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식을 마치고 신부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로빈은 영지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남았다. 이곳에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있었기 때문에 굳이 관저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상황 전하 내외분은 할아버지 카인의 안내를 받아 저택으로 함께 돌아가셨다. 남자들끼리 의기투합했으니 오늘은 뭔가 거하게 한잔하지 않을까 싶다.
“매부, 난 이만 가보지. 영지에 문제가 생긴 거 같은데 힘내라고. 앤이랑 부모님도 잘 부탁할게.”
“네, 형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시고요.”
“앤이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백작님. 아니, 이제 후작님이시죠. 앤을 잘 부탁할게요.”
“네, 작센 부인.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이언은 확실히 대인배였다. 어제 그 난리가 났는데도 그냥 무덤덤하게 반응했으니 말이다.
원래 아끼는 여동생의 결혼식 날 그런 일을 겪으면 뭐라고 할 만도 한데 전혀 아니었다. 물론 장인어른 역시 그 부분에서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항상 해적들에게 시달리는 작센 백작령에서 생활하는 게 익숙하다 보니 저 정도의 습격은 놀랄 일도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닐까?
만약 진짜 그런 거라면 앤보다 저 작센 백작 부인을 더 걱정해야 할 거 같았다. 하긴, 크라우 백작령도 그리 조용한 곳이 아니니 어쩌면 서로 좋은 짝을 만난 걸지도 모르겠다.
* * *
그렇게 라이언 내외를 보내주고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역시 첫 보고는 사라져버린 그놈의 소식이었다.
로빈이 쉬는 동안 치안대는 밤새 모든 마을을 샅샅이 뒤졌는데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그놈을 발견하는 것에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역시 못 잡았나요?”
“네, 영주님. 모든 마을을 샅샅이 뒤졌는데 아무런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남서부 관문 쪽으로 넘어간 것도 아닌데 사라졌다라…….”
“영지는 넓지만 사람 사는 곳은 정해져 있으니 마을이 아니라면…….”
“황무지 같은 곳에 은신처를 만들어놓고 숨어있는 게 아닐까요?”
모든 영지민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놈이 마을 어딘가에 숨어있는 건 아닌 거 같고 지온의 말대로 마을 밖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찾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보다 살지 않는 곳이 훨씬 넓은 영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놈이 영지를 빠져나가려면 항구를 통해서이거나, 남서쪽 관문을 넘을 수밖에 없었는데.
“놈이 빠져나갈 만한 곳은 어차피 항구나 관문뿐이잖아요? 거길 틀어막고 마을을 계속 순찰하면 어떻게든 덜미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네, 영주님.”
“그럼 축제는 어쩌시겠습니까?”
“축제라…….”
퀘스트가 알려준 놈들의 수뇌부는 다섯.
그리고 그 다섯 중에 하나가 영지에 숨어있는 거였다.
결국 놈들로서는 하나하나가 귀한 인력이란 건데, 마나 폭탄까지 압수당해 더 이상 목적을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 놈이 경거망동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아마 놈은 지금 도망칠 방법만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변장술을 병사들이 그렇게 쉽게 간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덫을 한번 놔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축제는 준비되는 대로 바로 시작하죠. 주민들이 오랫동안 기대한 축제잖아요. 앞으로 다시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안 괜찮을 게 뭐 있겠어요? 만약 놈이 다시 움직이면 그때는 바로 없애버리면 돼요. 축제는 열겠지만 이상한 놈이 영지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걸 주민들에게 알리세요. 뭔가 이상하다 싶은 게 있으면 바로 신고하라고요. 보상금도 두둑하게 거시고요.”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축제는 일종의 미끼였다.
한번 움직여보라고 꼬시는 것.
영지민 모두가 여신을 믿고, 그래서 이방인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는다면 축제라고 방심하고 움직일 놈을 잡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죄 없는 외지인이 신고당해 피해를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축제지만 치안대와 전사들, 기사들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거 잘 아시죠? 덫을 놓는 거니까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해요.”
“네.”
“응, 영주님. 이번에는 전사들을 모조리 풀어서 놈을 잡아볼게.”
“좋아요. 그 건은 그렇게 하고요. 치안대 쪽 안건으로 넘어가죠. 어때요, 가능한가요?”
