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바로 줄리에타 성녀와 사제들.
게다가 그들도 전장에 합류하길 요청하고 있었다.
“급하게 소식을 전해 들었답니다, 영주님. 인간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괴물들을 상대하는데 영지의 귀한 분들이 많이 상할까 걱정되어서요. 혹시 가능하면 사제들을 합류시킬 수 있을까요?”
“아, 사제님들을요? 이걸 어쩐다…….”
물론 한 큐에 밀어버리고 돌아올 생각이지만 부상자를 생각하지 않을 순 없었다. 만약 사제들이 합류한다면 그 부분은 안심할 수 있었고.
다만 전장에 전투 능력이 전혀 없는 사제들을 합류시키는 게 옳은 건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로빈은 그녀들도 합류시키기로 했다. 상대가 수천 대군도 아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시키면 그곳까지 새진 않을 거라는 계산이 있어서였다.
자신이 청한 것도 아니고 상대가 스스로 나선 것인데 이런 보험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영지 일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교단의 마음 씀씀이는 항상 감사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줄리에타 성녀님. 안 그래도 다른 영지에 진출해 있는 사제님들 때문에 신경 쓰이는 일이 많으실 텐데.”
“저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그레이츠 영지가 굳건해야 저희 자매들도 더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지 않겠어요?”
“딴에는 그렇군요. 그리고 지온이 전할 텐데 사제님들 중에 생각 있으신 분들은, 아니 웬만하면 모든 분이 큐브에 들어가 여신님의 새로운 은총을 받으시면 좋겠군요. 이러저래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가요? 여신님의 뜻을 받드는 영주님의 생각이 그렇다면 저희도 따르겠어요.”
여신상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래, 교단은 언제나 로빈과 영지에 우호적이었다. 물론 그만큼 영지민들도 교단에 우호적이었지만 말이다.
이 협력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어 나갈 거 같았다. 영주인 로빈이 여신의 보은 타이틀을 달고 있고, 영지민이 교단을 믿는 한 영원히 말이다.
사제들의 수는 총 스무 명.
사제들은 승마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아 비교적 몸이 가벼운 궁수대와 같은 말을 타고 출발하기로 했다.
전사들이 나서서 사제들을 태우고 가겠다는 뜻을 은근히 내비쳤지만 장난하러 가는 게 아니라 바로 거절했다. 가뜩이나 무거운 전사들의 말에 사제까지 합세하면 진군 속도가 느려지거나 말이 빠르게 지칠 수도 있어서였다.
저 나긋나긋한 사제들을 앞에 태우고 가고 싶어 하는 전사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친놈들, 이 와중에 엉뚱한 생각한 새끼들은 일 마치면 보자. 아무 데서나 떡 치자고 껄떡대는 건, 뭐 그렇다 치지만 적어도 똥오줌은 가려야지?”
하지만 백랑은 이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이해는 하지만 저걸 방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기강은 각 단체의 장이 알아서 잡을 거라 믿고 전사단과 기사단에 굳이 터치하지 않았던, 건데 어쩌면 자신이 너무 무른 걸지도 모르겠다.
영주 성을 떠나려는데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떻게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거 같았다.
이런 이른 시간에 왜 저렇게 많이 나와있는 건지, 사람들 참.
하지만 이게 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영주를 비롯한 병력이 대거 영지를 떠나는데도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주민들은 영지의 전력과 영주인 제 판단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거 같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거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도 그 신뢰를 저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 왜 갑자기 비까지 내리고 지랄이냐.”
기분 좋은 것도 잠시, 말을 몰고 영주 성을 나서는 순간부터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놈들이 늪지에 익숙한 리자드맨인 걸 생각하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늦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비가 내리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게 또 하필 오늘이라니. 이게 대세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 * *
말을 달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드라나 남작령.
그레이츠에서 남서쪽 관문을 넘어 두 시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가장 가까운 영지였다.
이곳에서 문제가 터지면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로빈도 영지의 분위기를 주의 깊게 살피며 지나갔다. 물론 병력을 이끌고 지나가는 거라 영주 성까지 들어가진 못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분위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큐브가 많은 거 같은데. 여기 인구가 우리 영지랑 비슷하다고 했던가?”
“네, 영주님. 말씀을 들어보니…….”
