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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29화 (229/303)

229화

만약 군말 없이 저들을 돕게 되면 다른 귀족들이 볼 때 나는 완전 호구 되는 거였다. 황제가 나한테 몰래 부탁하면서 미안해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고.

“아니죠. 잘 생각해 보세요. 황제 폐하가 그 잘난 돈 때문에 그러시겠어요? 체면이죠, 체면. 체면만 살려주면 황제 폐하도 슬쩍 허락할 거라고요. 그리고 공주님은 황제 폐하의 체면을 적당히 잘 살려 드릴 수 있잖아요?”

“내가 무슨 수로 황제 폐하의 체면을 살려 드린단 말이냐? 혹시 황제 폐하의 첩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아니겠지?”

“너무 가셨네요.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황제 폐하의 첩이 되어서 북국을 지원할 수 있겠어요? 그러면 북국이 너무 밑지잖아요?”

“그래,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곳을 선택한 것도 변경백이라 독자적으로 병력을 이끌 수 있으면서도 북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해 그런 거였으니까.”

“그래요. 황제 폐하의 첩실이 되면 저울이 한쪽으로 너무 기울잖아요? 아마 공주님은 찍소리도 못할걸요? 거기는 진짜 호굴이에요.”

“끙, 맞는 말이지만 너무하구나. 나도 나름 괜찮은 여자이거늘.”

또 이상한 거로 자존심 상해하시네, 이분이.

물론 제법 괜찮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황후 폐하에 맞설 정도는 아니지.

“남부 연합국과 가장 가까운 영지가 크라우 백작령이죠? 그리고 그곳의 장남이 황제 폐하의 최측근이에요. 그리고 미혼이죠.”

“설마…….”

“그래요. 황실을 통해 그쪽에 중매를 넣으세요. 사람도 은근히 진국이고, 크라우 백작령이면 북국에서 배로 4일밖에 안 걸리는 가까운 곳이라 만약의 사태에 지원받기도 좋아요. 여긴 오는 데만 보름이잖아요. 말이 보름이지 나라 하나가 망할 시간이죠.”

“크라우 백작령…….”

“그리고 황도에 연락해서 청혼과 함께 아르마늄을 많이 바친다고 하시면 제가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서 하사품으로 마수 가죽을 내려달라고 청할게요. 그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요? 조공처럼 들어가는 거라 자존심은 좀 상할 수 있지만, 그것만 아니면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죠.”

“조공, 황제 폐하의 자존심을 세워 드린다…….”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 왕실에 연락해서 그 재상이란 분께 여쭤보세요. 그분의 식견이 가장 괜찮은 거 같으니까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랑 결혼해도 2부인밖에 못 되시거든요. 제 정부인이 제국의 1황녀예요. 모르셨어요?”

“…그럴 수가.”

몰랐구만.

하긴 결혼 사실을 널리 알린 것도 아니고 영지에서 아무도 모르게 한데다가 1황녀인 다이앤 자체도 그리 존재감이 있던 황녀는 아니었으니 잘 모를 수도 있었다.

황도 귀족들은 다 알아도 지방 영주 중에는 내가 1황녀랑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텐데 하물며 타국의 귀족들은 오죽할까.

그 당시 정세가 급변해 어수선한 일들이 워낙 많았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갑자기 제국 귀족 명부에 그레이츠 후작이 떡하니 튀어나와서 제법 놀랐을 거다.

어쨌든 저 유나 공주가 나랑 결혼해서는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컸기에 지금 그걸 정확하게 알려준 것이다.

그렇게 다시 회담을 마치고 내일 최종적으로 마무리 짓기로 했다.

하지만 로빈은 저들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었다. 저쪽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알려준 것이니 말이다.

* * *

영주 성으로 돌아온 로빈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푸시 캣츠를 찾았다. 이 일을 황제에게 알리고 그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분명 처한 상황을 보면 허락할 거 같은데 가끔 저 황제도 이상한 곳으로 튀어 나가니 확답을 받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 혼례라고? 그건 생각도 못 했군. 어떻게 일이 그런 식으로…….]

“무슨 예상을, 어떻게 하셨길래 그런 반응이세요? 뭔가 좀 불안한데요.”

[아닐세. 혹시 그쪽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면 후작이 격분할까 걱정했는데 그건 아니라 참 다행이군.]

그러니까, 1회 차에서 내가 저쪽과 들이받았다는 거군. 어쩐지, 저번에 연락했을 때 이상한 말로 사람을 혼란시키더니 그런 이유였나?

