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문 앞까지 나와 자신들을 반겨주는 두 분의 모습도 신기했지만, 다이앤을 부르는 장인어른의 떨리는 목소리는 생소하기까지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냉정을 잃지 않고 정국을 주도하던 그 룩센 대제의 대찬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다이앤은 더욱 감격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내게도 무척 생소할 정도였으니 다이앤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했을 것이 분명한 장모님, 소피아 황비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콧노래를 부르며 내 손을 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로빈이 좋아하는 매콤하면서도 얼큰한 향이 풍겨 나왔다.
저게 소피아 황비가 자랑하던 그 영양탕인 모양인데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향 하나만으로 사람을 죽일 기세였다. 오늘은 처가에서 제대로 대접받고 포식할 모양이었다.
“하하, 왔군.”
“오셨어요?”
따로 준비했는지 식당을 꽉 채운 큰 탁자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붉은 스튜가 자리 잡고 있었고, 간소하게 입은 라이언과 릴리아는 다른 음식도 부지런히 식탁으로 날랐다.
가족들만 따로 모이는 모임이라 하인이랑 시녀들까지 뒤로 물린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웃으며 허드렛일을 하는 라이언과 릴리아의 소박한 모습은 조금 신선했다. 역시 귀족이라고 다 허례허식에 절어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밀매까지 결심한 라이언이 허식에 물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릴리아!”
“오, 황녀님도 오셨네요. 잘 지내셨어요?”
“에이, 릴리아. 앤이라고 불러주기로 했잖아요.”
“호호. 그럴까요? 앤, 잘 지내셨죠?”
로빈이 식탁에 차려진 음식, 그리고 잡일 하는 두 사람에게 감탄하는 사이 다이앤이 들어와 릴리아와 하하 호호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뒤이어 소피아 황비와 다른 여자들, 마지막으로 룩센 대제까지 모두 식당에 들어오자 바로 자리를 잡고 식사부터 시작하였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모두 제법 출출했기 때문이다.
상석에 상황 내외가 자리 잡고, 왼쪽에는 나와 다이앤이, 그리고 반대편에는 라이언과 릴리아가 앉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린과 실비아는 두 어른 정면에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은근히 부담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왠지 재미있어서 굳이 자리를 바꿔 주진 않았는데. 아까 나를 그렇게 놀렸으니 한 번쯤은 저런 좌불안석에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발 살려달라는 듯 애탄 눈길로 바라보던 실비아의 그렁그렁한 눈빛 공격을 단호히 거절할 때의 그 쾌감이란.
그게 그렇게 즐거운 걸 보면 역시 나는 그리 대범한 놈이 못 되는 모양이다.
식구들 대부분이 담백하게 먹는 걸 즐기는 편이라 정말 오랜만에 속이 화끈할 정도로 매콤한 탕으로 배를 채우니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결혼 인사드리는 게 목적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실속만 차린 셈이었다.
음식을 준비한 소피아 황비는 맛있게 먹는 나를 그저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고.
역시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할까?
어쨌든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식사가 마무리되자 소피아 황비가 여성들을 다 데리고 자리를 옮겨버렸다.
아무래도 자신들끼리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남자 셋만 따로 남으니 뭔가 어색한 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인지 거실에는 잠시 침묵만 감돌았는데.
“신전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볼 생각이네. 폴 경인가? 예전에 영지의 기사단장으로 일했다는데, 그 친구가 아이들에게 박투를 가르치고 있더군. 나도 어린아이들에게는 단순한 계산이나 역사를 가르쳐볼까 해. 어느 정도 큰 아이들에게는 회계나 행정을 가르치고 말이야.”
“아, 그러세요?”
그러고 보니 상황 어르신은 할아버지인 카인이나 폴 경과 비슷한 연배였다. 하지만 저 어르신이 저렇게 폴 경을 친구라고 부르는 걸 보니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쳐보겠다라.
최악의 자식 농사꾼인 룩센 대제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하니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원래 자기 자식을 가르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 그럭저럭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아이들은 많았고 아이들을 돌볼 사람은 언제나 부족한 법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요즘은 신전 한쪽이 아예 초등학교처럼 되어버려서 더욱 그랬다.