어제 온종일 놈을 쫓아다녔던 루이가 하루 만에 치안대를 어떻게 뽑을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로빈이 묻는 건 당장 그 정도 수를 늘려도 유지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어제의 논의는 치안대 규모를 늘리겠다는 대전제를 확인하고 그 가능성 유무만을 파악한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질문의 대상 역시 루이가 아니라 지온이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장비가 문제더군요. 당장 여분의 장비가 그 정도로 많은 건 아니라…….”
치안대의 숫자는 대략 500명.
여분의 방어구도 원래 500벌 이상이었다. 하지만 급격히 늘어나는 궁수대 쪽으로 상당수의 방어구가 넘어갔고, 그 후에 어느 정도 벌충되긴 했지만, 여유분을 꽉꽉 채워 놓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방어구가 자주 상하는 것도 아니고, 웬만큼 상하는 정도는 수리해서 쓰는 게 서로에게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벌의 장비는 대충 300벌 정도였다.
“그래요?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가죽도 없잖아요? 황도에 계신 양반이 다 들고 갔으니…….”
일이 공교롭게 되려는지 지금까지 쌓아놨던 가죽을 모조리 털어 보낸 후에 이런 일이 생겼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당연히 당장 쓸 건 빼놓고 보냈을 거다.
“할 수 없죠. 장비 지급은 순차적으로 가고, 선발해서 훈련부터 하는 걸로 해요. 겨우내 잡은 것들은 이제 곧 가공을 마치겠죠? 각 영지에서 모은 게 다 여기로 모일 테니 그쪽에서 물건을 빼야겠네요.”
조금 짜증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선발한 300명에게 장비를 지급하고 그 뒤로 점차 그 수를 늘리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마수를 잡는다고 그 가죽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약간의 가공이 필요하다. 그래서 겨우내 잡은 것들은 가공 문제로 아직 황도에 보내지 못한 것이다. 가공을 마치고 이곳까지 오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물론 황태자에게 어느 정도 양해를 구할 필요는 있지만 안 된다고 하면 그냥 드러누울 생각이었다.
“인원은 우선 모야족 예비 전사들을 생각 중이에요. 그쪽 마을에 직업도 없이 무기만 휘두르는 젊은 녀석들이 제법 많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 녀석들도 뭔가 일을 할 때가 되긴 했어. 언제까지 밥만 축내고 있을 순 없으니.”
백랑은 밥만 축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사실 마을을 지키는 예비 병력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뺄 수 없는 병력이었고.
하지만 시간이 몇 년 지나면서 사정이 조금 변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남성이 전사를 희망하는 모야족인 만큼 식량 사정이 좋아지며 생활이 안정되자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어갔다. 게다가 로빈 또래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그 수 역시 급격히 늘어났고.
젊은 놈들만 봤을 때 두 놈 중 한 놈이 예비 전사인 셈이었으니 거기서 몇백 정도 뺀다고 해도 마을을 지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거기다 슬슬 마을이 좁게 느껴지죠? 이럴 줄 알았으면 풀장 같은 걸 짓지 말고 집이나 더 늘릴 걸 그랬어요. 터가 제법 넓긴 하지만 아이들이 이렇게 빨리 자랄 줄은 몰랐거든요.”
“그럴 수야 있나. 풀장이 없으면 여름을 어떻게 나라고.”
그렇게 성인의 수가 늘어나니 분가해 가정을 꾸리기가 좀 곤란해졌다. 마수들이 계속 공격하는 남쪽 마을의 특성상 요새 밖으로 나가서는 살 수 없었는데 늘어난 모야족을 감당하기에는 요새가 조금 비좁았으니 말이다.
다른 마을로 이주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이 인간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혼 래빗 사육장 옆에 있는 작은 마을에 몇십 가구가 자리 잡은 게 다였을 정도였다.
결국 모두가 남아있길 원한다면 새로 성인이 된 녀석들이 나가는 게 이치에 맞았다.
“그놈들을 영주 성으로 강제 이주시켜야겠군. 대략 500명 정도 보내고, 그 가족들까지 딸려간다고 하면…….”
결국 저렇게 짬(?)에서 밀려 이주하게 되는 건가? 하지만 이제 모야족도 다른 마을에서 섞여 살 때가 되긴 했다.
“거주지는 지온이랑 잘 협의해 보세요. 이번에도 릭스터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네요.”
