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키약!!”
대부분 놈들의 몸통에 적중하거나 빗나갔지만 몇 발의 화살은 정확히 적중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놈들의 미간을 꿰뚫고 머리에 박혀 들어갔다.
그렇게 나자빠진 놈들의 수는 총 아홉 마리, 처음 사격으로 두 마리를 제거한 것까지 합치면 열한 마리 정도를 처리한 셈이었다.
“공짜로 열한 마리라. 이 정도면 괜찮은 건가?”
처치한 것만 열한 마리에, 달려드는 놈들의 기세를 죽인 것으로 만족한 로빈은 흉악한 놈들의 모습에 가슴이 떨렸지만 애써 참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방패 들어!!”
“핫!!”
“핫!!”
“윽!! 버텨!!”
듀발의 통솔에 일제히 방패를 올려든 방패병은 달려드는 놈들을 일차적으로 저지했다.
무게만 해도 수백 킬로는 족히 넘을 놈들의 흉포한 돌진.
엄청난 충격으로 일부가 나뒹굴었지만 어떻게든 대열을 지키며 잘 버텨낸 것이다.
2차 각성으로 방패와 관련된 패시브를 얻은 인물 위주로 방패병을 구성하겠다더니 정말 기대 이상의 선전이었다. 그 중심에는 온몸의 마나를 쥐어짜 선두로 달려오던 놈을 빗겨 날려버린 듀발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의 충돌로 방패병들에게 가로막힌 놈들이 주춤하자, 뒤에 대기하던 200명의 전력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월연, 전사들만 이끌고 가서 방패병을 보조하세요. 다친 사람들은 어떻게든 뒤로 빼내시고요.”
궁수대에 포함된 여전사들의 수는 대략 스물.
무너진 방패병의 대열로 접근해 부상자 몇을 빼내고 빈자리를 채우기에 충분한 수였다. 방패병이 첫 타격을 잘 버텨냈기 때문에 궁수대가 따로 지원 나갈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 손실이 최대한 적은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사실 저 수준의 싸움에서는 전사가 아닌 궁수들이 끼어봤자 괜히 폐만 끼칠 가능성이 컸다.
“아 씨, 뭐가 보여야 상황을 알지.”
지금까지는 성벽 위에서 방어하거나 단상을 따로 설치해 놓은 상태에서 전투를 치렀지만, 오늘은 그런 게 아니라 전황을 살필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로빈에게 다가온 궁수들은…….
“응? 뭐 하는 거예요?”
“지휘관이신데 전황을 살피셔야죠. 이런 거라도 도울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무려 몸으로 단상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대체 뭔가 싶어 당황하던 로빈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모야족 예비 여전사의 대답에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 그냥 말을 타고 있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가 놈들이 접근을 알아챘다면…….”
폭우와 약발로 체향이 완전히 지워지다시피 한 병력에 비해 한나절 이상 뛰어온 말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만약 로빈만이라도 말을 타고 지켜보려 했다면 지금보다 더 빨리 자신들의 접근을 들켰을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급조한 간이 단상이 완성되고 이래도 될까, 고민하던 로빈도 주저하며 성인 한 명 정도 높이에 위치한 꼭대기로 올라갔다.
마나를 사용할 줄 알고 튼튼한 모야족이라도 여성들의 몸 위에 이렇게 올라온다는 건 정말 난감한 일이었지만 전황의 흐름이 어떤지 너무 궁금해 어쩔 수 없었다.
기껏해야 몸이 1~2미터 정도 위로 올라간 것에 불과한 인간 단상이지만 로빈의 탁월한 시야와 합쳐지니 생각보다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상황을 보니 한 덩어리로 뭉쳐 돌격한 리자드맨의 1차 충돌을 방패병이 버텨낸 후, 영지의 기사들이 사방을 조여 들어갔고, 놈들은 기사들에게 포위된 형국이었다.
방진을 구성하는 것보다 개별적인 전투를 즐기는 모야족 전사들을 위주로 구성한 것도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는지 전사들은 난전에서도 훌륭히 제 몫을 다해주고 있었고.
전사들이 주변에서 날뛰자 놈들도 정면에 집중하지 못했고, 덕분에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방패병이 놈들을 저지하는 것도 부담을 많이 덜었다.