비록 영지 외곽을 거쳐 지나오긴 했지만 그사이에 눈으로 확인한 큐브만 벌써 20개였다. 만약 저 비율대로 큐브가 존재한다면 영지 전역에는 적어도 200개는 넘을 거고.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드라나 남작령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활동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게다가 주민들의 표정도 제법 어두웠다. 이건 영주가 제대로 영지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생각보다 피곤할지도 모르겠네. 우리 이웃이 영…….”
우선 급한 일을 해결한 후에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 거 같았다.
새벽부터 말을 달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자 미네 남작령 근처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내린 비는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이제는 아예 쏟아붓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악재.
게다가 그냥 지나가는 비도 아니라 한동안은 계속 내릴 거로 생각하니 가슴이 좀 답답해졌다.
우선 미네 남작령 근처에 자리를 잡고 식사부터 마쳤다. 메뉴는 당연히 군용품인 혼 래빗 육포.
외부에서 이걸 먹는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예전에 대수림에서 한 번 먹고 이 맛에 반한 리아넨 공작이 다시 구해오라고 성화를 부렸다더니 집 안에서 먹는 것과는 확실히 그 느낌이 달랐으니까.
영지의 병력이 출진할 때도 비교적 괜찮은 걸 먹는 거 같아 마음이 놓였다. 보고로 전해 듣는 것과 직접 경험한 건 의미가 조금 달랐으니 말이다.
육포를 뜯으면서 전투의 양상에 대하여 논의했다. 영지에 들어서면 이걸 따로 언급할 여유가 없을 거 같아서였다.
“진영은 평소대로라고 생각하면 돼요. 전열에 방패병이 놈들의 기세를 잡을 거고, 충돌 후 바로 전사들과 기사들이 포위, 난입하는 겁니다. 궁수들은 조금 뒤에서 놈들이 이곳까지 접근할 때 최대한 피해를 누적시키고요.”
영지의 전력이 마수를 상대할 때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방법.
하지만 따지고 보면 놈들도 마수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마수들보다야 지능이 높겠지만 저돌적이라는 것만큼은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충돌 후, 궁수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건 상황에 따라서 조금 다를 거 같아요. 만약 전열의 방패병이 충분히 적을 막아내면 궁수들은 빠지거나 대기하면 될 텐데, 문제는 전열의 방패병이 놈들에게 속절없이 밀릴 때예요.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검을 들고 놈들의 틈을 노려야겠죠.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방패병이 밀리기 시작하면 놈들의 전진을 저지하기 위해 궁수들도 그곳에 합류해야 했다.
그걸 대비해 검도 잘 다루는 예비 여전사에 여전사들까지 포함된 병력을 뽑은 거지만 그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일의 흐름이 어찌 될지 확신할 순 없으니 사전에 정해놓을 필요는 있었다.
“역시 주공인 전사들과 기사들이 얼마나 놈들을 몰아치느냐가 중요하겠네요. 백랑, 린. 잘할 수 있죠?”
“걱정 마, 주인. 도마뱀 따위, 다 썰어버리겠어.”
“영주님, 저런 거 잡는 데는 또 우리가 알아주지 않겠어? 마수 놈들도 반 이상은 도마뱀 비슷한 놈들이라고.”
“그래요. 믿을게요. 듀발은 선두에서 방패병들을 통솔하도록 해. 넌 그게 편하지? 난 뒤에서 궁수들과 함께 있을 테니 호위는 필요 없을 거야.”
“네, 영주님. 조심하십시오.”
듀발은 큐브에서 상급 방패술을 얻었다. 이 녀석은 끝까지 방패로 살아가야 할 운명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걸 원했고, 방패병도 듀발을 잘 따라서 그들을 통솔하는 건 듀발이 가장 적합했다. 나중에 루이가 치안대를 떠나게 되면 듀발이 그 뒤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도 했고.
작전 회의까지 마친 그레이츠군은 다시 말을 몰아 미네 영지의 영주 성 근처까지 접근했다. 오는 길에 본 마을이 문제의 시발점인지 완전히 파괴되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접근해 은은한 전운이 느껴지는 곳까지 도달한 로빈은 말에서 내려 전열을 가다듬었다.
“진영을 잡아야 하니 말은 여기서 보관하는 게 나을 거 같네요. 사제님들도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네, 영주님. 아무쪼록 무탈하게 승리하시길.”
