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그런데 하루 만에 큐브가 폭발해 영지가 날아갔다는데 그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로빈은 그 뒤에 무슨 음모가 숨어있을 거라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마수 갑옷이 늦어지니 의도적으로 게이트를 폭발시켜 외부에서 잡으려고 했다?”
“녹색 게이트 몇 개를 클리어하면서 자신감이 붙은 모양입니다. 사실 중부의 영지면 자체 방위력도 상당한 곳이죠.”
“외부에서 잡으면 아르마늄 갑옷을 사용할 수 있지. 아마 그걸 생각한 게 아닐까?”
“하긴, 녹색 큐브만 떠올리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그 영주 딴에는 나름 머리를 썼다.
우선 녹색 큐브 중급을 강제로 폭발시켰다. 자세한 설명은 나와있지 않지만, 사형수 같은 놈을 강제로 밀어 넣는 방법을 쓴 거 같았다. 내부에서 인원이 전멸하면 큐브가 강제로 오픈되니 말이다.
현재 황제와 로빈이 가장 신경 쓰는 것도 흑막이 저런 방법으로 무차별적으로 큐브를 폭발시키는 것이니까.
그렇게 녹색 큐브를 하나 정리했는데 할 만했던 모양이다.
중부의 영지면 루이의 말처럼 군비에 나름 충실한 곳이고 아르마늄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면 저 정도 자신감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귀족 놈이 생각 없이 노란색 큐브, 그것도 고랭크 큐브를 건드린 거였다.
“튀어나온 건……. 오우거, 50여 기. 영지를 파괴하고 옆 영지로 이동, 옆 영지까지 반파시켰다? 이거 괴물의 명칭은 어떻게 된 건가요?”
“황실에서 따로 명칭과 모양을 상세히 그려놓은 책자를 발간했습니다. 여기 이거, 북부 각 영지로 배포해 달라는군요.”
“오우거면 Y-A 등급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놈이네. 그 영주가 Y-A를 폭발시켰나 본데?”
“와, 황실 클래스 진짜……. 이걸 하루 만에…….”
게이트로 넘어온 책자를 받아들고 내용을 살펴보던 로빈은 코볼트, 고블린, 오크, 리자드맨, 트롤, 오우거 등등. 자신이 알고 있던 몬스터가 총망라된 책자 내용에 감탄만 흘러나왔다. 이걸 하루 만에 조사해 발간한 황실의 저력이 새삼 놀라워서였다.
“그런데 이 이름은 또 어떻게 지은 거지?”
“보상으로 나온 아이템의 이름으로 유추했답니다. 그 왜, 오늘 나온 오크 가죽처럼…….”
“아아, 그러네요.”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제멋대로 행동하며 큐브를 폭발시키다니. 정말 세상에는 X신이 너무 많았다.
“황제 폐하와 친위대, 그리고 리아넨 공작 쪽 정예 기사들도 다 그쪽으로 투입했다고요?”
오우거라면 게임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에서 전투력 측정기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놈들이지만 이곳에서는 그 기세가 제법 대단했다. 공격 마법이나 오러 블레이드가 있는 세상은 아니라 놈들의 두꺼운 가죽을 순수하게 검으로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무기에 걸린 보조 마법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놈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심지어 놈들은 인간을 처먹고 처음보다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런 놈이 무려 50여 마리.
확실히 황제가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큐브가 터지면 내부에서 상대했던 놈들보다 월등히 많은 수가 튀어나온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고 나니 참 난감했다. 친절한 만큼 그걸 지키지 못했을 때의 후폭풍도 굉장한 거 같았다.
“그쪽은 어차피 황제 폐하가 어떻게 해야 일이고, 문제는 북부인데. 어디가, 어떻게 된 건가요?”
“미네 남작가 쪽에서 Y-C급 큐브가 폭발, 상대는 리자드맨 180마리 정도. 주민들과 용병, 영지 전력까지 모두 영주 성에서 농성 중. 그레이츠 쪽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길 권고한다. 여기까지가 황실에서 넘어온 전언이군요.”
“미네 남작가면… 대수림 바로 아래에 있는 영지네요.”
미네 남작가라면 예전 마수 범람 때도 제법 피해를 보았고, 용병들을 보낸 고위 귀족 때문에도 손해를 입었던 비운의 영지였다. 물론 그 후에 황실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대수림 쪽으로는 제법 건실한 성벽을 올리긴 했지만 말이다.