들이받았다라……. 그런데 왜 이 일을 나한테 맡긴 거야?

하하. 이 양반, 진짜 미치겠네.

그러니까 날 이용해서 고분고분하게 만드시겠다?

하여간 방심할 수 없다니까. 나 역시 이 위기에서 슈퍼맨처럼 날아다니는 저 황제를 이용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가끔 저럴 때를 보면 참 얄미웠다.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드는군. 혹시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상한 오해는 사양하고 싶군. 일이 잘 풀리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리고 둘 중 하나를 굳이 선택한다면 잘 풀리는 쪽이 더 낫지. 일이 꼬여서 황실이 나서게 되면 그 이권을 황실과 귀족이 나눠 가지겠지만, 만약 후작이 단독으로 아르마늄을 교역하면 그 이권을 우리가 가지게 되지 않나.]

이 양반이, 아예 대놓고 비자금을 챙기고 날 ATM 취급하려고 하네.

하지만 황제의 말대로 지금처럼 공개적으로 관계가 개선되는 것과 내 쪽에서 아르마늄을 독점하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다만 문제는 황제가 너무 당연하게 그 돈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정말 일이 그렇게 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 규모의 거래에서 내 위치는 바지사장+중계인 정도고, 실 거래자는 황제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리라고 한 무리로 묶어 계산하는 걸 보면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탑재한 모양이다.

[자,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그래서 후작의 뜻은 그 유나 공주를 조단이랑 혼인시키겠다는 거군. 우호와 사과의 뜻으로 상당량의 아르마늄을 진상하면서 말이야. 그럼 난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마수 가죽을 하사해라?]

“대충 그렇죠. 그렇게 되면 앞으로 다시 남부 연합국, 특히 북국이랑 활발하게 거래할 수 있으니 손해는 아니라고 봅니다. 귀족들도 이 정도면 폐하께서 남부 연합국을 용서할 만하다고 생각할 테고요.”

[확실히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럼 후작은 뭘, 어쩔 생각인가?]

“저야 아르마늄 한 움큼 얻어먹고, 북국 병사들이나 좀 조련해 볼까 합니다. 애들이 영 매가리가 없어 보이는 게……. 저래서 큐브나 클리어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흠, 후작이 그렇게까지 나서주는 걸 보면 그 유나 공주가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군.]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죠. 그 정도 위치에 있는 공주가 그렇게 솔직하기도 쉽지 않거든요. 아니면 제가 크라우 백작 자제에게 중신을 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잘 되면 그만이고, 안 되면 욕먹는 건데 굳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죠.”

[그렇게 마음에 들면 그냥 후작이 가지면 되지 않나? 후작이라면 어떻게든 북국이 원하는 걸 쥐여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런 솔직 담백한 스타일에 낮이밤져는 이미 저희 집에 딱 버티고 있거든요. 애완용 흑표범이요. 괜히 하나 더 늘어봤자 캐릭터만 겹치고 별로입니다, 그거.”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 있군 그래. 어쨌든 승낙하지. 손해 볼 거 없는 일이야. 조단 녀석도 가정을 꾸리긴 해야 하니……. 하지만 귀족들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북국이 잘 해줘야 하네. 그렇게만 되면 내 후작의 뜻대로 하지.]

“알겠습니다, 폐하. 제가 북국과 잘 조율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목적을 달성하고 통신을 끊으려는데 황제가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여간 얌전히 통신을 마무리하면 입 안에 가시라도 돋는 모양이다.

[그래, 처음 만난 친족은 어떻던가? 원래 이권이 걸리면 남보다 더 못한 게 친족이라지만, 그래도 응어리가 있으면 푸는 게 더 낫지. 그럼 수고하게.]

“와, 이 양반이 또 사람 찝찝하게시리……. 그런데 진짜 그러네. 내가 소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렇게만 생각한 건가? 저번 회의 때도 아무런 말도 없었지?”

자고로 사이가 별로 안 좋은 친척은 진상 짓을 하는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적어도 전생에서 수없이 섭렵한 소설들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에 당연히 그럴 거로 생각했는데 유나 공주의 부관으로 따라온 제아란 맥라스는 아직까지 혈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분명 나쁘지 않은 일인데 이게 또 은근히 맥 빠진다고 할까?

이게 무슨 기분인지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그랬다.