다만 그런데도 놈들을 쓰러트리는 건 쉽지 않았다. 탁월한 힘과 스피드, 그리고 재생력까지 겸비한데다 난폭하고 저돌적인 성향 때문에 웬만한 상처로는 전투 의지를 꺾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저곳 전사들의 도끼로 상처를 입어도 놈들은 더 거칠게 반응할 뿐이었다.
“하, 저래서는 온종일 싸워야 할 거 같은데. 그러면 인간만 지치는 거고. 원래 저런 거야? 아니면 인간들을 처먹고 저만큼 강해진 거야?”
로빈이 한탄하는 사이, 좌우에서 상황을 살피던 린과 백랑이 본격적으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걸 기점으로 전장의 분위기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린의 목표는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녀석이었다. 다른 놈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온몸에 두꺼운 비늘을 두른 녀석은 얼굴 한쪽에 긴 상처가 나있었다.
딱 봐도 두목 포스랄까?
처음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인간을 먹고 한 단계 올라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저놈인 것만은 확실했다.
놈은 린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같잖다는 듯 두꺼운 몽둥이를 휘둘러 한 방에 날려버리려 했다.
그녀의 머리를 부숴 버릴 듯 강렬하게 날아드는 몽둥이.
하지만 로빈의 눈에는 저 몽둥이가 허무하게 빗나가는 장면이 훤히 내다보였다. 린이 움직이는 방향과 근육의 움직임으로 그녀의 행동이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왼발, 급제동, 방향 전환, 오른쪽 옆구리…….”
몽둥이가 머리를 후려치기 직전, 왼발을 박차고 오른쪽으로 파고든 린은 대검으로 놈의 옆구리에 길게 칼침을 먹인 후, 다시 반대편으로 뛰어들어 놈의 시선을 교란했다.
그야말로 번개 같은 움직임.
패시브 스킬로 더 강력해진 린이 마나를 쥐어짜 단기 결전에 나서자 육안으로는 그 몸놀림을 쉽게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친! 뭐가 이렇게 질겨?”
그렇게 좌우를 번갈아가며 놈에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치명적인 타격을 주진 못했다. 놈의 두꺼운 비늘에 막혀 내부까지 검을 밀어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놈의 성질을 돋우는 게 목적이라면 충분히 달성한 것 같지만 저래서야 답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린은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계속 놈을 몰아쳤다.
“어? 설마……. 저래서 저렇게 하는 거였어?”
놈들은 명백히 군집형 몬스터고 그런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군대처럼 움직인다. 실제로도 모두 한 몸처럼 이쪽으로 몰려오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화살에 맞지도 않은 놈들까지 이쪽으로 몰려나온 건 지휘관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지휘관이 지금 린과 드잡이질하고 있는 것이다.
린이 대장을 물고 늘어지자 유기적이던 놈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반면 전사들은 백랑의 직관적인 명령하에 두세 명이 한 마리를 포위해 놈들의 숫자를 줄여 나갔다. 놈들보다 숫자가 많다는 점을 백분 활용하면서 말이다.
대장이 멀쩡할 때는 놈들도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포위 공격을 막아냈지만, 지금은 그저 본능적으로만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저렇게 되면 시간만 끌어도 유리하겠어. 역시 잔뼈가 굵은 양반이라니까. 하지만 린 혼자서 저걸 버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차라리 저놈을 상대하는 린 쪽에 다른 전사를 추가로 붙이는 게 더 안전해 보였지만 백랑의 판단은 린을 놈과 맞대결시키는 거였다.
뭔가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만 로빈으로서는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서서 뭐라고 다른 명령을 내리진 않았다. 비록 전체적인 전략은 자신이 세웠지만, 저 전장의 일선 지휘관은 백랑이었고, 자신은 그저 믿고 지켜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만 린과 놈의 일진일퇴를 지켜보는 건 가슴을 조여오는 일이었다.
마음을 졸이던 로빈은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린 말고 놈에게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놈을 관찰해 뭔가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잠시 관찰하자 놈의 움직임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 그리고 저 두꺼운 비늘 사이의 좁은 틈이 배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웬만한 도검으로는 큰 상처조차 줄 수 없는 단단한 비늘이지만, 저곳이라면 충분히 꿰뚫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바로 상처 입은 놈의 머리를 공격하면?
충분히 놈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리기도 전에 린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아래쪽으로 파고든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 몸을 띄운 놈은 큰 동작으로 몽둥이를 내려찍었다. 태클하듯 파고드는 그녀에게는 위협적인 공격이지만 동작이 너무 커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수법이었다.
그리고 린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피한 후 놈의 목줄을 향해 대검을 날렸다.
