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히힛! 고고!”
그렇게 다시 밤은 불타올랐고, 뭔가 예민해져서인지 어제보다 더 거칠게 그녀들을 다루고 말았다. 진짜 이러다가 변태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주… 주인님은 벼… 변태.”
“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바들바들 떨며 한마디를 남기고 장렬히 실신한 실비아.
다른 여자라면 몰라도 실비아에게 저런 말을 듣다니, 정말 기가 막혔다.
자신에게도 분명 부모님의 뜨거운 3P에 흔들리는 동공을 억지로 부여잡고 도망치던 순진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 그런 시기가 있었지’ 하고 가볍게 웃어넘기며 실비아를 떡실신시킬 정도로 급성장하고 말았다.
이건 자신이 변태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 세상이 이상해서 그런 거였다.
* * *
다음 날 아침.
로빈은 이른 아침을 먹고 바로 관저로 뛰어갔다. 밤새 특별한 연락이 없는 걸 봐서는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었을 거 같진 않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서였다.
그리고 통신실에 도착하자 때마침 대수림에서 철수한 백랑에게서 연락이 왔다.
[후. 놓쳤어, 영주님.]
“역시 그런가요?”
예상대로 놈을 어떻게 하진 못한 모양이다. 놈이 결국 도망쳤다는 건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에 많이 놀라진 않았는데 그 과정은 정말 기가 막혔다.
[하, 거의 다 잡았는데 그놈이 케렌튜드의 구역으로 들어가 버렸어.]
“그거라면……. 예전에 말했던 그 재앙급 마수 말하는 거죠?”
[응.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긴 너무 위험해서.]
“하, 그러니까 재앙급 마수가 있는 곳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것도 제 발로? 미치겠네요.”
[웬만하면 꼭 잡고 싶었는데…….]
“아니에요, 백랑. 모야족 전사들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쫓아가지도 못했을 거예요. 놈이 그쪽으로 갔다는 걸 알아낸 것만 해도 큰 소득이에요.”
그냥 대수림을 통과하는 것도 아니고, 재앙급 마수가 있는 곳으로 갔다는 건 생각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놈이 죽으러 간 게 아니라면 그곳을 통과할 비책이 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자연히 로빈의 머릿속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제 대수림 쪽도 계속 주시해야겠네요. 그쪽으로 넘어갔다는 건 다시 넘어올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요? 물론 지금까지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만요.”
[그건 그런데 내부까지는 우리도 어쩔 방법이 없어서.]
“그건 그렇네요. 밖으로 나오는 건 계속 살펴주세요. 물론 당분간은 별문제 없겠지만 경계가 허술해지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요.”
[명심할게, 영주님.]
백랑과의 통신은 끊고 기막힌 상황에 한탄하던 로빈은 놈들의 정체에 다시 한 번 의구심을 느꼈다. 도대체 뭐 하던 놈들인지 이해가 안 가서였다.
천 년간 이곳에서 살아온 자신들도 모르는 재앙급 마수를 피해갈 비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모야족보다 빠르게 대수림을 통과하는 놈이라고?
대체 무슨 괴물인가 싶었다.
놈들은 이미 실비아가 개발 중이라던 마수 퇴치 향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낸 건가?
어쩌면 놈들 다섯 중 하나 정도는 실비아급의 연금술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해상 왕국에 퍼트린 그 전염병도 어떤 놈의 손을 거친 인재였으니 말이다.
“에휴, 그래도 놈이 갔다니 실비의 말처럼 축제는 문제없이 열 수 있겠네. 이것도 보고하긴 해야겠군. 황태자 쪽에서 보면 별 의미 없는 정보겠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
* * *
그레이츠 영지에서 축제가 벌어진 지 열흘 정도 지난 시점.
황태자는 여러 가지 안건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속 편하게 축제까지 벌였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새겨질 수밖에.
“…누구는 열불이 나 죽겠는데, 축제라니. 역시 로빈답군. 아주 맹랑해.”
“선원 쪽을 타고 온 정보라 좀 늦습니다. 지금은 다 끝나고 정상 업무로 돌아갔겠네요.”
“솔직히 그레이츠 후작이야 할 만큼 해주지 않았습니까? 예상보다 더 많은 마수 가죽을 보내왔고, 견본으로 쓸 상급 마수 마법 갑옷까지 보내왔는데요.”
“그걸 보고도 다른 말이 나오니까 문제지. 영지 귀족이야 갑옷을 바꾸면 추가 비용이 드니 그렇다 치지만, 관료 귀족들은 왜 저러는 거야?”
