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그나마 기사들을 통솔하고 있는 건 르보른 부단장.
하지만 지금 영주 성에는 부단장조차 없었고, 그런 통제 공백을 자초한 게 바로 영주인 자신이었다.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큐브 관리부, 그리고 치안대는 기사들이 들이닥쳐 큐브를 클리어하겠다고 설치면 솔직히 길을 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물론 그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면 그러지 못하겠지만, 사실 영지 내에서 그걸 실감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 정도였다. 이번에 같이 출진한 정예들은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겠지만 영지에 남은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말을 전해 들은 것뿐이었으니까.
“그것만이 아니네요. Y-B U5가 세 개나 클리어된 걸 보면 적어도 세 팀은 더 움직였다는 거군요. 오늘이라고 했으니……. 맞나요?”
“네, 영주님.”
“아무래도 기사들이 이 일의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거 같군요. 자신들의 실수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는 거 같고.”
영주인 자신의 명을 가볍게 들은 것과 경고를 무시한 건 당연히 불쾌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였다.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인 방법은 그냥 그들을 강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이곳도 민간의 법과 군법은 상당히 다른 데가 있었고, 명령 불복종의 경우에는 최고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고, 우선 자신부터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영지를 다스려오지 않았다.
“때마침 오늘이네요. 예전에 제가 빼놓으라고 말한 그 큐브는 아직 클리어하지 않았죠?”
“예, 영주님. 오늘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바로 클리어할 계획이었습니다.”
“원래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적어도 눈으로 보여줄 필요는 있겠군요. 오픈 타임이……. 그러니까 네 시간 정도 남았군요. 영지의 치안대와 기사단, 전사들까지 모두 그곳으로 집합시키세요. 대수림에 들어간 전사들을 제외하고 열외는 없습니다. 전사들은 좀 바쁘겠지만 어쩔 수 없군요. 지금 맡은 업무는 오늘 복귀한 병력과 맞교대하면 문제없을 거예요.”
“예, 영주님. 서두르겠습니다.”
지온이 나가고 로빈은 깊게 한숨을 쉬며 인상을 썼다.
“하, 다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냐?”
큰 문제를 일으킨 조의 조장은 바로 다렌.
로빈과 제법 친분이 있는 중견 기사였다. 좀 가벼운 녀석이지만 성격 자체는 나쁘지 않아 아카데미에 다닐 때도 옆에 뒀었는데 이런 행동을 했다니 씁쓸하기만 했다.
나름 영리하고 눈치도 빠른 녀석이 대체 왜 그랬을까?
어쩌면 자신을 옆에서 지켜보며 너무 잘 알고 있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시하는 편이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문제가 있는 건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큐브를 무사히 클리어하기만 하면 자신의 성격상 굳이 지적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한 게 아닐까?
마음이 좀 가라앉자 이제는 짜증이나 분노보다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남았다.
큐브는 어떻게 클리어되었지만 멀쩡한 기사를 둘이나 잃었고, 살아 나온 이들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자신들만 살아오고 기사 둘이 유명을 달리한 것 자체가 가장 큰 처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 *
많은 병력이 녹색 큐브 G-E 앞에 모여들었다.
다시 살펴보니 고블린이 들어있는 큐브.
치안대라도 조금만 신경 쓰면 바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놈들이니 그 갭을 느끼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오늘 이렇게 모든 병력을 모은 건 큐브 폭발의 실체를 정확히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다. 단순히 고블린 몇 마리가 들어가 있는 큐브가 폭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
기사단은 주변 건물 위로 올려 상황을 확실히 확인하게 만들고 근처를 치안대로 감쌌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도 영주 직권 명령으로 잠시 대피시켰으니 이곳에는 치안대를 비롯한 병력뿐이라 사고가 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기사들은 근처에서 지켜보기만 한다고 쳐도, 동원된 치안대의 수만 해도 무려 천이 넘었으니, 겨우 고블린이 들어가 있는 큐브가 폭발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헛웃음이 날 정도의 대비였다.
그리고, 자정이 되자 지정된 큐브가 밝게 빛나며 사방에서 고블린이 튀어나왔다.