“요즘 국제 정세가 좀 오묘하더군요. 해상 왕국은 전염병 때문인지 조용하고, 남부 연합국도 몸을 사리고 있달까요? 물론 동쪽 유목민들은 지금도 소란을 일으킨다지만 예년처럼 그렇게 거칠진 않은 모양이에요.”
“폭풍 전의 고요 같은 느낌이지. 머지않아 큰일이 일어나는 게 아닐지 모르겠군. 항상 이러다가 무슨 사고가 터지곤 했으니 말이야.”
룩센 대제의 말을 시작으로 그렇게 입이 트이자 이내 국제 정세부터 국내 정치 상황, 심지어 영지에 산재한 문제들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했다.
결혼 인사를 하러 와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로빈은 그저 옆에서 듣기만 했다.
특히 해적들이 설치는 남쪽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점점 궁핍해져 가는 영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라이언의 모습과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 상황 전하의 대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미 정계를 떠났지만, 그 식견만은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머~ 아직도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고 계셨어요? 딱딱하게 그게 뭐예요?”
“흠흠. 남자들이 모이면 뭐, 그렇지.”
“하하. 아닙니다. 재미있었습니다, 장모님.”
그리고 시간이 상당히 지났는지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여성들이 다시 돌아왔고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되어 일행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결혼 인사를 하러 왔는데 그냥 정치 이야기나 나누다가 돌아가게 된 것이다.
“오늘 반가웠다네. 결혼식 때 보세나.”
“네, 늦었지만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그래, 내가 할 말은 예전에 다 했다네. 행복하게 잘 살아주게. 여유가 나면 종종 들르고 말이야.”
“우리 자주 봐요, 사위님.”
그래도 마지막에 떠나기 전에는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었다. 물론 반응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같은 영지에서 살게 되어서 딸이 시집가는 착잡함을 크게 느끼시진 않는 모양이다.
하긴, 원래 아예 다른 영지로 시집가서 거의 만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인 세상이었기에 이 정도는 그냥 같이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자들에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지만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냥 살아가는 데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나?
사실 장모님도 범상치 않은 분이라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계속 말을 돌리는 여자들에게 그걸 캐묻기는 좀 애매했다. 그래서 그냥 이리저리 둘러서 찔러봤는데.
“헤헤. 우리 오빠가 생각보다 더 우람한가 봐요. 릴리가 아주 좋아 죽을 뻔했다네요.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물론 전적으로 그런 건 아니겠지만 경험담도 적당히 나눈 모양이다.
슬쩍 찔러봤을 때 저런 이야기가 나온 걸 보면 말 못 하는 이야기는 저것보다 더 엄청난 게 숨어있는 게 아닐까?
단순히 야한 이야기였으면 그걸 숨길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왠지 더 궁금해졌다. 나중에 다시 영양탕을 얻어먹으러 가서 슬쩍 물어보면 언질이라도 들을 수 있으려나?
물론 영양탕 자체도 끝내줘서 자꾸 방문하고 싶긴 하다만.
오늘의 한 방이 너무 강해서 아무래도 처가에 자주 들를 거 같은데 너무 자주 온다고 귀찮아하시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우리 집과는 또 다른 이런 차분한 분위기도 제법 마음에 들었으니 말이다.
* * *
드디어 결혼식 날이 밝았다.
밤새 잠을 설친 로빈과 여성들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각자 치장을 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이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이야! 주인! 무려 10년을 기다렸어! 각오는 되어있겠지?”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다디단 법이죠, 영주님. 후후.”
린의 외침은 그럭저럭 이해되지만 실비아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정작 오늘 10년도 넘게 잘 키운 열매를 따먹는 건 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말은 오히려 내가 하는 게 옳았다.
“로빈, 멋있게 차려입고 오세요. 그럼 이따 봐요.”
그나마 다이앤만은 정상적인 반응을 보여서 다행이었다. 솔직히 저 둘은 이미 평정심을 잃은 거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 앤. 저 두 모지리들도 잘 챙겨줘. 정신 줄 놓은 거 같으니까.”