“폭발 사고 때문에 히키시 백작이 잠시 정계를 떠나지 않았습니까? 다음은 자신들이라는 생각에 털을 바짝 세우는 거죠. 그들은 영지도 없어 정계를 떠나면 끈 떨어진 연이잖습니까?”
“흠, 몸을 더 사려야 할 판에 더 앞으로 나선다?”
“전하께서 너무 벼랑 끝으로만 몰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하, 부황께서 정책만 신경 쓰시고 귀족들의 성품을 너무 믿으셨어. 예전에는 부황을 믿고 따르던 충직한 관료들이었는데 어찌 저리되었단 말인가?”
“그게 인간이죠.”
“그래. 그게 인간이야. 그나마 이 건은 이렇게 마무리될 테니 다행이군.”
“전쟁보다는 추가 비용을 지불하는 게 싸다고 생각한 거죠.”
마수 가죽 갑옷을 병사들의 방어구로 차용하는 안건은 그렇게 통과되었다. 제법 반대가 있었지만 로빈이 보낸 물건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그들도 할 말은 없었다.
다만 기사들이 사용할 물건으로는 조금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아 병사들 쪽부터 서서히 늘려 나가기로 했다. 황태자도 이걸 기사들에게 입힐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그렇게 합의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해지면 그들도 저걸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전국에 마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널리 퍼트리겠다는 목적만은 충분히 달성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다음 회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안건은 뭐지?”
“회의보다 황실이나 전하께서 따로 처리해야 할 안건들이 더 급합니다. 남부 연합국 문제는 대충 그렇게 마무리 지으실 생각이잖습니까?”
“그런가?”
“예. 덕분에 보좌관들만 죽어나고 있죠.”
젝트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실소하던 황태자는 짐짓 표정을 굳히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라고 비싼 돈 주고, 장가까지 보내준 거지. 대가를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혹시 결혼을 물러주실 순 없겠죠? 크레톤 공작 각하의 채근이 장난 아니라서요. 진짜 재무부에서 일하면서 전하의 수발을 들게 생겼습니다. 이러다가는 제 명대로 못 살지 싶은데……. 절 과로사로 제거할 생각입니까?”
“그 정도로 사람이 죽진 않는다네. 운명이거니 하며 받아들여. 크레톤 영애는 마음에 들잖아?”
“예. 그거야, 뭐. 사람은 참 좋은데……. 그런데 재무부는 사실 저보다 저 조단 크라우 형씨가 더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왜 굳이 접니까?”
“전 가문을 이어야죠.”
“…차남도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크라우 가문의 장남이 재무부에 있고, 차남이 영지를 이어받으면 너무 권한이 한쪽으로 쏠려버려. 나야 물론 크라우 가문을 믿지만, 세간의 눈도 신경 써야지. 아마 무조건 뒷말이 나올 거야.”
“당장보다 훗날도 중요합니다, 전하. 사람 마음이란 게 한결같은 건 아니니까요.”
대상이 자신의 가문과 그 자신이었지만 크라우 백작 자제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뭐, 그런 것도 있고. 원래 견물생심이라 했으니……. 자, 그래서 크레톤 공작에게 혼나면서도 맡은 일은 잘 처리했겠지?”
“까라면 까야죠. 별수 있습니까?”
젝트가 처리한 일은 주요 도시에 푸시 캣츠의 분점을 내는 일.
토지와 인력을 모두 관리하고 있었기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 상황에서 크레톤 공작이 틈틈이 불러 쪼아대고 있었으니 젝트의 볼멘소리도 결코 과장은 아니었다.
“지방의 영주들이 이걸 받아들이겠습니까? 웬만한 조건이 아니면 이권을 놓지 않으려 할 텐데요.”
“법을 바꿔야지. 언제까지 영주들이 창녀를 끼고 돈을 벌어야겠나? 예전에는 정보 수집의 의미가 강했지만, 요즘은 그런 것도 아니잖아? 목적이 오직 돈이라면 적당히 던져주면 돼.”
“흠, 그래도 반발은 상당할 텐데요.”
“하지만 지금이 적기인 건 사실이죠. 전국에 정보망을 가동하려면 그 정도 거점은 필수적이기도 하니까요.”
“그래. 꼭 필요한 일이야. 몇 년이나 공을 들인 일이니, 반드시 이뤄야겠지. 그나마 부황께서 황도 환락가를 미리 놓으시는 바람에 할 말은 있군 그래. 환락가에 사창을 도입하는 영주들은 윤락가에 기존 세율보다 높은 과세를 허용하고, 자신이 환락가를 직접 운영하는 영주에게는 추가 세금을 받아 모든 영지에 군수 물자 보조금으로 지급한다. 이 정도면 반발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거야. 물론 말이 아예 없을 순 없지만, 황실은 이미 환락가를 포기한 지 오래니 대놓고 반발할 순 없겠지.”
