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하하, 그건 그렇네요. 큐브는 계속 토벌해야 하니, 마나석도 많이 늘겠죠.”
미네 남작령의 영주 성은 그리 부유한 곳이 아니었다. 애초에 미네 남작령은 농사로 연명하는 곳이고 최근에야 마수 가죽 때문에 부쩍 늘어난 외지인을 상대할 가게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이대로 계속 갔으면 규모를 조금 키울 수 있었는데 이번 난리로 된서리를 맞았으니 앞으로의 운영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곳을 쓱 훑어보는데 문득 예전에 대수림에서 살 때가 생각나더라고. 정말 지지리 궁상이었거든. 특히 마수 놈들이 나타난 그 8년은 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그랬나요?”
“그렇지. 진짜 열 받는 건 전사들이 싸우다 죽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식량을 구하려고 움직이던 주민들이 놈들에게 물려갔을 때야. 사방은 숲이지, 우린 뒤도 없는데 그렇다고 굶고 있을 순 없잖아?”
“그렇네요.”
분명 그랬을 거다. 마수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나마 살 만하던 곳이 마수들 때문에 살지 못하는 곳으로 변했으니 얼마나 화가 나고 답답했을까?
그리고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로빈도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만약 영지에서 혼 래빗을 키우지 않았으면 우리도 저렇게 곤란했겠구나. 매년 식량을 걱정하고, 기사들이 죽어 나갔겠구나. 이런 생각이요.”
“하긴 그렇네. 솔직히 그냥 잡아먹겠다고 몇 마리 잡아온 건데 그게 그렇게까지 될지 누가 알았겠어?”
“예전에 그걸 키울 생각은 못 하셨나요? 대수림 안에서 살 때요.”
“에이, 그게 될 리가 있나. 대수림 안에 그런 사육장을 만들면 마수가 들끓어서 부족민들이 다 죽었을걸? 놈들이 혼 래빗을 엄청나게 좋아하잖아? 짜식들이 맛있는 건 알아가지고 참…….”
“그건 그렇네요. 매일매일 습격 때문에…….”
그렇게 백랑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로빈은 90도도 넘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남자의 모습에 뜬금없이 이게 뭔가 싶었다.
“그레이트 후작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늘 용병단의 라달입니다.”
“아, 그래요.”
덥수룩한 머리의 넉살 좋은 이 녀석은 하늘 용병단이라는 용병단의 단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녀석의 설명을 들으니 대충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 용병단은 마을에서 빈둥대던 청년들이 마수 사냥을 위해 모인 용병단이었는데, 그래도 마수가 종종 나오는 미네 영지에서 마을 자경단 격으로 어깨에 힘 좀 주던 녀석들이 모인 곳이라 마수를 잡는 실력은 제법 괜찮았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중급 마수를 사냥할 정도는 아니지만, 영지의 기사들을 보조해 놈들을 유인하고 처리하는 건 제법이라고 할까? 젊다 못해 어린 남자들이 모인 곳이라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유망한 녀석들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하늘 용병단 단원들이 이번 리자드맨 습격으로 제법 큰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그레이츠 영지의 전사들이었다. 용병단이 다 죽었다 싶은 순간 그레이츠의 전사들이 들이닥쳐 놈들을 다 끌고 가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몸을 회복시켜 준 것도 미네 영지의 부상자들까지 돌보는 봉사의 교단 사제들이니 이렇게 로빈에게 찾아와 따로 감사 인사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때의 그 긴박한 순간을 절묘하게 묘사하는데 이 녀석이 생각보다 말재주가 있는지 제법 실감 나고 흥미진진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용병단의 최후였다.
영주 성에 머물던 용병단 몇이 마수도 아닌 리자드맨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치기 위해 성주 성을 나섰다고 한다.
하지만 영주 성을 나서자마자 달려드는 놈들에게 걸려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다시 도망쳐왔고, 이미 닫힌 성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놈들에게 다 죽었다는 것이다.
“허, 완전 개죽음이네요. 차라리 영주 성에 남았으면…….”
“역시 살려고 머리 쓰는 놈들이 가장 먼저 죽는다니까.”