“호호. 그럴게요.”
그렇게 여성들을 보낸 후 바로 준비된 옷을 입기 위해 마리아나를 찾았다.
결혼식에 사용될 의상이나 혼전 치장은 전부 마리아나가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로빈의 옷 역시 마리아나가 준비했다는 의미였다.
“음……. 괜찮은 거 같긴 한데 좀 과하지 않아요?”
“어머, 과하긴. 가장 보편적인 턱시도잖니.”
“물론 옷 자체는 그런데…….”
마리아나가 로빈을 위해 준비한 옷은 평범한 스타일의 턱시도.
단정함과 깔끔함을 자랑하는 검은색 턱시도였다.
물론 이 정도였으면 로빈도 군말 없이 입었겠지만, 불행히도 이 옷은 왼쪽 어깨 부분에 금색 수실로 포효하는 사자를 새겨 넣은 것이었다. 그러니 사자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로빈이 탐탁지 않아 할 수밖에.
게다가 그놈의 사자가 또 얼마나 화려한지 자수 장인들이 벼르고 별러 작업한 티가 팍팍 날 정도였다.
“어머, 결혼식이잖니. 이 정도는 입어줘야지. 퍼레이드도 있으니까.”
“하, 그거요. 근데 그걸 진짜 해야 해요?”
“그럼~ 영주의 권위와 위용을 멋지게 보여주렴. 호호.”
“끙.”
이 어깨 위에 사자 문양도 그렇지만 어머니 마리아나는 사자를 너무 좋아한다.
결혼식을 마친 후 마차를 타고 영주 성을 한 바퀴 도는 퍼레이드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때 셔츠를 찢고 안에 입은 미스릴 흉갑에 새겨진 그 멋들어진 사자 문양을 자랑하는 퍼포먼스까지 주문했으니 말이다.
영주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모여준 영지민들에게 그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 한다나?
솔직히 그게 무슨 바보짓인가 싶었지만 하나뿐인 아들이면서 그것도 못 해주냐는 듯한 마리아나의 애처로운 눈짓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걸 대비해 턱시도 안쪽에 그 끔찍한 미스릴 흉갑까지 받쳐 입은 상태였다. 결혼식 직후 바로 퍼레이드가 시작되기 때문에 따로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워낙 잘 만든 작품이라 위에 옷을 걸치는 게 그리 불편하진 않았지만 그런 바보짓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머니의 말대로 영지민들은 제법 좋아할 거 같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마리아나의 주문대로 복장을 갖춰 입은 로빈은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준비된 식장과 주변 상황이 어떤지 살펴보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여성들이 몸치장하는 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적당히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돌아올 계획이었다.
“아무리 린 녀석이라도 오늘은 치마를 입었겠지? 그건 또 은근히 기대된단 말이야. 앤과 실비아는 당연히 예쁠 테고.”
물론 잠시 자리를 비우면서도 이제 자신의 것이 된 세 여성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영지민들에게도 공개된 식장 주변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레이츠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듯 신속하면서도 적극적인 참여였는데 심지어 남자들은 미리 약속된 듯 ‘Greats Forever’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마 자기네들끼리 재미로 맞춰 입은 옷인 모양이다.
“저 미친 단결력, 진짜. 저건 대체 누구 생각이야? 뭔가 병신 같지만……. 저렇게 다 같이 입고 있으니 조금 멋있긴 하네. 옷 만드는 장인들이 늘어나니 저런 것도 가능하군. 저런 거로 소속감을 느낀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지.”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이번 결혼식과 축제의 질서 유지와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루이가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 마음이 불안해지는 모습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영주님.”
“루이 경, 무슨 일이에요?”
“우버 마을에서 체류 중인 이방인이 몇 시간 전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물건을 찾는 척만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게 의심스러워 관찰하고 있던 놈들인데…….”
로빈의 명령대로 우버 마을에 기거하는 존과 그 동생들, 그리고 모야족 전사들은 방문객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