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니 좀 괘씸하긴 하지만, 그쪽 입장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 굳이 친족이라고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할까?
다행히 아버지가 의절까지 하고 나와서 명분도 충분했다. 자신은 그저 아버지의 말대로 영지의 입장만 따져 행동하면 될 거 같았다.
* * *
남쪽에서 출발한 대규모 선단이 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대략 일주일 정도 남았다.
단순히 마수 가죽을 사러 오는 사람도 아니고, 와서 사냥까지 하고 갈 인원이라 그들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일이었다.
물론 우리 영지에만 오는 게 아니라 그들이 배로 접근할 수 있는 자이트 영지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부담을 좀 덜 수 있었지만 성가신 건 성가신 거였다.
“마수 산맥을 넘겨줄 수 없으니 결국 대수림인데, 그러면 남쪽 요새인가? 이거, 어쩌면 저번 용병 사태가 또 반복될지도 모르겠는걸? 순수 병력만 600이니 자이트로 200 정도 들어간다고 치면 우리 쪽으로는 400 정도군.”
황제의 요청도 있고 해서 처음에는 제법 많은 물량을 챙겨줄까 싶었는데 요즘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큐브에서 나오는 소재로 방어구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벌써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소설에서의 진행 상황보다 훨씬 이른 등장이었다. 황제 역시 자신처럼 생산직을 큐브에 밀어 넣어 제작 관련 스킬을 얻은 모양이다.
“사실 마수 갑옷이란 건 일종의 지름길 같은 거지. 이게 없으면 상당히 위험하긴 하지만, 꼭 필요한 건 또 아니니까. 물론 난 그 위험이 싫어서 무조건 서두른 거지만……. 바다 건너 나라를 위해 우리 물량을 굳이 풀어줄 이유가 있을까 싶네. 다른 대안이 전혀 없다면 몰라도 지금쯤이면 그들도 이 정도는 알고 있을 거거든.”
물론 물량이 제법 많은 낮은 등급의 오크 가죽이나, 고블린, 놀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라 봤자 중급 마수의 것보다 훨씬 질이 떨어졌다.
그나마 오크 전사의 가죽이나 리자드맨, 오우거처럼 제법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의 것이면 중급 마수의 것과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성능을 자랑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중급 마수의 갑옷이 훗날 일종의 국민템으로 취급받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법 값이 나가지만 용병들이 Y-C급 이상의 큐브를 클리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것보다는 돈을 좀 써서 마수 가죽 갑옷을 착용하는 게 훨씬 빠르고 안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까지 고려해서 큐브가 생겨났을 거 같진 않았다.
“원래 제작 의도가 그렇진 않았을 거라고.”
뭔가 이상할 정도로 체계적인 큐브 포털.
분명 하급 큐브를 클리어해 얻은 전리품으로 장비를 만들어 더 높은 단계의 큐브를 공략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도 초반에는 그런 흐름을 그대로 따라갔다.
소설에서 마수 가죽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초반의 그 아수라장을 상당히 겪은 후였고, 차후 공략에는 제법 도움이 되었지만, 초반 공략은 이것 없이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남부 연합국 역시 그 와중에 알아서 잘 살아남았다.
결국 지금 제국이 마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큐브를 클리어하는 건 일종의 반칙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황제가 1회 차를 겪지 않아 그 사실을 몰랐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혼자 설쳐봤자 얼마나 퍼트렸겠어? 이제 슬슬 마수 갑옷의 유용성을 눈치채고 보급하는 정도? 그랬으면 첫 일주일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녹색 큐브는 알몸으로도 돌파할 수 있고 거기서 나온 전리품으로 일종의 빌드 업을 거치면 되니 영지의 방문객은 적당히 상대해 주면 된다는 거였다. 황제의 권고는 그야말로 권고고,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남부 연합국과 친가에 대한 억하심정 때문에 심술을 부리는 건 전혀 아니었다.
큐브는 알아서 병사들이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빈은 다시 영지 일에 집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판매량이 늘어난 그레이트 시리즈와 섹스 보조제 ‘언제나! 자신 있게!!’의 판매 문제, 그리고 각종 마수 부산물과 혼 래빗 관련 상품의 처리, 황도에서 남쪽으로까지 상행이 늘어나 배를 두 척 추가로 대여한 일 등, 영주로서 처리해야 할 사항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 영지일 뿐만 아니라 다른 영지에서 반출하는 마수 가죽과 혼 래빗 관련 제품에 대한 문의도 계속 들어오고 있어서 제법 바쁜 시간이었다.
