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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25화 (225/303)

225화

[연합국이 어느 정도 저자세로 나와 그나마 그렇게라도 허락한 거지만 그거로는 많이 모자라지.]

황제의 한마디는 천금보다 무겁다. 남부 연합국과 전쟁도 불사할 거처럼 날뛰던 황제가 하루아침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쪽에서 전적인 사과와 보상까지 지급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런 전례가 생기는 건 남부 연합국 측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래도 그나마 일이 워낙 급하다 보니 상당히 저자세로 나오긴 했나 보다.

[그쪽과의 관계는 차차 개선해 나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식으로 일이 터지니 난감하긴 하더군. 바다 건너라고 해도 남부 연합국 측이 과한 피해를 보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라서 말이야. 어차피 우리가 그들을 구원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렇겠죠. 그게 그리 쉬웠으면 진작에 제국이 흡수했겠죠. 오히려 난민이라도 생겨나면 그걸 처리하는 데 골치만 아플 거 같군요.”

[그렇지. 지금 상황에서는 모든 국가가 각자 알아서 살길을 모색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그래서 황실의 부정적인 태도와는 상관없이 후작 쪽에서 그들의 편의를 좀 봐줬으면 좋겠군. 물론 후작도 따지고 보면 황실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그래줄 수 있겠지?]

“예, 뭐. 제가 그런 걸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니 문제는 없습니다.”

큐브 포털이 등장할 시기를 가늠하며 마수 가죽 갑옷을 미리 퍼트리려 한 황제가 남부 연합국과 분위기를 잡으며 그걸 이용했는데 불행히도 그 관계를 다시 개선하기도 전에 너무 빨리 큐브가 나타나버렸다.

그렇다고 그들이 치명적인 피해를 보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라 도와주긴 할 생각인데,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걸리는 것이다.

일종의 체면 문제인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 대상이 황제라면 그 체면의 가치도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지원을 그레이츠 쪽에 부탁하는 것인데.

사실 그레이츠도 황제와 상황이 비슷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건 아니지만 이쪽에서 수출한 혼 래빗 가죽으로 이쪽의 물건을 모방해 팔았으니 체면을 많이 구긴 셈이고, 만약 로빈이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는다면 귀족 사회에서 물렁하게 볼 가능성이 컸으니 말이다.

일종의 호구 취급이랄까?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황제에게 그런 일이 반복되면 통치에 지장을 줄 정도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로빈은 귀족들이 얕잡아봐도 영지를 다스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거다. 사실 로빈이 그런 류의 평판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그런 일을 그냥 해줄 수는 없으니 겸사겸사 실리를 챙기긴 해야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이쪽도 물량이 모자란 걸 알고 있을 테니 아마 직접 사냥하려고 할 거야. 하지만 그레이츠 쪽 물건을 어느 정도 넘겨줘도 좋네. 리아넨 쪽은 황실에서 미리 지원해 줬어. 리아넨이 중부를 맡아준다고 해서 명분도 섰고.]

“그래요?”

[그리고 당장 급한 대로 하급 마수까지 모조리 잡아다가 쓰고 있는데 맨몸보다는 나으니 당장은 쓸 만할 거야. 제국 규모로 모든 가죽 장인과 마법 공학자가 갑옷만 만드니 물건 나오는 속도가 다르긴 하더군. 영지 입장에서도 그들이 빨리 빠져주는 게 더 낫겠지? 그러니 적당히 사냥하게 하고 모자란 건 그냥 줘서 보내는 게 나을 거야.]

“그거야 그런데……. 어쨌든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조율하도록 할게요.”

[좋아. 그리고 내 그쪽 명단을 전달받았는데, 재미있는 인물이 끼어있더군. 이걸 노리고 그런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남부 연합국 방문 인사 목록에 사령관의 부관으로 제아란 맥라스 남작이 끼어있었어.]

“예? 그게 누군데요.”

[이 사람 참……. 자네 부친 되시는 윌리엄 그레이츠의 이복형이라네. 자네한테는 그러니까… 삼촌? 뭐 그렇게 되겠군.]

“…그래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혈육이란 말이지?

자신의 아버지 윌리엄이 남부 연합국에서 살아갈 때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과 제국으로 떠나올 때 가문과 의절하고 들어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뒤로는 딱히 연락하고 지내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성격상 결혼한다는 소식 정도는 전해줬을 가능성이 컸고.

