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백랑 역시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어 지금까지 영주 성에 머물러온 것이다.
“우선 지금은 한창 마수 사냥에 집중하고 있어서 당분간 문제는 없을 테고, 기사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가면 그때 다시 고민해 보려고.”
“그렇군요. 확실히 그게 옳겠네요. 그런데 아직도 마을 전체가 마수 사냥 중이에요?”
“그렇지. 원래 돈이 안 돼서 굳이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잡은 건 아니었잖아? 마을에서 따로 잡아서 우버 마을까지 나가 상인들에게 파는 것도 쏠쏠하다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부터 꾸준히 모아놓는 건데 그랬어. 우리가 모아놓은 게 2년 치던가, 3년 치던가 그렇지?”
“그렇죠.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상급 마수의 것처럼 손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중급 마수 가죽은 관리하는 데도 제법 신경을 써야 하니까요. 지금처럼 하급 마수의 가죽을 가공한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고요.”
“하긴 그게 아니라도 몇 년 전에는 가관이었지.”
로빈은 가죽이 좋은 가격에 팔린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가죽을 모아놓지 않고 근래에 와서야 물량을 모으기 시작한 건 모야족의 상황이 사냥은 어려운 상태였고, 영지의 여건상 몇 년이나 가죽을 보관하기 어려워서였다.
특히 모야족의 경우 따로 사냥을 나서기보다 내실을 기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청년층이 늘어나고, 꾸준히 훈련하며 실력도 늘어 하급 마수는 껌이요, 중급 마수도 해볼 만하다고 덤벼들고 있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모야족은 청년이 부족해 극심한 여초 현상에 시달렸고, 제대로 싸울 줄 아는 남자들은 모두 부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울 수 있는 자들의 수도 기존의 전사들과 예비 전사들 일부에 불과했다.
결국 로빈과 백랑이 무리하게 대수림에서 사냥하는 것보다 소년들을 육성하고 식량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그들의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그 힘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뭐, 그래도 혹시나 해 모아놓은 게 큰 힘을 발휘했으니 그 정도면 만족해야죠. 이제 앞으로 계속 사냥하면서 경험도 쌓고 물량도 확보할 수 있을 테니 전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하긴, 그건 그래. 좋아. 그럼 난 다시 훈련이나 하러 가보실까?”
“네, 백랑 님. 그래도 가능하면 다치지 않게 신경 써주세요.”
“알았어, 영주님.”
* * *
백랑이 병사들을 조련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로빈이 다시 관저로 돌아가는데 웬일로 실비아가 그를 기다리고 했었다. 벌써 며칠 전에 히센과 발견한 그 조합식에 대한 분석을 마친 모양이었다.
“영주님, 여기 계셨어요? 후후, 실비아가 드디어 조합식을 해석했답니다. 오늘 제대로 칭찬받을 수 있는 각인 거 같은데요.”
“오, 그래? 무슨 조합식인데.”
“그러니까 이 조합식은 일종의 페널티 포션이에요. 좀 쉽게 설명하면, 힘이 세지는 대가로 움직임이 느려진다든지, 아니면 한꺼번에 큰 힘을 뽑아내고 며칠 동안 앓아눕는다든지 그런 방향으로요. 재료와 배합에 따라 응용은 다양한데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그래요.”
“페널티 포션이라……. 적당히 잘 쓰면 쓸 만은 하겠네?”
“네,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급할 때 쓰고 며칠 쉬면 그것도 나쁘지 않죠.”
실비아의 말대로 정말 급할 때는 구명줄이 되어줄 수도 있으니 생각보다 더 괜찮은 포션이었다. 특히 재료와 배합 능력에 따라 응용할 수 있는 범위도 제법 넓어 보였고.
황실에서 발견했다는 증강 포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쪽이 더 다양한 효과를 부여할 수 있으니 황실에 보고하고 다양하게 제조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물론 페널티가 있지만 이런 물약은 페널티가 있을수록 효과 자체는 탁월하다는 의미였으니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실비, 혹시 내가 쓸 만한 물건을 만들 순 없을까? 아무래도 내가 전투에 나서야 할 거 같은데 그게 여의치 않아서 말이야. 알다시피 내가 좀 그렇잖아?”
