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영원히 기억해 주면 좋지. 북부에 친그레이츠 성향의 귀족 하나가 더 늘어나는 건데 나쁠 게 뭐 있겠어?
황제의 지원은 예상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지원금 역시 상당했고.
역시 이런 일에 돈을 아낄 황제가 아니라 그런지 이 돈이면 미네 영지가 1년을 보내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제국의 재화가 상당수 모이는 곳이 황도고, 황실이야말로 제국 최고의 갑부였으니 마음먹고 지원하자고 하면 망한 지방 영지 몇을 본 궤도로 올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황실과 비빌 만한 곳이 있다면 리아넨 공작가 정도?
지금까지 마나석으로 부를 쌓은 리아넨 공작가라면 황실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부를 자랑한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그쪽에서 자신과 사업을 시작한 것도 돈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공으로 대공자 그릭스의 입지를 세우고 조셉 공작에게 한 방 먹이려는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원래는 지카스가 결국 가문을 말아먹지만 놈은 이미 사라졌고, 마나석 폭락을 대비해 마법 공학자들도 모아놨으니 그쪽도 탄탄대로겠군. 역시 리아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잘한 건가? 만약 중부가 흔들렸으면… 제법 피곤했겠지?”
“영주님, 준비 끝났어.”
“좋아요! 빨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미네 남작과 작별 인사를 건네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백랑이 찾아와 출발 준비가 마무리되었다고 알려왔다.
밖으로 나와 늘어선 전사들을 쓱 훑어보는 로빈.
몸을 모두 회복하고 다시 출발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도열한 전사들에게 간단하게 한마디하고 말에 오른 로빈은 가벼운 마음으로 영지로 출발했다.
출발하는 날 비가 쏟아지던 것에 비해 오늘은 그저 화창하기만 했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 시즌에 들어간 건 아니었으니 그날만 특별히 많은 비가 내린 거 같았다.
“하, 장마라……. 그게 있었지. 황제 폐하가 알아서 했겠지만… 올여름을 가볍게 넘기진 못하겠네. 제국이 제법 시끄럽겠어.”
지금도 난리인데 홍수까지 난다고 생각하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로빈이 뭔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남부의 농경지가 어느 정도 침수될 걸 예상하며 영지의 식량을 계산할 뿐이었다. 결국 그마저도 이미 몇 년 전부터 비축해 놓은 곡식이 충분해 그냥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마무리되었지만 말이다.
* * *
“오! 도착했어!”
온종일 말을 달려 저녁 무렵에는 영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야말로 스위트 홈.
하지만 영지 내 분위기가 어딘가 좀 무거운 게 묘하게 껄끄러웠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우선 지친 전사들을 해산한 로빈은 바로 관저로 가 지온을 찾았다. 어제도 영지의 사정을 보고받았지만 뭔가 묘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오셨습니까, 영주님.”
“그래요, 지온. 먼저 경과보고부터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지온이 준비한 몇 장의 서류를 살펴보았다.
현재 영지 내 위치한 큐브는 녹색 111개, 노란색 28개, 파란색 하나, 붉은색 하나.
총 141개였다.
꾸준히 제거 작업에 나섰지만 크게 줄어들지 않은 걸 보면 그만큼 계속 생겨나고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 소설에서도 로빈이 읽었던 부분까지는 큐브가 줄어들지 않고 꾸준히 늘어나기만 했다. 그러니 아마 최소 몇 년은 이런 추세가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처리하기 번거로운 붉은 놈이랑 파란 놈이 더 늘어나지 않은 게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영주님의 말씀대로 많은 분들을 추가로 참석시켜 큐브를 공략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도 각성을 하긴 했는데 조금 애매한 경우가 많더군요. 전투적인 측면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게 대부분이라…….”
“그렇겠죠. 한번 볼까요?”
큐브를 공략한 비전투 인원들이 제법 많이 2차 각성을 겪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살펴보니 역시 자신의 가족들은 대부분 꽝이었다.
물론 재미있긴 했다. 어머니 마리아나의 가사, 할아버지 카인의 낚시는 정말 이런 게 왜 스킬로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으니까.
그나마 유효한 건 작은 어머니 세릴의 단검술.
