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그런데 저 공주요. 사람은 참 괜찮아 보이지 않아요? 딱 직설적이면서 뭔가 꾸밈없는 느낌이잖아요? 세상 물정을 조금 모르는 거 같긴 한데 올곧은 느낌이 나쁘지 않은데요.”
“네, 대단한 미인이더군요. 자신을 거절한 영주님을 보고 충격받을 만해 보이긴 했습니다. 혹시 탐나시기라도 하시는 거면…….”
아니, 그 정도로 미인은 아니던데. 솔직히 비슷한 성향의 린에 비교해도 한 수 아래지. 몸매나 얼굴이나 모두 조금씩 부족하달까?
그런데 지온이 저런 반응인 걸 보면 동양 미인 버프가 제대로 들어갔나 보다. 나 말고 다른 제국 남자들은 다 그렇게 느끼는 건가?
“아뇨, 그건 전혀 아니고요. 좀 다른 생각을 해봤어요.”
“다른 생각이요?”
“네, 제국과 남부 연합국이 계속 이런 상태면 저희만 짜증 날 거 같아서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온을 남겨두고 로빈은 자신만의 계산에 들어갔다. 내일 공주와 북국의 정확한 목적을 듣고 황제와 상의해 봐야겠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거 같지는 않았으니까.
* * *
다음 날 로빈은 다시 존의 여관을 찾았다.
하룻밤 쉬고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정리한 후인지 유나 공주 역시 다부진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빈 역시 이번에는 모든 걸 결정지을 생각이었으니 저런 적극적인 태도는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었다.
“후작. 그럼 후작은 뭘 원하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곳에서 계속 사냥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주겠나?”
역시 이 돌직구 공주는 말을 돌려 할 줄 몰랐다. 귀족으로서는 낙제점이지만 그만큼 로빈이 대하기는 상당히 편했다. 그리고 공주가 저렇게 나오니 로빈도 제 뜻을 확실히 전하기로 했다.
“조건은 상관없어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외지인이 주기적으로 이곳에 드나드는 건 저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에요.”
“이럴 수가…….”
단칼에 거절하자 다시 혼란에 빠진 유나 공주.
그리고 그런 공주에게 로빈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좋아요. 우리가 서로 솔직할 필요가 있을 거 같군요. 북국 아우레우스는 단순히 마수 가죽만 필요한 게 아닌 모양인데요. 정확히 북국이 원하는 게 뭐죠?”
“음……. 사실 우리 북국은…….”
“공주님.”
공주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옆에 있던 맥라스 남작이 제지했다. 하지만 공주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맥라스 남작, 계산하는 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하는 거다. 지금 이 남자에게는 그냥 솔직히 말하고 도움을 구하는 게 빠를 거고. 한시가 급한데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생각인가?”
“하지만…….”
“됐다, 남작. 본 공주를 거절할 정도로 배포 있는 남자다. 본국의 약점을 이용해 뭔가 얻으려는 소인배는 아닐 터. 내 이 남자를 한번 믿어볼 생각이다.”
아니, 그건 배포가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
그리고 나 소인배 맞는데. 저렇게 나오면 또 대하기 껄끄러워지잖아?
그런 로빈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유나 공주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우리 북국은 다른 세 나라에 비해 전문적인 군인이 모자라다. 군사적인 부분은 세 나라에 상당히 의존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지. 연합국의 적이라고 해봤자 제국과 해상 왕국인데, 제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지 오래요, 해상 왕국은 북국보다 서국 쪽을 주로 약탈하니 큰 문제가 없었지만, 큐브란 녀석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조금 변했다.”
연합국이라고 하지만 한 국가가 아닌 동맹국보다 조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네 나라.
그러니까 남부 연합국의 결합 형태는 전생에서의 EU와 조금 비슷한 데가 있었다. 어쨌든 각 나라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였고, 직면한 외적을 상대하기 위해 뭉쳤지만 때에 따라서는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연합국 내부에 큐브란 놈이 생겨나자 그런 경향이 심해지고 있었다.
“나도 이해는 한다. 서국은 해상 왕국에서 시작된 전염병 때문에 난리가 났고, 남국과 동국은 본국보다 훨씬 많은 큐브가 생겨났으니 우리 쪽까지 지원하기는 무리겠지. 하지만 이번 일로 우리도 뭔가 믿을 구석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음…….”