“뭐, 어쨌든 대충 해결되었으니 이제 아우레우스 쪽에서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네. 아, 맞다. 형님한테 연락 드려야겠군. 이번 분기는 저쪽으로 약을 넘겨야 하니 양해를 구해야지. 이게 또 은근히 부수입이라 그냥 넘어갈 순 없단 말이지.”

어차피 약을 넘길 거면 그래도 해상 왕국보다는 남부 연합국이 나았다. 그쪽에서 약의 대가로 받을 아르마늄 역시 제법 쏠쏠했고.

그리고 약이 해상 왕국으로 대량 넘어간 이유도 확인해야 했으니 어쨌든 연락을 한번 하긴 해야 할 거 같았다.

* * *

로빈과의 통신을 마무리한 황제, 페리안은 자신의 부관인 젝트와 조단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그리고 일의 당사자가 된 조단에게는 서둘러 그레이츠 후작령을 방문하라고 명했다.

“…결혼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정략혼을…….”

“후작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나쁘지 않아. 군사적으로는 조금 부담스럽겠지만, 그건 그때그때 상황 봐가면서 후작과 연계하도록 하지. 그리고 후작이 그렇게 자신 있어 하는 걸 보면 사람도 나쁘지 않은 모양이야.”

“가문과 제국에 보탬이 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그건 그렇게 처리하고. 젝트, 따로 길드를 설립하는 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폐하의 뜻대로 서두르고 있습니다. 제국 은행 각 지점에 따로 담당자를 선출해 업무에 관한 교육 중입니다. 용병 길드에도 상황을 전달했고요.”

“반발은 없던가? 용병 길드에서는 자신의 밥그릇을 뺏긴 기분일 텐데.”

황제는 큐브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는 민간 조직을 용병 길드와는 별개로 운용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용병 길드가 운영해 온 스타일로는 위험 부담이 큰 큐브를 관리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원을 정확히 판별할 수단도 없는 용병들을 어찌 믿고 큐브를 맡길 수 있겠는가. 황제는 무조건 확실한 인원들, 그리고 신원이 분명한 자들에게만 큐브를 맡길 생각이었다.

“용병 길드 지부가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용병의 수가 크게 줄어든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까요. 지금 있는 지부와 본부의 인원들은 황실에서 고용한 거로 하고 다시 교육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걸 더 반기더군요. 안정적으로 소득을 얻을 수 있으니 차라리 이게 낫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가장 안정적인 건 역시 공무원.

용병 길드에서 일하며 마땅한 소득 없이 손만 빠는 것보다 차라리 황실에 고용되어 어용 길드에서 일하는 게 낫다는 그들의 판단 역시 그리 잘못된 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크게 한탕 할 순 없겠지만 꾸준히 안정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적인 선호도 문제인데, 기존 용병 길드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대부분 안정적인 걸 선호하는 모양이다.

“좋아. 그들은 잘 교육해서 황도와 인근 지부에 따로 임명하고, 각 지방은 영주들이 관리자를 알아서 선출하게 하게. 그런 것까지 황실에서 관여하면 반발이 있을 거야. 물론 종합적인 감찰은 황실에서 하는 거로 하고.”

“네, 폐하.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어떻게든 신원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이게 가장 중요할 수도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 * *

그렇게 황제가 새로 설립될 클리너 길드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 로빈은 라이언에게 연락해 양해를 구했다.

약품을 판매해 제법 쏠쏠한 수익을 올린 라이언으로서는 조금 서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쿨하게 그러라고 승낙했다.

[잘됐네. 이제 해상 왕국 쪽으로 굳이 물량을 넘길 필요 없거든. 뽑을 건 다 뽑아서 말이야.]

“그래요? 저번에 보내 드린 건 아예 대량으로 그쪽으로 넘기셨다면서요? 어떻게 된 건가요?”

[아아, 일이 갑자기 급하게 돌아가서 말이야. 놈들하고 해룡 가죽을 두고 거래를 좀 했어. 우리도 그렇고, 크라우도 그렇고, 무장이 좀 간당간당했거든. 마수 가죽이나 해룡 가죽이나 마찬가지더라고.]

“해룡이면…….”

제국에 마수가 있다면 해상 왕국에는 해룡이 있었다.

해상 왕국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깊은 바다에 사는 해룡은 로빈에게도 익숙한 시 서펜트처럼 생긴 거대 생물이었는데, 종종 해상 왕국 근처 바다에서 난동을 부리는 패악한 놈들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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