“아우, 이제 자기 영지는 좀 자기가 챙겨야지. 왜 자꾸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이쪽으로 커미션까지 떨어지니 이걸 무시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하게 하네.”
사실 돈이 궁하지 않아 거절해도 무방한 일인데 영지 일을 처리하면서 조금 보태면 돈이 더 들어오는 상황이라 이걸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문관보다는 무인에 가까운 다른 5대 방벽의 영주들도 그런 생각으로 자신에게 일을 맡기고 그들은 큐브에 집중하고 있는 게 분명했고.
결국 귀찮은 행정적인 처리는 어린 자신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신나게 큐브나 썰겠다는 거였다.
그야말로 북부인다운 마인드.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일만 늘어나서 좀 난감했다.
“그래도 이 정도 커미션을 던져주면서 나만 믿겠다는데 뭘, 어쩌겠어. 아후, 이 소시민 근로자 마인드 진짜…….”
따지고 보면 자신이 더 부자인데 푼돈에 연연하는 이 마인드는 참 어쩔 수 없었다. 큰돈에는 오히려 무덤덤한데 적은 돈에 더 신경 쓰인다고 할까?
원래 부자가 되려면 적은 돈에는 대범하고 큰 줄기를 잡아야 한다는데, 로빈은 좀 반대였다.
체감할 수 있는 푼돈에 예민하던 전생의 기억 때문인 거 같았다. 원래 1~2만 원 차이에는 민감하지만 1~2천억 원은 체감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왔으니 말이다.
덕분에 어쨌든 잔고도 늘어나고, 다른 5대 방벽 영지들의 큐브 클리어 속도 역시 빨라지고 있었다. 북부 기사들의 수준 역시 가파르게 향상되었고.
아마 저들도 겨울이 오기 전에 큐브의 수를 최대한 많이 줄여둘 생각인 거 같았는데 이대로 진행되면 최적의 상태에서 겨울을 맞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 * *
이렇듯 로빈이 영지 일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아예 귀를 닫고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큐브 관련 소식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황도에서 큐브 전리품으로 갑옷을 만들고 있다든지, 꽝인 줄 알았던 이상한 쪽지에서 말도 안 되는 연금 조합식을 얻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로빈에게도 꽤 재미있는 소식이었다.
아마 저런 식으로 대박을 터트린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면 큐브 클리어를 희망하는 사람들 역시 점점 늘어나게 될 것이다.
물론 영지 내에서 소소하게 이어지는 연구 역시 로빈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중 가장 신경 쓰는 건 단연 히센의 연구였고.
영지에서도 벌써 몇 장이나 되는 이상한 쪽지들을 얻었는데 그걸 히센이 해석하고 있으니 그 결과물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처음 일주일간 영지에서 얻은 쪽지들에 대한 해석 결과가 나오는 날이라 아침부터 히센의 연구실을 찾았다.
“끙,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더군. 우선 해석을 다 하긴 했는데 별 의미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어.”
“그래요? 하긴 그렇겠네요. 그래도 나오는 건 다 해석해 보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로 히센의 연구실을 방문했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좋은 성과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괜찮은 걸 찾았으면 저런 맥 빠진 얼굴이 아니라 자신만만하게 저를 맞이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일을 멈출 수 없는 게 뭔가 찾았을 때 얻는 효과가 상당하기 때문이었다.
“황실에서 발견한 연금 조합식이 증강 물약이라고 했죠? 생각보다 괜찮은 걸 찾았네요.”
“그렇지. 나도 들었는데 큐브 내에서 사용하면 몸놀림이 가벼워지는 신기한 물약이라더구나. 우리도 그런 조합식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야.”
“우선 황실에서 생산해 전국적으로 판매하겠네요. 황제 폐하 성격상 자신만 그걸 쓸 리는 없고 적당히 성능을 시험한 후에 조합식을 공개하고 로열티를 챙기는 쪽으로 진행될 거예요.”
“글쎄, 황실에서 조합식을 공개한다고 해도 그걸 만들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재료들도 다 큐브에서 나온 것들이라니 당장 만들기도 쉽지 않을 거야.”
“지금은 그렇겠죠. 하지만 점점 큐브에서 나온 잡동사니나 약초들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거예요.”
“어쨌든 완제품이 나오면 우선 영지에도 들여왔으면 좋겠구나. 실비가 거기서 뭔가 얻을 수도 있어.”
“그렇죠. 그 녀석이 또 그런 건 귀신이니까요.”