“네, 영주님. 백랑이랑 잘 협의해서 처리하겠습니다.”
“모야족 쪽에서 일부 충당하고, 나머지는 영지에 공고를 내려 따로 모집할게요. 아, 이번 무투 대회에 병사들이랑 기사들만 나가는 건 아니죠? 그쪽에서도 보충하면 조금 편하겠네요.”
“영지에서 병사가 되려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모으는 건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렇죠? 좀 위험해도 가장 안정적인 직장이니까요.”
말이 좀 이상한가?
하지만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급료도 세고, 대우도 좋고.
사실 마수의 위협은 워낙 익숙해서 그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칼 좀 쓴다는 갓 성인 된 남자들은 아마 대부분 지원하지 않을까 싶다. 저번에 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할 때는 섬세함을 위주로 살펴 여성들이 많이 고용되었으니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칼을 배우는 도장만은 즐비한 곳이라 이쪽으로는 인재 풀이 충분한 편이었다.
“예산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번 분기 수입금의 절반 정도요. 병사들과 가족들이 머물 집을 짓고, 장비를 맞추는 데 그 정도면 충분하겠죠? 남은 건 월봉으로 따로 빼놓으시고요.”
“예.”
“이제 이번 분기 수익금이 들어오잖아요? 혼 래빗 가죽, 그레이트 A 판매 대금, 로열티. 그레이트 V 판매 대금. 그리고 남쪽에 약을 판 돈까지. 그걸 처리할 때 앤을 대동해서 같이하세요. 많이 알려주시고요.”
영지 일 중 재정에 관한 건 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영지가 굴러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이것이었으니 이것만 앤이 담당해도 자신이 영지를 비울 때 제법 수월할 것이다. 일거리가 줄어들어 여유가 생기는 것도 좋은 일이고.
자신뿐만 아니라 재정을 관리하는 지온이나 월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르긴 몰라도 저 부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건 너무 바빠서가 아닐까 싶다.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다른 한쪽에 부담이 가중되기 때문에 차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물론 지금은 아이를 가지기에 별로 좋지 못한 시기지만 관리들의 생활도 조금은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가지는 건 전적으로 그들의 선택이 되어야지, 여건 때문에 미루게 되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었으니까.
좀 늦긴 했지만, 관리들도 점점 더 늘릴 생각이었다.
“우선 가장 급한 치안대 쪽으로 모든 역량을 집중해 주세요. 혹시 다른 안건 있으신가요?”
“다른 사안이라기보다……. 궁수대는 그럼 어떻게 운영하실 생각입니까? 궁수대가 계속 남쪽 요새에만 머무는 건 너무 낭비인 거 같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렇긴 하네요. 백랑, 어떻게 생각하세요?”
궁수대라고 부르는 여궁수들의 집단은 사실 따지고 보면 모야족의 자경단이었다. 영지에 위기가 오면 다 같이 싸우지만, 엄밀히 따지면 백랑의 사병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일은 백랑과 합의를 거치는 게 옳았다.
“솔직히 주는 거 없이 오래 부려 먹긴 했지. 그 여자들을 영주님이 거둬 가면 되지 않을까? 자경단처럼 월봉도 주면서 말이야.”
“그래도 괜찮겠어요?”
“애들이 좋아하겠네. 노처녀들은 시집가기도 좋겠고.”
아, 그게 있었네. 내가 너무 무심했군.
“그럼 그러지 말고, 전역하고 싶어 하는 궁수대는 퇴직금 조로 상당한 금액을 지급해 모야족 요새를 같이 지키고, 영지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만 따로 모아 궁수대를 조직하죠.”
그들이 영지를 위해 일한 게 벌써 10년. 그때 갓 성인이 된 여자들도 결혼할 시기가 상당히 지났다.
현대에서야 커리어 우먼이니 골드 미스니 하면서 경제력 있는 여성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지만 여긴 절대 그런 게 없었으니 제법 속 끓이는 여성들도 있을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별일이 다 있다 보니 그런 소소한 것들을 잊고 살았다.
“아니, 그런 건 미리 좀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솔직히 그 와중에도 결혼할 년들은 알아서 다 했거든. 까놓고 지금까지 못한 애들은 그냥 지들이 못나서 그런 거야. 물론 목돈을 들고 전역하면 결혼하기 더 쉽겠지만 그게 절대적인 건 아니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