그러니 그 대열에 그런 인사가 끼어있다는 건 나름 알아보고 출발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자신은 전생에서도 친척이나 가족, 그런 거 없이 살았다 보니 친족이란 개념 자체가 그리 와닿지 않았고 오로지 영지와 가족만 중요했지만, 아버지의 입장은 조금 다를 수 있으니 이건 아버지와 상의할 필요가 있었다.

친족이라는 핑계로 생각보다 과한 요구를 늘어놓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우선 아버지에게 물어본 후, 아버지의 뜻이 그렇다면 어느 정도 대우해 주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남처럼 대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저 양반은 나도 모르는 아버지 쪽 계보까지 알고 있는 건가? 대체 그걸 어떻게…….

아, 혹시 1회 차가?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은 그것뿐이었다. 황제가 겪은 1회 차에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고, 자신이 황제에게 그걸 이야기한 것이다.

확실히 자신이 1회 차 황제와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유지하긴 한 모양이다. 그런 사적인 이야기까지 오고 간 걸 보면 대충 알 만했다.

“아, 그런데 앞으로 계속 큐브를 영주 쪽에만 맡길 생각이신가요? 언젠가 그게 벅찬 시기가 다가올 거 같은데요.”

[음? 아아, 그렇지 않아도 논의 중이라네. 사실 남쪽에서 자신들에게도 큐브를 클리어할 기회를 달라는 용병들의 요청이 있어서 말이야. 물론 마나석 가격이 낮아지고 있지만 그게 돈이 안 되는 건 아니니 큰 이권이긴 하지.]

“그렇겠죠. 그리고 북부도 이렇게 계속 늘어지면 좀 곤란하거든요. 아무리 마수를 많이 줄이고 있다고 해도 마수 범람은 그거랑 또 달라서요. 겨울이 오기 전에 뭔가 조치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되도록 민간에 그냥 맡기는 것보다 황실에서 제도를 만들어 투명하고 확실하게 진행했으면 그게 가장 좋겠죠.”

[제국 은행과 연계해서 처리할 생각이네. 관리들이 서둘러 준비하고 있으니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야. 용병 길드와는 별개로 움직일 거고.]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요? 그냥 용병 길드 쪽에 맡기는 것도 방법이잖아요?”

[남쪽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뭔가 석연치 않아. 사실 벌써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는 아니란 말이지. 뭔가 미심쩍어 좀 파봤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추긴 정황이 있더군.]

“그놈들인가 보네요. 대체 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뭔가 꺼림칙해서 민간으로 넘겨도 통제할 수단은 확실히 마련해 놓을 생각이네. 그리고 그 뒤를 계속 파고 있으니 뭔가 덜미가 잡히겠지.]

들어보니 푸시 캣츠를 전국적으로 운영하며 새로 만든 정보망이 슬슬 제구실을 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빠르게 그 사실을 잡아내지도 못했을 거고.

어쨌든, 놈들이 드디어 움직였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좋을 거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기다리죠.”

[부탁하네, 후작. 그……. 쉽지 않겠지만 좀 부드럽게 부탁하네.]

응? 뭐야, 마지막에 저 석연찮은 반응은?

황태자와 연락을 끊은 로빈은 통신 수정구를 다시 마담 로아에게 건네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담 로아는 조심스레 수정구를 품 안에 넣고 깊게 고개 숙인 후 빠르게 자리를 피했고.

다이앤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 로빈. 황제 폐하랑 직통이에요? 푸시 캣츠가 황제 폐하랑 관련 있는 애들이었구나. 어쩐지, 왜 굳이 신전 앞에 자리를 잡나 했더니…….”

“그렇지, 뭐. 그러니까 길거리를 나다니다가 황제 폐하의 욕도 함부로 하면 안 돼. 폐하가 어흥! 한다고.”

“전 폐하의 어흥보다 로빈의 어흥이 더 무서운데요.”

“후후, 역시 우리 앤이 뭘 좀 아는구나.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앤, 들어가서 아버지한테 시간 좀 내달라고 전해 드려.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봐야 할 거 같아.”

“알았어요, 로빈. 그럼 이따 봐요.”

다이앤이 집무실을 나서자 밝게 웃으며 애꿎은 서류만 매만지던 로빈도 숨을 깊게 들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놈들이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전염병을 일으키더니 이젠 용병들의 권리를 신경 쓰겠다고? 그들을 키워 뭔가 할 생각인가? 그건 의미가 없을 텐데.”