“어차피 돈이 목적이 아니니, 작은 건 포기하실 생각이시군요.”
“그렇지. 오히려 돈이 안 되는 게 좋아. 큰돈이 된다면 개나 소나 달려들 게 아닌가? 저 법안이 통과되면 오히려 영주들이 푸시 캣츠에 찾아와 분점을 내달라고 할지 모르겠군.”
어차피 목적은 돈이 아니라 정보.
전국 단위의 정보망을 구축하기 위해 몇 년이나 투자해 왔기 때문에 황태자로선 자신의 말이 가장 잘 먹힐 시기인 지금 이 일을 꼭 관철할 생각이었다.
“가장 반대할 인사가 리켄 백작이랬나? 그쪽은 당근과 채찍을 교묘하게 사용해 보게. 사창을 허용해도 수익이 별로 줄어들지 않을 거란 걸 강조하면 마지못해 승낙할 거야. 잡음이 끼는 것보다는 사전에 조율하는 게 더 낫겠지.”
“황도에서도 큰 윤락 업소를 운영하는 자이니 아마 그럴 겁니다. 신중하게 대처하겠습니다.”
그렇게 이 안건을 마무리 지으려던 황태자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레이츠 쪽에도 인원을 넣어야겠어. 거기 들어갈 인사들은 더 철저하게 준비하도록. 그들에게 부황의 호위까지 맡길 생각이야.”
“그건 쉽지 않을 텐데요. 거긴 좀 특수한 상황이라 부지조차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레이츠 후작에게 가서 비벼. 이런 일로 갈등 빚는 걸 좋아하는 녀석은 아니니 적당히 수긍할 거야. 마수 가죽의 납품 시기도 늦춘다고 했으니 그 정도는 해주겠지.”
“그건 너무 막무가내 같은데요. 뭐, 어쨌든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좋아.”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사안이 논의되었다.
대규모 치수 사업이나 황실 자금의 사용처, 상단의 수입 배분 같은 중요한 문제부터 시시콜콜한 문제들까지.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골치 아픈 건 해상 왕국의 문제였다.
“전쟁이라……. 그냥 망할 생각인가?”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군요. 당장 내일이라도 공격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게 다 치료 약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놈들이 항구에서 약을 밀수하기도 했나 봅니다.”
“밀수야 언제나 있었지. 그래, 그래서 군의 상황은 어떤데?”
“작센과 크라우의 공조가 완벽합니다. 산발적인 약탈이라면 몰라도 대규모 총공세라면 하루를 넘기기 전에 모두 분쇄될 겁니다.”
“그런데도 그 짓을 하시겠다? 그쪽도 답이 없군. 좋아. 리아누스에 연락해서 크라우와 작센에 군수 물자를 무한정 보급하라고 해. 조셉 공작이 지금까지 쌓아놓은 걸 이 기회에 좀 쓰면 되겠군.”
“예. 전하.”
“이럴 때는 라이언이 내려가 있는 게 또 은근히 안심되는군.”
“사실 황족이라 말은 못 했지만 야전 사령관으로는 최고죠. 그를 작센으로 내려보낸 건 정말 좋은 수였습니다. 그레이츠 그 양반도 은근히 머리를 쓰는 자더군요.”
“그건 아닌데, 뭐랄까……. 수치로 따지면 엉망인 녀석인데 뭔가 이상한 통찰력이 있어. 하여간 좀 그래. 이상한 녀석이지.”
“그 수치란 게 황태자 전하께서 인재를 선별할 때 확인하시는 그 수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마나 제어력만 보통이고 나머지는 다 꽝이거든. 아마 그 녀석은 모든 재능을 외모에 몰빵했을 거야. 물론 그것도 제 부친을 빼닮은 거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남쪽의 상황도 주시하고, 빨리 일을 진행하자고.”
법안을 통과하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가면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느 정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점점 그 정도를 높여가면, 지하에도 자신만의 제국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부황을 중독시키고 황도에서 폭탄을 터트리는 등, 무도한 짓을 벌인 그놈들의 꼬리도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 * *
영지 축제가 성황리에 막을 내린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게 지났다.
그때의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힌 영지민들은 이제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로빈 역시 마찬가지, 다시 본업인 영주로 돌아와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제 대충 모집이 마무리된 치안대의 구성과 장비에 대한 결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제법 재미있었지. 한참 놀고 나니 역시 일이 안 되는군. 아직도 그때의 그 열광적인 분위기가 머릿속에 남아있어.”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