“황실과의 관계가 어두워진 지금, 연합국이 제국에서 마수 가죽을 수입하는 건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레이츠 쪽과 독자적인 루트를 마련할 수 있으면 연합국 내에서 마수 가죽을 독점적으로 다룰 수 있고, 그걸 미끼로 다른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가죽으로 나른 나라의 시간을 사서 그 틈에 우리 병사들을 강군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는 마수 가죽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북국에서 독자적으로 이곳에 왔다고요.”
“그들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다. 물론 녹색 큐브를 돌파해 큐브 내부에서 입을 수 있는 갑옷을 제작할 순 있지만, 그 수준이 마수 가죽으로 만든 것보다 훨씬 못하다고 들었다. 그들은 큐브를 돌파할수록 점점 그에 상응하는 좋은 장비를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처음부터 좋은 장비로 더 안전하게 사냥할 수 있는데 그걸 안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도 결국 다시 마수 가죽을 원하게 될 것이다. 아마 머지않아 그렇게 되겠지.”
“오호… 그래요? 그건 공주님 생각인가요?”
“아니다. 우리 왕국의 재상 라바트 후작의 생각이다. 물론 본녀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약한 군사력을 메우기 위해 더 좋은 무장이 필요했다는 유나 공주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마수 가죽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재상 라바트 후작의 혜안도 제법이었고.
마수 가죽을 파는 대가로 다른 국가에 군사적 지원을 받아 시간을 끌겠다는 생각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네요. 장비는 북국으로 보내 초, 중급 큐브를 제거하고, 병력은 이곳에서 실전을 통해 강군으로 키울 생각이군요? 그리고 저와 혼인까지 하겠다는 걸 보면…….”
“그렇다. 더 이상 뭘 숨기겠는가? 우리 북국은 첫날 노란색 큐브가 폭발했다. 결국 막아내긴 했지만, 그 때문에 입은 피해는 정말……. 입에 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날 우린 깨달았다. 우리 북국의 역량으로는 저 노란 것보다 더 끔찍한 붉은 놈과 파란 놈을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렇다. 저 북국의 진정한 목적은 결국 지원병이었다. 자체적으로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책임질 수 없는 붉은색 큐브를 해결해 줄 해결사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건 남부 연합국까지 명성이 자자한 그레이츠 영지의 강군이었다.
“어떻게든 결혼해 나한테 헤롱헤롱해지면 병력을 지원해 달라고 조를 생각이었다. 부인이 예쁘면 당연히 처가에 잘 보이고 싶어지는 법. 이런 날을 위해 왕실에서 서른여섯 가지 방중술을 익혔으니 자빠뜨리기만 하면 녹일 자신이 있었건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런 암초에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도다.”
그놈의 헤롱헤롱은 무슨……. 대체 누가 공주한테 그런 이상한 지식을 주입한 거야?
어쨌든 북국의 큰 그림은 제법이었다. 공주로 미인계를 써 우선 영지에 자리 잡으면 마수 가죽을 독점 공급해 주변의 지원을 받고, 그동안 마수가 넘치는 이곳 그레이츠 영지에서 실전을 통해 병사들을 조련한다.
그리고 6개월 후에 폭발할 첫 번째 붉은 큐브를 그레이츠에서 지원받은 병력으로 막으면 그 뒤에 있을 붉은 큐브는 자신들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고 계산했을 거다.
“음……. 북국이 조금 곤란하게 되긴 했네요. 큐브가 터지면 한 국가만 문제가 아닐 텐데 다른 나라가 나 몰라라 한다니.”
“사실 그들에게 뭐라고 할 입장도 못 된다. 연합국이라고 하지만 서로 얻을 게 없다면 연합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노릇. 우리도 서국에서 발생한 전염병을 어쩌지 못했으니 그들을 비난할 자격도 없는 거지.”
“오호, 그래요? 그런데 서국의 전염병이 지금도 심한가요?”
“이제 시작이다. 약만 있으면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 있을 텐데 제국에서 약을 팔아주지 않는구나. 아니, 물건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남쪽으로 내려오는 물량을 다 해상 왕국에서 싹쓸이해 가서 우리 쪽으로 넘어올 게 없는 모양이니까.”