전직 기사인 작은어머니가 왜 이런 걸 각성했나 생각해 보니 결혼한 이후에는 식칼과 과도만 다뤄서 그런 거 같았다. 이것도 은근히 신기했다.
하지만 가장 신기한 건 역시 아버지 윌리엄이었다. 그가 각성한 스킬은 무려 금손이었으니까.
여기도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 금손 스킬은 이름 그대로 금손이었다.
그림, 조각, 기타 등등 손으로 하는 예술 활동에 크게 도움 되는 섬세한 손놀림? 어쨌든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인상적인 건 비고란에 적혀있는 내용이었는데 저 금손 스킬 덕분에 부부 사이가 더 돈독해졌단다.
저게 그러니까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데만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애무할 때도 엄청나다나? 손짓 한 번에 질질이라는데, 이건 대체 무슨 소린지…….
굳이 이걸 비고에 올려놓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애무 스킬이 좋아지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원체 사이가 좋은 분들이지만 여기서 더 사이가 좋아지게 생겼으니 말이다.
정말 권태기 따위는 없는 커플들이었다.
물론 세이라는 당연히 전투 스킬을 각성했다.
이름하여 섀도 댄서.
이건 딱 봐도 움직임에 보정을 받는 스타일의 특별한 스킬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로빈도 이쯤에서는 저 재능충 녀석을 슬슬 전투 인원으로 편성해야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가족들은 그렇게 넘어가고, 정말 의미 있는 건 역시 연구진의 스킬 각성이었다.
히센의 마법 공학자 친구들, 그리고 흑마법사들은 대부분 큐브의 재료들을 연구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스킬을 부여받았다.
이제 저들이 큐브에서 드롭한 잡동사니로부터 이런저런 물건을 만들어 문명을 더 발전시키고, 큐브에게서 더 안전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진짜배기는 영지에서 오랫동안 같이 지낸 히센이나 도리아, 알버스 그리고 실비아였다.
히센은 좀 재미있는 걸 얻었는데 그건 바로 이계 연구라는 스킬이었다.
말 그대로 다른 차원의 물건을 연구하는 뭐 그런 거 같은데, 거기에 큐브에서 나온 모든 것이 다 포함되는지 다른 생산 스킬보다 전문성은 좀 떨어지지만 범용성만은 최고였다.
그리고 그 연구 대상에는 당연히 언어도 포함되어 있어 이곳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문서들을 해석할 수 있었다.
지금은 며칠 사이에 큐브에서 얻은 몇 가지 문서를 해석하고 있다나?
확실히 솔깃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알버스는 특이하게도 의학 부문의 연구가 아니라 회복 스킬에 가까운 걸 각성했다. 스킬명은 전투 회복술인데, ‘힐!’이라고 외치면 상대가 회복되는 속 편한 건 아니지만 야전 치료사처럼 여러 가지 의학적 응급 처치로 빠르게 상대를 회복시키는 스킬이었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라 그럴 일은 드물겠지만, 큐브가 장기전 형태로 이어진다면 제법 의미가 있는 스킬이 될 거 같았다.
물론 패시브 형태의 스킬이라 현역에서 물러났던 알버스 원로가 다시 치료사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 실비아.
이 녀석은 역시 대단했다. 이번에 얻은 연금 여제의 조합식은 그녀의 타이틀이 연금 여제임을 생각했을 때 로빈의 눈처럼 고유 스킬임이 분명했다. 자신만의 독특한 연급 조합을 이제 큐브에서 나온 재료로 새롭게 구상할 수 있게 된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이 녀석이 또 무슨 골 때리는 걸 연구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가장 효과적인 스킬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도리아 여사.
이분이 얻은 건 조금 당황스러웠다. 로빈조차 이건 대체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으니 말이다.
그녀가 얻은 스킬은 신물질 발견이라는 스킬이었다.
메커니즘은 큐브에서 나온 것들을 분석해 무슨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는 거 같았는데 물질학에서만은 최고 권위자라는 그녀에게 상당히 잘 어울리는 스킬이긴 했다.