물론 로빈도 마찬가지지만 한 번도 큐브 폭발을 경험하지 못한 병사들과 기사들은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블린의 수에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윽!”
“잡아!”
족히 수백은 되는 고블린이 사방에서 난동을 피웠다.
병사들의 수는 그보다 월등히 많아 서서히 제압되고 있었지만, 큐브 안에서 겪었던 그 연약한 고블린과 지금 이놈들은 그 수준이 많이 달랐다. 갑작스럽게 튀어 올라 방심한 치안대의 팔뚝에 긴 상처를 남기기도 했으니 말이다.
첫날 녹색 큐브에 들어가 고블린을 상대해 본 기사들도 놈들의 달라진 움직임에 당황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래도 고블린은 고블린이라 1천 명이 넘는 치안대가 정신을 차리고 공격하자 금방 제압되었다.
“녹색 큐브에서 튀어나온 고블린의 수가… 261마리구나. 이처럼 큐브가 폭발하면 내부에서 상대하던 것과는 수준이 다른 적을 상대해야 한다. 물론 난 우리 기사들을 믿는다. 어떤 녀석들이 튀어나오더라도 결국 제압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여기까지 말한 로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곳은 시가지. 기사들이 놈들을 제압할 동안 고통받는 주민들은 누가 책임져준단 말인가? 기사들은 명심하라. 큐브는 놀이가 아니다. 너희가 큐브를 클리어하지 못해 그것이 폭발하면 최소 수백의 주민들이 바로 목숨을 잃는다는 걸 항상 기억하라!”
“예! 주군!”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몇몇 기사들이 나의 명을 어기고 허가되지 않은 큐브를 멋대로 클리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로빈이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입을 열자 주위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그들도 지금 큐브가 폭발한 걸 목격하니 그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는지 확실히 느낀 것이다.
단순한 고블린도 이 정도 파괴력인데, Y-B급, 혹은 Y-A급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로빈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억지로 감정을 배제한 채 최대한 차가운 태도로 그렇게 말이다.
“그들은 세 가지 죄를 범했다. 첫째, 그대들의 주군, 나 로빈 그레이츠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거역한 죄. 둘째, 영지민의 검과 방패인 기사가 자신의 임무를 방기한 채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검을 든 죄. 셋째, 최고 통수권자인 영주가 없는 시기에 불필요한 사상자를 내 민심을 어지럽힌 죄. 이는 당연히 극형에 처해도 모자람이 없는 대죄이다.”
“…….”
“음…….”
“하지만 이런 일이 처음이라는 점과 통제할 상급자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목숨이 다하기 직전까지 큐브를 클리어했다는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참형을 내리지는 않겠다.”
“휴~”
“오늘 허락 없이 큐브를 클리어한 다렌 외 19인은 이 시간부로 기사직을 박탈하고, 차후 다시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는 그 누구라도 여지없이 참형을 내릴 것이니, 모든 기사는 오늘 일을 항상 기억하도록. 이만 해산.”
명을 끝까지 전한 로빈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큐브를 가볍게 생각했던 기사들과 치안대 모두 잔뜩 굳어있는 건 마찬가지였고.
다만 이 큐브가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라는 경각심 정도는 가지게 되었다.
* * *
로빈은 상당히 경직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잘못이기도 한 이 사태를 그저 그들의 잘못으로 처벌한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옳았는지. 아니면 그들에게 극형을 내려 기사들의 경각심을 높여야 했는지.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어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로빈이 그러고 있자 당연히 로빈의 세 여자 역시 그의 눈치만 살피며 침묵을 지켰다. 특히 이 일과 관련이 깊은 린은 정말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잠도 자지 않는 상태에서 그런 적막함이 제법 오래 이어졌고, 눈치를 보던 다이앤이 결국 총대를 메고 로빈에게 다가가 살며시 안겨들었다.
“로빈, 미네 영지는 어떤가요? 뭔가 볼 만한 게 있던가요?”
“응? 음……. 글쎄.”
다이앤은 당연히 이어져야 할 격려나 위로 따위는 전혀 입에 담지 않은 채 다른 이야기만 계속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중 백미는 단연 린의 독점 이야기였다.
