 아내를 원하는 거예요. 린은 저와 인생을 함께하기에 충분한 여성입니다. 능력과 외모, 뭐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 월아 님,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어머…….”

물론 성격은 좀……. 그렇지만 그거야 차차 나아지리라 믿는다. 아니면 할 수 없는 거고.

처음에는 너무하다고 생각했던 저 성격도 요즘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거 같았다. 그만큼 잘난 여자였으니 그 정도는 흠도 아니지. 싸움도 잘하고.

어쨌든 내 확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 숙여 감사하는 월아. 내가 린을 끝까지 아껴주리라는 확신을 얻은 모양이다.

옆에서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백랑은 그저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나야 뭐, 더 바랄 게 없지. 잘 살아, 영주님. 너무 구박하지 말고.”

이런 쿨한 남자 같으니라고.

하지만 말은 저래도 제 새끼가 구박당하는 걸 그냥 지켜볼 남자는 아니었다.

하긴 이 남자뿐만 아니라 부족 전체가 린의 친정 식구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거, 반란이 무서워서라도 잘 살아야겠구만.

“걱정하지 마세요. 행복하게 잘 살 테니까요.”

그렇게 두 사람에게 인사 및 결혼 승낙을 받고 마을을 나섰다. 다음에 올 때는 무조건 아기씨를 데려오라는 모야족 사람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말이다.

“주인, 고마워. 내가 더 강해질게.”

내가 월아 앞에서 린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게 제법 감동적이었는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주먹을 굳게 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아니, 결혼하는 거랑 강해지는 게 대체 무슨…….

물론 핀트가 한참 어긋나 있는 다짐이었지만 왠지 린답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짓던 로빈은 그냥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역시 린에게 다정한 신부가 되길 바라는 건 무리인 모양이다.

영주 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실비아의 집에 들렀다.

예전에는 영주 저택에서 같이 살던 지온은 월령이랑 혼인하면서 관저 근처의 작은 집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때부터 실비아는 사실상 우리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계속 영주 저택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실비아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곳까지 찾아온 지온답지 않게 실비아를 지나치게 방치해 왔다. 그 당시에도 제법 어렸던 실비아만 저택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가 살림을 차린 것도 그렇고.

지온은 그녀가 다섯 살 때 저택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나에게 시집보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결혼하는군요. 사실 좀 늦어지는 거 같아 걱정했지만 정실부인과 같은 날 혼례를 치른다니 오히려 이게 더 낫군요.”

첩실이나 2부인을 미리 거두더라도 혼례는 정실부인과만 치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린과 실비아도 충분히 대우받는다고 생각해서인지 지온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옆에 있는 월령 역시 마찬가지였고.

아침에 월아와 인사하고 왔는데 여기에 또 분위기만 다르고 비슷하게 생긴 월령이 앉아있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가 실비아의 친모는 아니지만 뭔가 족보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자매조차 한 남자와 함께 사는 게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뭔가 묘하달까?

하지만 그런 엉뚱한 감상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지온의 기습 공격에 마시던 차를 내뿜을 뻔했기 때문이다.

“영주님이 다섯 살이던 그때가 생각나는군요. 참 영특하시던 분이지만 실비를 바라보던 눈빛이 아주 음흉했습니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하이에나 같았다고 할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실비를 먹어 치우실 거 같았죠.”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소리를. 곡해가 너무 심하잖아. 겨우 다섯 살짜리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말이나 돼?

로빈은 옆에서 “어머어머, 조숙하기도 하셔라.” 하면서 자신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앤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실비가 탐나긴 했었지만 저건 아니지. 세상을 구할 정도로 대단한 재능이라는데 어느 누가 탐내지 않을까?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긴 구차하지만, 단순히 재능이 탐났을 뿐 절대로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귀여운 동생처럼 생각했다는 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리라. 워낙 귀엽긴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실비아가 커서 전염병 치료제를 만들어 재앙을 비켜가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 재앙이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사실이 밝혀진 건 조금 뜻밖이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공이 작은 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최소 몇만의 제국민을 살려낸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만든 혼 래빗 지혈제 역시 훗날 크게 한몫해 줄 것이다. 큐브 포털 안에 들고 들어갈 수 있는 치료제 자체가 매우 희귀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가 만들 수많은 약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실비아를 구한 건 모야족을 품에 안은 것만큼이나 대단한 성과였다. 심지어 그 잘난 아이를 영원히 내 품에 둘 수 있다니 이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옛날의 일이 오해였다고 설명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항상 실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은 믿어야죠. 예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실비를 살린 분이니까요.”

“제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실비아를 아껴주세요. 최소한 3일에 한 번 정도는 꽉 눌러주시고요. 특히 신혼 때는 보X가 마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 네. 그… 노력해 보겠습니다.”

뭔가 진지하게 흘러가는가 싶었는데 월령이 꽉 눌러주라고 말하는 바람에 김이 새버렸다.

거기다가, 흠흠.

이제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식으로 뜬금없이 터져버리면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달까?

네네. 작은 장모님. 힘닿는 데까지 적셔(?)보겠습니다. 아주 그냥 흠~뻑이요.

그렇게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오자 실비아가 옛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나를 놀리듯 다이앤에게 사실을 날조하는 데 솔직히 기가 막힐 정도였다. 내가 이쪽 세계에 와서까지 저런 날조를 당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맞아. 그러고 보니 영주님은 그때부터 아주 음흉했어요. 날 막 끌고 집에 데려가던 것도 그렇고요. 그 박력에 반해버렸다니까.”

“그랬던 거 같아. 꼬맹이 말대로 우리 주인은 그때 더 늠름했지. 나에게 자신을 지킬 정도로 좋은 전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한 것도 그렇고. 집으로 끌고 간 그 박력 넘치는 청혼도 조금 멋있었고.”

박력은 개뿔. 이 녀석들의 기억은 대체 어디까지 왜곡되어 있는 걸까?

내가 언제 날 지킬 전사가 되라고 했어? 여자라도 충분히 최고 전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만 했지.

하여간 어이없는 녀석들이라니까.

“어머, 그렇구나. 역시 보통 남자가 아니었어.”

하지만 다이앤은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에 뭐라고 대꾸하려던 로빈은 그냥 고개를 저으며 포기해 버렸다.

그래,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갖다 놔라. 너희들에게 뭘 바라겠니.

결혼하고 나면 보자고.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 말이야.

어쨌든 이렇게 두 곳을 들르고 남은 곳은 상황 전하 내외분이 기다리는 그곳, 신전 뒤의 작은 집뿐이었다.

* * *

그렇게 로빈과 일행은 마지막 종착지인 상황 전하 내외분을 만나러 신전 뒤쪽에 위치한 작은 집을 찾았다.

작은 집이라도 두 분이 사시기에는 충분히 넓었고, 뒤쪽으로는 하인들이 묵을 별채까지 따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리 허전하진 않았다. 앞에 있는 작은 풀장은 덤이었고.

“사위님, 오셨어요? 오늘 오신다길래 이리 준비해 놓고 기다렸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이 두 분이 앤과 함께 사위님을 모실 분들이구나. 어머, 예쁘기도 하지. 어서 들어와요.”

“큼큼. 어서 오게, 백작. 애… 앤도 어서 오려무나.”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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