다만 이게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우선 시간이 지나봐야 그 효용성을 판단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거 진짜 나중에는 큐브 내에서 마법을 난사하는 마법사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겠는걸. 마법 공학자 중에 그쪽으로 연구하던 놈이 없다고 장담할 순 없으니 말이야.”
물론 소설에서 읽은 부분까지는 그런 특별한 마법사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니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가지 사안을 살펴보고 있는데 옆에서 대기하던 지온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로빈은 뭔가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에서 오늘 보고할 사안 중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저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사실…….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문제요? 무슨 문제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그러니까…….”
며칠간 로빈의 지시대로 큐브를 처리하던 기사들.
하지만 오늘 기사 무리 중 하나가 사고를 쳤단다. 윗선에서 허락하지 않은 Y-A급 큐브를 공략하러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요?”
로빈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거워지자 지온의 태도도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Y-A U10 큐브에 등장한 놈들은 트롤이라는 대형 괴물이었는데 가까스로 마무리했다는군요. 일곱이 들어가 둘이 죽고 나머지 기사들도 대부분 빈사 상태로 지금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신전에서 적어도 3주 이상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그야말로 죽다 살았군요. 영지 하나를 통째로 날려 먹을 뻔했고요.”
정상적인 상태에서 터져도 심각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Y-A급 큐브.
Y-C급 큐브가 터져 리자드맨이 설친 미네 영지를 생각했을 때 정예가 빠져나간 영지에서 그게 터졌으면 그 결과가 어땠을지 눈에 선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로빈은 우선 그 이유부터 확인했다.
“무슨 생각이었답니까?”
“기사들의 요청이 거세 Y-C까지는 처리해도 된다고 맡겼는데 그 정도는 싱겁다며 더 높은 큐브를 노린 모양입니다.”
“결국 호승심인가요? 명령 불복종에 영지를 날려 먹을 뻔한 호승심……. 그것도 U10에 일곱 명만 들어갔다라…….”
정예들과 미네 영지에서 큐브를 클리어해 보고 지금 영지에 남은 기사들이라도 Y-C까지는 무난할 거라는 결론을 얻은 로빈은 그날 저녁에 지온에게 연락해 기사들의 한계치를 Y-C까지로 재조정했다.
딴에는 약한 놈들하고만 싸우며 답답해할 기사들을 위해 최대한 배려한 것이었는데.
로빈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큐브를 통제하는 치안대, 배정하는 관리들, 그리고 영주의 명령을 무시한 기사들까지……. 그야말로 가관이네요.”
“…….”
황제가 기사들을 확실히 단속하라고 했을 때 그냥 웃어넘겼다. 오랫동안 북부에서 마수와 싸워 오며 영지민을 지킨 기사들이라면 그런 호승심이나 자기만족보다 영지민의 생명을 더 중히 여길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자신의 경고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든지.
로빈의 생각이 점점 복잡해졌다.
우선 올라오는 짜증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판단하려 노력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마음을 다스리자 상황을 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고.
이 일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굳이 따져 묻는다면, 당연히 명령을 불복종하고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한 기사들의 몫이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르보른 부단장과 베테랑 기사들이 북쪽 관문으로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제필과 린을 포함한 정예 기사들을 차출했으니, 영지에 남은 건 신입 기사와 중견 기사들뿐.
기사들의 통제에 문제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폴 경과 함께했던 베테랑 기사들과 린이 단장으로 취임한 시기에 자리를 잡은 중견 기사들은 성향이 좀 달랐다.
베테랑 기사들이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경직된 분위기에서 엄숙하게 훈련했다면 린과 함께 전장을 누비는 기사들은 전사들처럼 자유로운 면이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린도 백랑이 전사들을 다루듯 기사를 대하고 있었다. 린을 마녀 단장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분위기가 어떤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건 어느 게 옳다고 단정 지어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훈련 효율은 린과 함께 훈련하는 기사들이 더 높았고, 실력 역시 그쪽이 더 빠르게 늘고 있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아직 기사단에는 전사단의 백랑처럼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그들을 지배하는 걸물이 없다는 거다. 그 역할을 해줘야 하는 린은 아직 카리스마나 연륜이 부족했다.
아무리 강해도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지 채 3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연륜을 기대하는 건 사실 억지에 가까웠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