물론 일이 공교롭게 되었지만 사실 마수를 잡으러 온 용병이라고 생각하면 도망친 그들이 정상적인 거고 남은 하늘 용병단이 좀 이상한 거였다. 굳이 남의 영지를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 용병단은 미네 영지 출신인가요?”
“네, 사실 저희야 뭐, 어디 갈 데도 없죠. 죽으나 사나 영지를 지켜야 할 팔자랄까요? 하하.”
어쩐지 용병인 주제에 왜 영지에 남았나 했더니 이곳 출신이라면 이해가 갔다.
성향도 중도.
자유롭고 계산적인 용병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성향이었고, 병력이 상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미네 영지 입장에서는 저들의 합류도 반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인가요?”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마수 가죽이 잘 팔리니 어떻게든 마수를 잡을 생각입니다. 용병은 돈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어야죠.”
“그렇죠, 용병은 돈이죠.”
다시 인사하고 떠나는 라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영지 출신 용병단은 그나마 영지를 맡겨볼 만하겠네. 물론 다른 용병단도 계약으로 묶으면 불가능도 아니지만, 최고는 영지 출신이지.”
“영주님,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저희도 영지에 따로 큐브만 처리하는 용병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응? 굳이 그럴 거 있어? 어차피 치안대로 충분할 거 같은데. 높은 놈들은 전사들이나 기사들을 쓰면 되고.”
“물론 충분하죠. 하지만 백랑, 계절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은 여름이니 병력이 남지만, 겨울에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저희 영지는 겨울이 아주 바쁘잖아요?”
“흠…….”
“큐브 놈들은 매일매일 늘어나고, 앞으로 더 빨리 늘어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마수라도 쏟아져 나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실 올겨울부터 간당간당하죠.”
“간당간당하다니?”
“저번 마수 범람에서 벌써 10년이 지났어요. 빅 웨이브는 아니겠지만 이제 곧 제법 쏟아져 나올 시기란 거죠. 그때 가서 허겁지겁 큐브 처리반을 모으는 것보다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치안대 녀석들도 원래 큐브를 처리하자고 뽑은 건 아니잖아요? 다 큐브에 신경 쓰고 있을 때 저번처럼 쓸데없는 놈들이 들어오면 그건 그거대로 낭패죠.”
“미리미리 준비한다라……. 그건 그렇네.”
“적어도 녹색 큐브는 다 다른 쪽으로 돌린 후, 영지군은 노란 것만 상대하고, 치안대는 그 큐브에 들어가는 인원들만 체크하는 게 괜찮을 거 같네요. 뭐,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 그런 식으로 흘러가겠지만요.”
한동안 백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로빈은 미네 남작의 저택으로 돌아와 같이 저녁 만찬을 즐겼다.
그래도 후작을 눌러 앉힌 게 미안해 초대한 것이라 제법 신경 쓴 듯한 만찬이었는데 성의는 엿보이지만 그렇다고 과한 정도는 아니라 로빈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미네 남작은 빈약한 상차림이라며 민망해하는 분위기였지만 사실 집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간소하게 먹는 편이라 충분히 대접받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그 대가라고 하기는 뭐 하지만 로빈도 오늘 영지를 살펴보며 느낀 점과 앞으로 큐브를 어떻게 관리하게 될지 등등, 그가 아는 바를 진지하게 설명해 주었다.
무슨 특별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고 전생에서 그가 봤던 레이드물과 이 세계에 오기 직전까지 읽은 이 소설에서 제국이 어떤 식으로 큐브를 관리하게 되는지를 가볍게 설명한 것에 불과하지만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던 미네 남작은 뭔가 느끼는 바가 많아 보였다.
특히 병력이 부족하면 정예병만 육성하는 형태로 진행하고 낮은 등급의 큐브는 영지 출신 용병단이나 평판 괜찮은 용병단을 찾아 장기 계약으로 묶어버리라는 조언과, 큐브의 위치와 등급만 조사하는 관리를 따로 두는 게 편할 거라는 조언은 제법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로빈의 입장에서 조언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였고, 미네 남작도 더 이상 뭔가를 바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부디 앞으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이번에 제법 크게 데였으니 최대한 조심하긴 할 거 같았다.
* * *
그렇게 다시 하루를 더 묵고 밤이 되었을 때, 미네 남작을 통해 황제와 연락할 수 있었다. 중부에서 문제를 일으킨 몬스터 토벌이 그럭저럭 마무리된 모양이다.