다만 전투 경험도 제법 있는 양반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큐브가 터졌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거긴 또 왜 터졌대요? 일부러 터트린 건가요?”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말로는 Y-C가 그렇게 높은 등급인지는 몰랐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Y-C가 Y-E보다 높은 등급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게 그럴 수가… 있구나. 하지만 녹색 큐브만 상대해 봐도 대충 알 만한……. 아, 그건 결국 그냥 핑계네요. 대놓고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고 실토할 순 없으니.”
전생의 발전된 세상에서 살 당시 온갖 매체를 접했던 로빈에게는 E부터 A로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진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이 큐브 포털을 상대해 봤던 황제 역시 그건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저 큐브를 딱 맞닥뜨렸을 때 Y-E와 Y-C 중 어느 것이 더 높은 등급의 큐브인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곳은 저런 식으로 등급을 나누는 시스템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좀 황당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현대에서는 하다못해 학점이라도 A, B, C로 등급을 매기지만 여긴 그런 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녹색 큐브를 상대해 본 이상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그 정도는 계산할 수 있었을 거다. 딱 봐도 가장 아래쪽에 있는 고블린 같은 놈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놀이나 오크 같은 녀석들이 나왔을 테니 말이다.
다만 미네 남작이 그런 식으로 항변하면 그걸 미리 고지하지 않은 황실에서도 딱히 뭐라고 징치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도 처음뿐이고 이번 일을 겪은 황제가 알아서 조율할 테니 앞으로는 이런 식의 핑계가 통하진 않을 것이다.
“큐브가 터진 마을은 완파됐고, 주민들은 수천도 넘게 살육당했습니다. 그나마 마수를 잡기 위해 모여든 용병들이 있어서 일부 주민들을 영주 성까지 살려올 수 있었고, 신속히 대처한 덕분에 영주 성 주변의 주민들은 성까지 대피할 수 있었답니다.”
“영 틀려먹은 양반은 아니네요. 최소한 할 건 해줬으니. 그런 양반이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요?”
“미네 남작령은 황제 폐하가 마수 갑옷을 지원해 준 곳 중 하납니다. 제법 전투 경험도 있었으니, 자신감이 화를 부른 게 아닐지.”
“일리가 있는 예측이네요. 미네 남작령이면……. 우리가 손 놓고 있기도 애매한 위치군요. 말로 달리면 하루도 안 걸리는 곳이고, 미네 남작령에서 영지 한 군데만 거치면 바로 우리 영지잖아요? 이건 뭐, 가서 구해주라는 명령보다 더 무섭네요.”
“네,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 같군요.”
큐브에서 튀어나온 놈들은 각자 저마다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행동하곤 한다.
그러니까 오우거 같은 놈들은 무작정 주변을 배회하며 인간을 살육하는 것에 집중하는 데 비해 리자드맨은 자신들의 영토를 확보하고 거기서 수를 늘리며 부족을 확장했다.
물론 오크처럼 인간을 납치해 강제로 임신시키는 성향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인간이 먹이인 건 마찬가지라 주변에 리자드맨의 본거지가 생겨나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주변에 인간이 잔뜩 모인 성이 있으니, 놈들은 그걸 분쇄하고 거기에 부락을 차리려고 할 거예요. 확실히 운이 좋긴 하네요. 그나마 리자드맨이라서 빨리 출발하면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출동 인원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확실히 그게 좀 문제긴 하네요. 대수림에 들어가 가죽을 채취할 전사들, 북쪽 방벽을 방어할 기본 병력에다가 영지의 큐브들을 제거할 병력과 예비 병력까지 남겨놔야 하는데, 솔직히 밖으로 나온 Y-C 놈들이 그리 만만할 거 같지 않아요.”
“영주님, 그냥 정예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우리 쪽 노란색 큐브들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빨리 처리하고 오면 시간은 충분하지. 강해도 기껏해야 180 정도라니 전투는 하루도 안 걸릴 거잖아?”
“확실히 그렇네요. 아무래도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이런 장기 소모전에서 한 명의 기사라도 잃으면 그건 그거대로 손해였다. 그러니 무조건 압도적인 전력을 이끌고 가야 하는 건데.
“모야족 전사단 150, 기사단 정예만 50, 그리고 앞 열을 막아줄 방패병 100에 궁수 200까지. 총 500명이 출동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다 몰려가고 싶은데 그건 역시 무리네요.”
“응, 영주님. 바로 준비할게.”