“그렇죠. 우리 영주님은 전투에 있어서는 정말 괴멸적인 재능의 소유자죠. 그런데 꼭 영주님이 전투에 나서야 할 일이 있나요?”
“그게 말이야…….”
로빈은 실비아에게 지금 자신이 고민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자신의 스킬을 썩히는 게 아까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온다고.
그리고 몇 달 후에 있을 R-B U10급 큐브 공략에 참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로빈의 고민을 진지하게 경청하던 실비아는 이것저것 점검하며 로빈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니까, 영주님의 장점은 무언가를 확인하고 분석, 예측하는 능력이네요. 그 능력이 상위 큐브를 공략하는 데 꼭 필요한 거 같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걱정이고요.”
“그래, 맞아. 방법이 있을까?”
“어려운 문제네요. 확실히 영주님이 단련해서 누구처럼 잘 싸우는 건 좀 무리죠. 그러면 무슨 변칙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단 건데……. 우선, 제가 연구를 좀 해봐야 할 거 같아요.”
“그러냐? 근데 연구하면 답은 있겠어? 너 저번에 내 체질 개선한다고 5년이나 이상한 걸 먹여놓고 아무런 효과도 없었잖아? 이번에 또 그러면 조금 곤란하거든? 지금은 그때처럼 그렇게 여유 있는 시기가 아니니까.”
로빈이 일곱 살인가 여덟 살부터 무려 5년이나 먹은 체질 개선제.
하지만 뭐가 개선되었는지 지금까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런 이상한 게 나올 거 같아 넌지시 말을 꺼낸 건데 실비아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에이, 영주님. 지금 그거 엄청 대단하거든요. 어제도 제가 체질 개선의 효과를 톡톡히 누렸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효과가 있다고? 그게 대체 무슨 효과가 있는 건데? 아아, 야. 설마 정력이나 이딴 소리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체질 개선 덕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거든.”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요. 그 체질 개선제는 정액의 향과 풍미를 바꾸는 개선제예요. 모르셨어요? 아시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그런 것도 있어?
잠깐, 그러니까……. 내가 5년이나 먹은 그 맛없는 약이 내 그것의 향과 맛을 바꾸었다고?
대체 왜 그딴 걸 만들…….
하하, 미치겠네. 어쩐지 그 비린 걸 그렇게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다 했다.
와. 세상에, 진짜. 넌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녀석이길래…….
실비아가 나에게 그 개선제를 내민 게 대략 일곱 살이나 여덟 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그때쯤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녀석은 겨우 일곱 살이면서 훗날을 위해 그런 걸 만든 것이다. 정말 대단한 큰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일곱 살 주제에 어떻게 그런 걸 알고 만들었냐? 얼핏 들어봐도 엄청나게 수준 높은 약인 거 같은데.”
“헤헤, 제가 뭘 알았겠어요? 사실 그 약은 도리아 스승님이 개발한 건데, 사람의 체질에 정확하게 맞추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나 봐요. 그런데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그쪽으로는 좀 유별나잖아요? 그래서 한번 개선해 봤는데 그게 딱 들어맞는 거 있죠? 덕분에 저나 언니, 그리고 그 멍청이도 덕 좀 보고 있어요.”
“…그러냐?”
“아,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랍니다. 두 분 마님들이랑, 스승님도 같이 덕을 보고 있으니 모두가 해피? 뭐, 그런 상황이죠. 물론 그 약으로 두 분 마님의 귀여움도 제법 받았으니 제가 가장 큰 수혜자지만요.”
그러고 보니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 윌리엄과 할아버지 카인도 그 약을 같이 먹었다. 물론 체질에 맞춘 약이라니, 자신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 효과만은 마찬가지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결국 약의 창시자인 도리아 여사와 두 분 어머님도 그 혜택을 같이 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몇 년이나 억지로 먹은 그 체질 개선제의 효과가 너무 황당해서 이게 대체 뭔가 싶으면서도 그 와중에 첫 발(?)을 다이앤에게 빼앗긴 건 조금 억울했다는 실비아를 보니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그 단아한 도리아 여사가 그런 약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거였다. 의외로 만만치 않은 분이랄까?
흑마법사들이 마녀라고 부를 때 뭔가 낌새를 느끼긴 했는데 그 이상이었다. 게다가 지금도 그 혜택을 보고 있다니, 우리 할아버지도 아직 정정하신 한창때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할아버지 건강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정도로 엄청난 약을 어린 나이에 조율할 수 있을 정도로 저 실비아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거였다.