[고맙군, 그레이츠 후작. 북부까지 지원 나가기는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중부 쪽은 잘 정리되었나요?”
[그래. 하지만 생각보다 기사들이 많이 상했네. 밖으로 나온 오우거 놈들은 정말 장난 아니더군.]
“그런가요? 하긴 리자드맨도 Y-C 주제에 상당했습니다. 정예 전사들이 많이 다쳤거든요.”
[그런가? 우선 미네 남작령 이야기를 하자면, 내일쯤 근위대 300이 그쪽에 도착할 거야. 병력을 더 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그거면 그럭저럭 당장 연명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겠지. 난리가 난 곳이 한두 곳이 아니라 그 이상은 좀 힘들어.]
“상황이 많이 안 좋은가요?”
[그나마 북부는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네. 5대 방벽 쪽은 후작이 책임져주고 있고, 북부인은 기질 자체가 강인한 편이라 그런지 큐브에 들어가서 몬스터를 잡는 데 거침이 없어서 말이야. 물론 가끔은 그 기질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건 후작이 잘 잡아줄 거라 믿네.]
“예, 뭐…….”
[남부에도 두 곳, 동부 쪽도 한 곳, 그리고 황도 근처에서도 하나가 터졌어. 하루 만에 네 곳이라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지. 남부는 리아누스 후작이, 동부는 레오니스 공작이 지원해 주고 있지만, 마무리는 아무래도 황군이 해야 한단 말이야.]
변화가 일어나면 어쨌든 적응하는 데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이 정도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착착 순조롭게 진행될 리가 있나.
그나마 다행인 건 황실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리아누스가, 동쪽으로는 레오니스가, 중앙에는 리아넨이, 그리고 북쪽으로는 그레이츠가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도와 서쪽을 황제가 직접 관리한다고 했을 때, 각 지방을 대영주가 지원해 주면 최소한의 피해로 조금씩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레이츠를 대영지라고 하긴 그렇지만 군사력만은 대영지랑 비슷하니 저 대열에 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고.
“그런가요? 난감한 일이군요.”
[그래도 이런 소식이 각 영지에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생각이 있는 인사라면 더 조심하겠지.]
“그런데 그 사고들이 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건가요?”
[야료는 없었어. 대부분 영주의 운영 미숙이었으니까. 나도 많이 의심했는데 들어보니 그냥 별거 아니라는 생각에 무모하게 공략하다 사고가 터졌더군. 동부의 라카시 남작은 기사는 한 명만 넣고 나머지는 병사로 충당해 공략하려 하기도 했고.]
“…그래요?”
[물론 그건 특별한 경우고, 대부분 기사들이 호승심을 부려 일을 그르친 경우가 많았네. 기사란 족속들은 영주랑 생각하는 게 완전 다르지. 자네도 기사들을 잘 단속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거야.]
“에이,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역시 인생은 트롤(?)과의 싸움이라고 했던가. 초반이라 그런지 정말 가관이었다.
[그리고……. 아니군. 이 일은 내 따로 연락하도록 하지. 어쨌든 마지막까지 잘 부탁하네. 북쪽도 잘 부탁하고.]
“예, 폐하. 부디 조심하십시오.”
[후작도 무운을 비네.]
전국을 직접 누비고 있는 황제를 생각하니 자신이 이곳에서 며칠 지내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참, 일 복 터지는 양반이라니까.
그나저나 내일 벌써 지원군이 도착한다라.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본격적인 행보였다.
황태자 페리안이 황제로 즉위하고, 정적이 전무한 상황에서 일이 터져 제국의 저력을 한곳에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가능한 거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소설에서처럼 제국 전역이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버렸겠지.
어쨌든 이제 로빈은 내일 도착할 지원병을 기다렸다가 영지로 돌아가기만 하면 될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지원병이 도착했다.
황실 근위대 50과 황태자가 키운 병력 250.
이들이 1년간 미네 영지에 머물면서 상황 정리를 돕기로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이지만, 적어도 그 시간이 지나면 큐브 체제에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을 테니 문제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영지 관리에 집중하세요, 남작. 전 그냥 제가 할 일을 한 것이니까요.”
“그래도 어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