“궁수들은 최정예만 엄선해 주세요. 월연처럼 활과 검까지 모두 쓸 수 있는 분들로요. 루이도 방패병 인선에 신경 써주시고요. 린도 마찬가지야.”
“네.”
“응, 주인.”
궁수를 많이 대동하는 건 영지 전력에서 궁수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아서였다. 대수림 내부로 들어가는 전사들, 그리고 영지의 큐브를 상대한다고 했을 때 가장 비효율적인 병력이 바로 궁수들이었으니까.
북부 관문을 지키는 걸 제외하고는 궁수들이 의미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개활지에서 공성하고 있는 리자드맨을 상대한다면 그래도 궁수의 효용이 상당할 거 같았다. 어차피 남아있어 봤자 크게 활약할 일 없는 궁수들이 화살을 날려 한 마리만 잡아줘도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마수용 강철 시를 제대로 사용해 보겠네요. 아직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은 없죠? 마수 뼈 화살도 그렇고요.”
“네, 아무래도…….”
궁수 전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은 예전부터 꾸준히 연구되어 온 과제였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루터카우 각궁 역시 그 연구 성과 중 하나였고.
그 뒤로 연구된 게 통짜 철을 사용한 강철 화살과 마수 뼈로 만든 화살인데 요즘 들어 마수들의 대규모 습격은 뜸한 편이라 굳이 사용할 일이 없었다. 뭔가 해보기도 전에 전사들이 득달같이 달려가 모두 썰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용해 보면 앞으로 계속 생산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또 개량해야 할지 결론이 나올 거 같았다.
병력을 추릴 각 부대의 수장들이 모두 자기 일을 처리하기 위해 떠나자 로빈은 지온에게 앞으로의 일을 지시했다.
“우선, 히센 님께는 미스릴과 마수 가죽, 그리고 이번에 큐브에서 나온 오크 가죽의 연관성을 좀 조사해 보라고 하세요. 미스릴도 큐브 내부에서 멀쩡했는데,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가장 먼저 지시한 건 바로 미스릴이나 장비에 대한 의문점 해결이었다.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외에는 모두 영지 안전에 대한 당부였다. 물론 기존에 계획했던 대로 비전투 인원들도 2차 각성을 할 수 있게 유도해 달란 지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큐브는 녹색부터 차근차근 정리하세요. 남은 기사들에게는 노란색 E급 정도는 처리하게 맡겨도 좋아요. 그리고 비전투 인원들 있잖아요? 가족들이나, 알버스 원로와 흑마법사들, 그리고 히센. 또 사제님들까지 지원자를 받아 큐브에 입장시켜 주세요. 물론 권고인데 웬만하면 꼭 스킬을 얻을 수 있게 잘 설명해 주시고요.”
“네.”
“방법은 아실 거라 믿어요. 10인 큐브에 9인의 병사들과 한 명의 비전투 인원, 이런 식이에요. 이 정도면 작은 문제조차 생길 여지가 없겠죠? 최대한 안전하게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리고 노파심으로 말씀드리는데, 절대 Y-C 이상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특히 기사단 쪽에 정확히 주지시키세요.”
기껏해야 4~5일 정도면 해결될 일이라 무슨 큰일이야 있겠냐마는 그래도 영지의 최정예를 모두 대동하고 나서는 원행이라 자꾸 신경 쓰였다. 만약 그사이에 문제라도 생기면 남의 집 구하러 갔다가 자기 곳간이 털리는 격이었으니 말이다.
사안이 급했기 때문에 병력 구성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문제는 가장 먼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전사들인데, 그 인간들은 체력이 워낙 좋아 밤새 말을 달려도 거뜬했다. 백랑의 연락을 받은 흑웅이 빠르게 인선을 마치고 영주 성으로 우선 출발시키는 것으로 시간을 많이 아끼기도 했고.
의외로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린 건 궁수들.
동원되는 수가 제법 많아서 그런지 인원을 선발하는 데 제법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렇게 병력이 출발 준비가 된 건 날이 밝아올 무렵이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주민들도 모두 영지군이 출정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리고 당연히 실비아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영주님, 보급 물자로 물약도 챙기는 게 좋겠어요. 상대가 무슨 도마뱀 인간이라는데 후각이 발달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기습하려는 거면 신경 써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놈들의 후각에 우리의 체향이 발각당한다면 우리가 진용을 갖추기도 전에 칼끝을 돌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뭐든지 변수가 될 만한 건 하나라도 줄이는 게 옳았다.
그렇게 물자를 추가하는 중 의외의 인물이 다가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