그렇게 황도에서 발견된 새로운 조합식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로빈은 히센이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대체 어떤 게 나왔길래 히센이 저런 맥 빠진 반응을 보이나 궁금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마님은 왜 그 오크에게만 쌀밥을 주었을까? 푸하하. 이게 뭐예요?”
첫 장만 보고도 빵 터져버린 로빈은 바로 뒷장을 넘겨 다른 것을 찾아봤다.
관능적인 그 트롤, 켄타우로스를 탄 레이디, 그녀는 밤마다 코볼트와 산책한다 등등…….
뭔가 핀트가 어긋난 이상한 야설들뿐이었다.
“하, 내가 저걸 옮겨 적는데 대체 왜 이러고 있나 자괴감이 들더군.”
“그럴 만도 하네요. 진짜 어이없네. 다 이런 식인가요?”
“지금까지 나온 건 그래. 이 작업을 계속해야 할지 의문스러울 정도니까. 아, 그리고 우리 영지는 이상하게 오크와 마님이 강세인 모양이야. 저게 무려 16페이지나 되거든? 어쩌면 조간만 완성본이 나올지도 모르겠어.”
“하하, 그래요? 이거야, 원…….”
저 히센이 끙끙대며 야설을 손수 옮겨 적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저렇게 투덜대면서도 끝까지 작업한 것도 재미있었고.
아마 저 문서 중에 무슨 숨겨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제법 고민하면서 해석 작업에 열을 올렸을 거다. 기밀문서를 저런 식으로 위장하는 경우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나오는 문서는 다 해석해 주세요. 진짜 숨겨진 무언가가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끙, 그래야겠지.”
“아, 맞다. 이건 제가 미네 영지에서 얻은 건데 이것도 한번 해보시겠어요?”
로빈은 히센에게 예전에 얻은 그 종이를 건넸다. 히센은 물론 로빈 역시 방금 결과물을 확인해서 그런지 별로 기대가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있는 거니 확인이나 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어? 이건…….”
하지만 건성건성 종이를 살펴보던 히센은 첫머리를 보자마자 자세를 바로잡았다.
“응? 왜요?”
“이건 좀 다른데? 무슨 재료가 나열되어 있는 게 저런 야설이랑 시작부터가 달라.”
“오, 그래요?”
이건 또 웬 떡인가 싶어 침을 꿀꺽, 삼킨 로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히센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히센의 대답은 좀 기다리라는 거였다.
“당장 이게 뭔지는 내가 알 수 없겠는데. 우선 실비랑 도리아를 불러서 같이 연구해 봐야겠어.”
“그래요, 히센. 부탁 좀 드릴게요. 아, 그리고 마수와 미스릴의 연관성은 딱히 밝혀낸 게 없죠?”
“아, 그렇지. 그건 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그렇군요. 그것에만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거니…….”
무슨 일이든 연구를 하고 결과를 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저 새로운 조합식도 그렇고, 예전에 부탁했던 미스릴에 대한 것도 그렇고.
하지만 언젠가는 하나씩 밝혀져 뭔가 얻는 게 있을 것이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아이씨, 됐어. 때려 쳐. 차라리 그냥 가죽이나 적당히 쥐여주고 보내는 게 낫겠네요. 지온, 지금 영지에서 보관하고 있는 가죽은 얼마나 되죠?”
“중급 마수의 가죽이 1,248장, 하급 마수의 것이 7,000여 장입니다. 모야족 청년들이 너 나 할 거 없이 다 뛰쳐나가서 마수를 잡으니 모이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네요. 다른 영지 쪽에서 판매를 맡긴 것들도 최근에 도착했고요.”
원래 영지에서는 그냥 버리던 하급 마수의 가죽도 낮은 단계의 큐브에서 얻을 수 있는 허접한 가죽보다는 괜찮다는 소문이 나 찾는 사람이 생겼다.
그래서 요즘에는 저것도 그냥 모아놓고 있었는데 모야족 청년들까지 소일거리 삼아 마수를 처리하고 다니니 그 수가 저렇게 쌓인 것이다.
“저 정도면 남부 연합국에서도 만족하겠죠? 가뜩이나 빈 곳 찾기가 어려워진 남쪽 요새에 그놈들이 지낼 곳까지 마련하려니 답이 안 나오는데요.”
이리저리 400인 이상이 묵을 숙소를 생각하던 로빈은 도저히 남쪽 요새에서 그 자리를 만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냥 포기하려 했다. 굳이 이런 거로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가죽이나 적당히 쥐여주고 쫓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지온의 생각은 조금 다른 거 같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