놈들의 목적이 세상의 파멸이나 제국에 대한 무차별적인 복수라면 가장 어수선한 첫 주에 어떻게든 큐브를 폭발시키는 것으로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큐브에 대한 경각심이 없을 때 접근해 동시다발적으로 자폭하면 아무리 황제라도 그걸 깔끔하게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과 황제 모두 그걸 가장 걱정했지만, 이 넓은 제국을 모조리 신경 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시기는 아무 반응도 없이 넘긴 놈들이 이제 와서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그 목적을 짐작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우선 황제가 놈들의 꼬리를 잡아 뭔가를 얻어내야 얘기가 될 거 같았다.

“남부 연합국이라……. 어? 잠깐. 그럼 지금 형님은 어떻게 하시고 있는 거지? 아… 그걸 잊고 있었네. 아무 연락도 없는 걸 보니 문제는 없는 거 같지만 내가 너무 무심했어.”

황제와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디데이를 내년 이후로 잡고 있었고, 리아넨 쪽에 가죽을 전달한 후 겨우내 잡은 거로 작센 백작령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져 모든 게 꼬여버린 것이다.

정 급하면 더럽게 비싼 워프 게이트를 통해 특급 배송해 주는 방법도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없는 걸 보면 별 탈 없이 잘 막아내고 있는 거 같았지만 어쨌든 자신이 좀 무심하긴 했다.

“아니다. 연락은 좀 나중에. 지금은 정신없을 테니 굳이 더 보탤 필요는 없겠지. 만약 문제가 생기면 자존심 때문에 연락하지 않을 형님도 아니고, 옆에 처가인 크라우 백작령도 있으니 괜찮을 거야.”

로빈이 허탈한 얼굴로 자책하고 있는데 다이앤과 아버지 윌리엄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약속을 잡으려고 보낸 건데 아예 아버지를 모시고 온 것이다.

“오, 아버지. 제가 가도 되는데 굳이 여기까지 오셨어요?”

“하하, 넌 바쁜 녀석 아니냐? 노는 내가 와야지. 그래,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했니?”

“예,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남부 연합국의 사정을 적당히 설명하고 친가 쪽 인물인 제아란 맥라스가 동행한다는 이야기까지 전했는데 아버지의 표정은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할 뿐.

그리고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잠시 고민하던 아버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친가라……. 사실 내가 집을 나오면서 연이 끊어진 거나 마찬가지야. 가족으로 생각하던 사람은 그나마 어머니뿐이었을 텐데 그분은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아니, 사실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가족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사이였지.”

“그런가요?”

“원래 어머니와 난 가족들 사이에서도 이방인이었어. 그 어린 나이에 내가 집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도 호적에서 제외하겠다고 할 뿐 아무도 말리지 않았거든. 그럴 거면 대체 왜 어머니를 첩실로 들였는지…….”

“아…….”

“그저 어떻게든 가문을 살리겠다는 생각만 하고 살던 사람들이었지. 되지도 않는 나한테 무술을 강요하더니, 그나마도 재능이 전혀 없다고 내팽개치더구나.”

아버지 윌리엄의 어머니는 제국 출신 평민이었는데 그 미색이 상당했다고 한다.

어수룩한 할머니를 꾀여 첩으로 들어앉힌 게 바로 당시 맥라스 가문의 가주였고, 자신에게는 할아버지 되는 분이었다.

할머니라도 살아계셨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분은 또 아버지를 낳고 얼마 안 있어 돌아가셨단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계속 찬밥 취급이었고, 그냥 그렇게 사는 것보다는 나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의절하고 집을 떠나 제국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다.

“아마 외모도 문제였을 거야. 난 심하게 외탁하는 바람에 제국민이랑 다를 바가 없었거든. 형제라고 해도 다른 형제랑은 전혀 닮지 않았단 말이지. 심지어 아버지랑도 별로 닮은 데가 없어서 의심만 샀지 뭐니. 게다가 또 여덟 달 만에 태어나는 바람에 더했지.”

“음…….”

그러니까 출생조차 의심받았다는 건데, 그렇게 의절한 가족도 친족이라 볼 수 있을까 의문스럽기만 했다. 딱 봐도 그리 좋은 감정은 아닌 거 같고.

“그러니 굳이 신경 쓸 이유는 없어 보이는구나. 그냥 영지나 가족들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들도 날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니, 피를 이었다고 해도 그걸 가족이라고 할 순 없겠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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