그런 실비아라면 어떻게든 나를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그리고 그걸로 큐브 안에서만이라도 내 스스로 몸을 보호할 수 있다면, 앞으로 있을 공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실비아는 조만간 결과물을 가지고 찾아오겠다고 하고는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 * *
그렇게 각자 자기 일을 찾아 열중하는 며칠이 지나자 본격적인 우기에 들어섰는지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말 징하게 내리네. 이러니까 사방에서 난리지.”
올해 우기는 소설에서 그랬던 거처럼, 그리고 황제가 예견했던 대로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황제가 철저히 준비한다고 귀족들을 단속했지만 가장 중요한 시기에 큐브가 등장해 모든 계획이 헝클어져 피해를 가중시킨 것이다.
남쪽 일부가 그대로 비에 쓸려 나가며 많은 수재민이 생겨났고, 곡창 지대가 완전히 침수되는 등 곳곳에서 피해 보고가 속출했다.
게다가 많은 백성이 수해로 시름겨워하는 가운데 큐브까지 기승을 부렸고,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증식한 큐브를 제거하기 위해 온 제국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바쁜 건 로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늘어난 큐브를 제거하지 못하거나, 클리어에 실패한 영지가 북부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큰 규모로 폭발한 건 그레이츠 후작령에 인접한 드라나 남작령.
예전에 한 번 훑어보고 예감이 좋지 않아 주의를 기울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조금만 출동이 늦었으면 영지의 존속이 위태로울 정도로 큰 폭발이었다.
그레이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남작령에서 폭발한 Y-B급 큐브를 수습하고 난 후, 로빈은 드라나 남작에게 조금 더 주의하기를 촉구했다.
물론 당시에는 남작도 고개를 숙여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로빈은 이 약속이 그저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가 알아본 바로 드라나 남작은 탐욕의 화신이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전형적인 소인배였기 때문이다.
“욕심만 가득하고, 심술보가 뚝뚝 떨어지는 자가 그렇게 쉽게 생각을 바꿀 리가 있나. 그럴 거면 영지를 그렇게 다스리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아무리 후작이라도 다른 영지의 사정까지 관여하는 건 무리였고, 로빈이 할 수 있는 건 황실에 이 사실을 보고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전국적으로 바쁜 시기에는 황제도 딱히 이런 일에 신경을 기울일 수 없을 테니 그냥 그대로 넘어가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걸 알면서도 황실에 보고하고 계속 드라나 남작령을 주시하는 것.
로빈에게는 그나마 이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북부의 다른 영지와 달리 5대 방벽은 이런 상황에서도 굳건했다. 로빈이 사전에 홍수에 대하여 충분히 고지했고, 심지어 행정관을 파견해 치수 상황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마수 가죽을 둘둘 말고 역량을 키운 5대 방벽의 강군은 갑자기 수가 늘어난 큐브도 수월하게 대처했다.
만약 5대 방벽이 큐브에 흔들리다가 겨울을 맞이하면, 마수와 큐브의 콤비네이션에 큰 낭패를 볼 뻔했으니 이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 제국의 다른 영지도 저만큼만 해주면 황제가 할 일이 크게 줄어들 텐데. 사방에서 난리니 다른 업무를 볼 수가 있나. 그 양반도 참 딱한 양반이라니까.”
급격히 늘어난 큐브를 상대하기 위해 황제는 드디어 자신의 힘을 모두 공개했다. 로빈이 던져준 마수 핵으로 육성한 것이 분명한 자신의 사병 3,000여 명으로 인근의 큐브부터 차근차근 공략해 들어간 것이다.
덕분에 베일에 싸여있던 황제의 친위대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3,000명에 달하는 사병이 대부분 기사급 무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실 예전부터 조셉 공작의 반란을 제압할 때 황제가 동원했던 병력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했던 조셉 공작 일파는 모조리 처형되었고, 그 자리에 있었던 로빈과 라이언은 입을 닫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정을 아는 귀족이 없었는데, 이번 일로 그들이 황제가 따로 키운 사병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이다.
자연히 강한 사병을 이끄는 황제의 권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황제의 사병에다가 근위대까지 합쳐지면 몇몇 대귀족이 연합한다 해도 황제에게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