황량한 들판에 비까지 내리는데 사제들을 그냥 방치하는 셈이지만 주변에 어떠한 위험도 느껴지지 않아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평소라면 최소한의 호위 병력을 남기겠지만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제법 신경이 예민해져서였다.
물론 사제들도 지금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불만인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그저 고개 숙여 승리를 기원하며 여신님께 기도할 뿐이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영지병은 서둘러 영주 성 쪽으로 진격했다. 저 멀리에서 성벽을 기어오르는 리자드맨과 놈들을 떨어트리려고 발악하는 미네 남작령 병사들이 보였다.
이제 전투가 시작된 지 만 하루.
180마리 정도라던 리자드맨의 수는 거의 줄지 않은 거 같았다.
하지만 성벽 아래에는 인간들의 시체가 즐비했고, 그 모습만 봐도 전장의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시체 더미에는 영주 성으로 들어가지 못한 주민들의 시체와 밖으로 요격해 싸우던 용병이나 병사들의 시체가 뒤엉켜 있는 거 같았는데 어쨌든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 저게 무슨 리자드맨이냐? 미치겠네.”
항상 주인공에게 좋은 경험치 공급원이 되어주는 오크와 리자드맨.
하지만 2미터도 넘는 체격에 두꺼운 비늘로 무장한 저 흉측한 놈들을 보면서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단순히 리자드맨이라는 사실과 숫자가 180마리쯤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가볍게 생각하지 않은 게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저놈들을 모조리 사냥해야 했다.
“월연, 시작하세요.”
로빈의 명을 받은 월연이 손으로 수신호를 날렸고, 궁수들이 일제히 각궁을 틀어쥐었다.
루터카우 각궁.
일반적으로 각궁은 합성 궁으로 크기가 작고 탄성이 좋은 게 장점이었다.
그러나 그건 소의 뿔로 만든 것이나 그렇고 이 루터카우의 각궁은 우선 크기부터가 좀 달랐다. 소와 루터카우는 기본적으로 체급이 달랐으니 말이다.
그만큼 시위를 당기는 데 많은 힘이 필요했고, 궁수들은 시위를 당길 때마다 마나를 사용해 온 힘을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쏘아대는 강철 화살은 중급 마수의 가죽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자랑했다.
“쏴!”
100명의 궁수가 놈들에게 조준하고, 월연의 신호에 맞춰 시위를 놓았다. 평소 같으면 기합과 함께 화살을 날려 보낼 테지만 상대가 아직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 최대한 은밀하게 화살을 날린 것이다.
전방에 버티고 있는 성벽에 집중하느라 뒤쪽을 신경 쓰지 못한 건지 아니면 실비아의 말대로 냄새를 완전히 없애주는 특제 섹스 보조제가 그 효과를 발휘한 건지, 놈들은 화살을 놓을 때까지 우리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수백 미터가 넘는 루터카우 각궁의 월등한 유효사거리 덕을 톡톡히 본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몇 년이나 연습한 궁수들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월연이 노린 대로 후방에 위치한 놈들을 고슴도치처럼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통으로 맞고 머리가 꿰뚫린 한둘을 제외하고는 몸에 화살이 꽂힌 채 괴성을 지르며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역시 화살 몇 방 정도로는 답이 없나? 하긴 그랬으면 하루 동안 놈들의 숫자를 저렇게 줄이지 못했을 리도 없지.”
놈들은 위에서 창을 내지르고 떨어트려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 성벽을 기어오르곤 했다.
그런 것만 봐도 상당한 재생력을 갖춘 건 분명했으니 화살 한두 대 맞는다고 전투 불능이 될 거 같진 않았다. 처음에 맞은 놈처럼 재수 없이 머리를 직격당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각자, 놈들의 머리를 노려! 한 방에 날려버린다!!”
월연 역시 로빈과 같은 생각인지 놈들에게 개별적인 사격을 퍼부으라고 명령했다. 일점사해 봤자 큰 효과가 없으니 개별적으로 정밀 사격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슝! 슝~
수백 미터라고 해봤자 놈들이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십수 초.
그리고 궁수들은 그 짧은 시간에 정신을 집중해 놈들의 머리를 노리고 시위를 놓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