“안 돼! 꼬리! 꼬리를 피해!!”
하지만 놈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로빈은 그게 함정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린이 목줄로 뛰어드는 순간 그놈의 꼬리, 린의 허리보다 더 두꺼운 꼬리가 채찍처럼 그녀에게 휘둘러졌기 때문이다.
로빈의 외침이 들렸던 걸까?
놈의 목줄만 보고 파고들던 린은 순간 몸을 비틀어 대검을 회수했고, 바로 다른 손으로 검 면을 받쳐 날아드는 꼬리를 가까스로 막아냈다.
하지만 공중에 몸을 띄워 놈의 목줄로 파고드는 상황이라 뒤쪽으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야. 이 X발, 도마뱀 새끼야!”
하지만 상대는 야성의 린.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닌지 벌떡 일어나 욕지기를 내뱉으며 다시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빈은 린이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머리 말고 그냥 배를 노려!”
놈들에게 가장 유효한 공격은 당연히 머리를 바로 날려버리는 것.
하지만 그러려면 지금처럼 몸을 날리거나 놈에게 밀착해야 했다. 놈의 체고가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놈의 공격에 어느 정도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에는 그나마 연약한 배를 노려 1차 타격을 넣은 후, 다시 머리를 노리는 게 현명해 보였다.
린 역시 로빈의 외침에서 그 뜻을 읽었는지 무리해서 머리를 노리지 않고 다른 곳부터 차근차근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 살 떨리네. 저렇게 움직임이 다 보이는데 막상 난 싸우지도 못하다니. 이게 무슨 진주 목걸이냐고. 돼지가 따로 없네, 진짜.”
로빈은 물론 싸움을 좋아하지도 않고, 솔직히 무섭기도 했다. 현대인으로 살다 이런 야만스러운 세상에 떨어졌으니 그 부분에 쉽게 적응할 수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니 자신의 무능력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린과 호흡을 맞출 수만 있어도 저놈을 더 효율적으로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로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왼손! 오른쪽으로 몽둥이! 오른발 스텝! 꼬리 왼쪽!!”
자신이 예측할 수 있는 놈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린에게 전하는 것으로 말이다.
거리가 제법 있어 큰 소리로 외치느라 목이 쉴 지경이었지만 안 하면 답답해 죽을 거 같았다. 그리고 그런 외침이 효과가 있었는지 꼬리가 돌아가고 생긴 빈틈을 파고든 린이 놈의 배 깊숙이 대검을 박아 넣었다.
“크악!!”
이번에는 정말 치명적인 공격이 들어갔는지 거칠게 괴성을 지르던 놈은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다 선 채로 축 늘어졌다.
마치 그대로 절명한 듯한 그런 움직임이었다.
“히힛! 잡았다!!”
놈을 잡고 희희낙락하며 대검을 다시 뽑아내려는 린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로빈은 순간 놈의 손끝이 꿈틀거리는 걸 발견하고 거칠게 외쳤다.
“아직이야! 방심하지 마!!”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끝났다고 마음 놓고 있던 린을 향해 입을 벌리고 덮쳐오는 놈.
이번만은 린도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크악!!”
“어설퍼!”
그 긴박한 순간, 언제 접근했는지 갑자기 나타난 백랑이 도끼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린을 집어삼킬 듯 덮쳐오던 놈의 몸통만 그녀 위로 포개지듯 허물어졌고 말이다.
“딸, 그래서야 어디 영주님을 지켜낼 수 있겠어?”
“씨!”
놈이 죽은 척하다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린을 노릴 때는 정말 가슴 한쪽이 서늘했다. 그리고 백랑이 등장해 놈을 날려버린 후에야 로빈은 겨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는데.
린이 대장을 상대하는 사이 영지의 용맹한 전사들이 놈들을 하나둘씩 정리해 이제는 완전 소강상태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그래서 백랑도 린을 도우러 달려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사제님들부터 빨리.”
하지만 영지의 전사들도 멀쩡하진 않았다. 크고 작은 부상, 심지어 사지 중 한쪽이 날아가 버린 전사들도 있었다.
다친 전사들을 보니 린의 무사함에 올라갔던 텐션이 다시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이 정도 수준의 전사들로 저렇게 악전고투라니. 수백의 중급 마수를 상대해도 저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 분명 한 번에 처리하려고 최정예를 이끌고 온 건데, Y-C 큐브에 이 정도라고?”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