그놈의 전염병이 아직도 그러고 있단 말이지?
공주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저쪽의 문제를 쉽게 해결해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문제는 저기서 뭘 얻을 수 있느냐였고.
공주의 저런 태도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만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자신과 더 나아가 황제를 설득할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다른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면 북국의 무기는 뭔가요? 뭐라도 있어야 연합이 유지된다면 북국도 고유의 무언가가 있겠죠? 대체 무엇으로 우리와 거래하려 한 겁니까? 단순히 미인계만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평범하게 돈일 거 같지는 않은데요.”
“그렇다, 후작. 우리 북국은 남부 연합국 최대의 아르마늄 생산지이다. 우리의 무기는 바로 아르마늄이지.”
“오, 아르마늄…….”
“물론 이제 군사적 용도로는 아르마늄이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지만 아르마늄의 사용처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라는 걸 후작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그레이츠 쪽에 상당한 양의 아르마늄을 공급할 생각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왕건인데. 이 정도면 황제가 본격적으로 들어올 수 있겠어.
황제가 마수 가죽 갑옷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걸고넘어진 아르마늄.
하지만 황제가 다시 남부 연합국과의 관계를 서서히 회복시키려고 하는 이유, 그리고 남부 연합국이 큐브 때문에 치명적인 피해를 보지 않길 바라는 이유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아르마늄이었다.
군사적 용도로는 서서히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지만, 산업적인 용도로는 아직도 아르마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마나석의 수가 점차 늘어나면 당연히 마나석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아르마늄의 소비 역시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부 연합국이 멸망해 그곳에 몬스터만 득실대게 되면 아르마늄을 구할 방법도 요원해지게 된다.
“좋네요. 아르마늄 최대 생산지라니. 솔직히 전 몰랐어요.”
“다른 세 나라에서도 아르마늄이 생산되기 때문에 제국에서는 정확히 몰랐을 거다. 하지만 단언컨대 우리 아우레우스에서 채굴하는 원석이 가장 품질이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있다. 훗날 아르마늄의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충분히 영지 한쪽에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음, 확실히 탐나긴 하네요.”
물론 탐나긴 하지만, 내가 먹기에는 너무 큰 떡이고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큰 먹이가 있으니 저 공주와 내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르마늄을 조금 얻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지금 북국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 물론 공주님이 스스로를 바쳐야 한다는 건 변함없지만 좀 더 괜찮은 상대를 찾아가는 거죠.”
“그게 무슨 말이지?”
“우선, 그 전염병 문제는 저희가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제국이 남부 연합국 사정에 어두운 거처럼 남부 연합국도 제국 사정에 정통하지는 못한 모양인데, 그 전염병 치료제는 저희 영지에서 만든 겁니다. 물론 최대 생산지는 황도가 맞지만, 저희가 원조거든요. 남부에 그 약을 공급하는 것도 저희 영지죠. 그러니까 공주님은 저희랑 거래하는 거로 서국에 큰소리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 그럴 수가. 분명 황도에서 황실이 생산한다고…….”
“아마 가장 가까운 크라우 백작령에 가서 알아보셨겠죠? 그쪽에 보급하는 건 황도가 맞지만, 작센 백작령에는 저희가 보급하거든요. 이제 앞으로는 남부 쪽을 다 저희가 맡게 될 테니 남부 연합국은 결국 저희랑 거래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리고?”
“앞으로 마수 가죽은 황실과 직거래하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저희 영지에서 생산되는 것도 결국 황도로 넘어가거든요.”
“황실과 거래하라고? 하지만 황실은… 지금 우리랑 거래할 생각이 없다.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본 곳이 황실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뜻은 단호했지. 그레이트 A를 복제한 사업자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배상하라. 그렇지 않으면 황실과의 교역은 없다고 단단히 못 박았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그게 이상하지 않으세요?”
“응? 뭐가 말이냐?”
“그 그레이트 A의 특허를 가진 곳이 이곳이에요. 혼 래빗 가죽 생산지도 이곳이고요. 그런데 막상 가장 큰 피해를 본 저희한테 북국과의 거래를 넘긴 이유가 뭘까요?”
“뭐… 뭐? 진짜냐? 이런 망할……. 설마 황제가 우리 연합국을 엿 먹이려고 그렇게…….”
그렇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지금 다른 귀족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고.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