“린이 무려 3일이나 로빈을 독점했어요. 그만큼 많이 즐겼겠죠? 아무래도 좀 혼나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음……. 그러니까 뭔가 참을 수 없는 질투?”
“뭐? 그게 또 무슨……. 야, 그래도 일 때문에 간 건데 좀 봐줘. 끌려간 린은 또 무슨 죄냐?”
“혼자였으니 분명 질싸만 열 번도 넘게……. 이건 너무 불공평한 일이에요.”
“음, 언니의 말이 옳아요. 저 멍청이는 오늘 좀 혼나야 해요. 언니, 그레이트 V 준비할까요?”
머릿속이 무거웠던 로빈이지만 이런 이야기로 잠시 떠들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오고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아마 다이앤도 그럴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꺼냈을 거다.
“휴~ 그래, 됐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지.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묻어두고 앞으로의 일이나 고민하자.”
“그래요, 로빈. 분명 마음속으로 걸리는 게 많겠지만 로빈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그래, 우선 자고 내일 생각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다들 이리 와. 빨리 자자.”
“네, 로빈. 물론 린은 좀 혼내주고요.”
“응? 린을 혼내준다고? 그거 농담 아니었어?”
“물론 로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주위를 환기한 건 맞지만, 그래도 혼날 건 혼나야죠.”
“맞아요, 영주님.”
“…허허. 앤, 너 진짜…….”
자신의 부인은 생각보다 심지가 굳은 거 같았다. 이 분위기에서 꼭 그렇게까지…….
그리고 린은 그날 앤과 실비에게 제법 혼났다.
어쨌든 조금 심각했던 분위기도 린이 터트리는 교성 소리에 묻혀 많이 희석되어 버렸고.
이게 무슨 병맛인가 싶으면서도 나름 재미있었달까?
어쨌든 덕분에 기분만은 많이 풀렸다.
* * *
큐브가 터지는 걸 눈으로 목격한 이래 기사들과 치안대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들의 수준에 비해 싱거운 놈들을 상대하면서도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신중해졌으니 말이다.
이미 큐브를 클리어한 인원들은 따로 모여 주변에 다른 큐브를 공략하는 인원이 클리어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무조건 대기하는 것도 조금 달라진 점이었다.
어차피 배정할 때부터 그들의 수준으로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녀석만 맡기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판단한 영주 로빈의 생각조차 방심이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그 시간에 차라리 훈련을 통해 스킬의 숙련도를 높이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뭐, 저렇게 철저하게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당연히 큐브를 기록하는 관리들의 태도도 변했다. 상부에서 허가하지 않은 큐브에 입장하려고 하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을 기세였으니까.
이제 그럴 일도 없겠지만 앞으로의 일까지 생각하면 저런 태도 역시 상당히 바람직했다.
그리고 로빈은 당분간 큐브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이제 영지 차원에서는 제법 기틀이 잡혔으니 영주의 일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영지가 큐브 시스템에 어느 정도 적응했으니 답 없는 큐브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멀어지고 싶어 그런 거였다. 사실 이제 붉은 큐브나 파란 큐브를 공략하기 전에는 따로 간섭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큐브가 생겼지만, 주민들의 생활은 별로 변한 게 없었다. 그 말은 결국 영주로서 해야 할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찾아보니 큐브다 원행이다 하면서 일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할 일이 제법 밀려있었다.
“로빈, 그런데 요 녀석은 어떻게 할 거예요?”
“응? 뭘, 어떻게 해?”
그렇게 출근해 집무실에서 서류를 살피는데 다이앤이 들어왔다. 품에 그 정체불명의 귀염둥이, 핵탄두급 애교의 주인공인 늑대 정령을 꼭 끌어안고 말이다.
녀석은 뭔가 서운한 듯 낑낑대며 애처롭게 저를 쳐다보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저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그날 우리 귀염둥이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그냥 가버리셨잖아요? 그건 좀 너무한 거 같은데요.”
“음……. 그건 그렇네.”
귀엽다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자신의 파트너 늑대 정령.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