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어머, 로빈. 미안해요. 저건 어떻게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아요. 그래도 먹기 좋게 가긴 했잖아요? 로빈도 맛있어하는 거 같고.”
“하~ 하~ 아흑. 그래, 더럽게 맛있네. 진짜. 너무 맛있어서 배 터져 죽을 거 같아. 조… 좀 살려주면 안 될까?”
“영주님, 미안해요. 이 벌은 나중에 받을게요. 저도 못 견디겠어요!!”
“야, 너까지 달려들면 어떡해?!”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다른 부인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발정한 실비아까지 달려들어 로빈을 그야말로 앞뒤에서 쥐어짰기 때문이다.
* * *
다음 날 아침.
실신했다 깨어난 로빈은 자신의 위에서 포만감에 가득해 잠들어 있는 린과 다리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실비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어쩐지 뭔가 찜찜하더라니. 진작에 말렸어야 했는데. 어? 그런데 린이……. 지금은 정상적인 상태 아닌가? 게다가 스킬은 또 왜 저래?”
이름: 린 그레이츠
성향: 호전적. 도전적. 호색.
타이틀: 흉포한 검은 야수(S).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L). 붉은 학살자(L). 대검의 달인(R)
패시브: 붉은 파괴 전차 (랭크 D)
액티브: ???
어이없지만 린의 붉은 학살자 옆에 붙어있던 비활성화 표시가 사라졌다. 저건 그러니까 그녀가 붉은 학살자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스킬도 검은 파괴 전차에서 붉은 파괴 전차로 변신, 심지어 랭크도 올랐다.
게다가 비어있던 액티브 스킬도 ???가 들어왔으니 뭔가 깨닫긴 한 거 같았다.
“하, 미친 기승전섹. 섹스하다 스킬 랭크가 올라가는 게 말이나 되냐? 타이틀은 또 뭐고.”
정말 반가운 일이긴 한데 지금껏 린의 성장이 정체되어 고민하던 로빈으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훈련이고 뭐고 섹스나 주야장천 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어제의 일은 절대 잊지 않고, 실비아에게 큰 벌을 내릴 생각이었다. 물론 자신을 놓고 도망쳐버린 앙큼한 다이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거친 난행을 겪어서인지 조금 수척한 로빈이 아무 말도 없이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세 여자는 그저 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는 듯한 조심스러운 태도였는데 로빈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도 꽤 오랫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앞으로 한 달간은 내 옆에 얼씬도 하지 마. 특히 밤에는.”
“흑, 그건…….”
“영주님, 한 달이라니요. 그건…….”
잠시 고민하던 로빈의 결정은 무려 섹스 금지.
자신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세 귀염둥이들에게는 이게 가장 적당한 처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 그렇게 해도 괜찮으시겠어요? 접근 금지면 서로 마찬가지잖아요? 저희가 못 하면 로빈도 못 하는 거니까요.”
응? 그러고 보니 그렇네.
벌은 쟤들이 받는데 왜 나도 같이 고통스러워야 해?
결혼 전 로빈이었다면 웃으며 상관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결혼과 동시에 이미 먹어본 놈이 되어버려 사실 혼자서 잠드는 건 자신이 없었다.
생각보다 이 세계의 성욕은 대단했고, 아무리 결혼 전 반 고자 생활을 했던 로빈이라도 독수공방을 참기는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한 달이라니.
다이앤의 지적에 잠시 움찔했던 로빈은 뭔가 깨달은 듯 야비하게 웃으며 아내들을 바라봤다.
“후후, 그러면 곤란하지. 이 기회에 첩실이나 하나 들여서 걔랑 하면 되겠네. 누가 좋을까나…….”
“헉, 처… 첩실!”
다이앤이 가장 싫어하는 첩실에 대한 이야기로 그녀를 격추시킨 로빈은 린을 바라보고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흥, 감히 주인인 날 그렇게 덮치다니. 정말 실망했어, 린. 내가 그런 널 어떻게 믿고 호위를 맡기겠어?”
“으…윽!”
호위를 맡는 일과 밤에 덮치는 건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만 지금 린에게는 그런 걸 분별할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는 가운데 로빈이 실망했음을 몇 번이나 강조하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다.
“실비, 넌 키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야. 키도 작은데 마음까지 작으니, 원. 어제 일도 결국 너의 그 알량한 복수심 때문이잖아? 넌 앞으로 상 같은 거 받을 생각도 하지 마.”
“…그럴 수가…….”
실비아에게는 앞으로 절대 상이 없을 것임을 예고하며 셋 모두를 그렇게 침몰시킨 로빈은 그제야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속이 좀 시원했기 때문이다.
“뭐, 어젯밤도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쁘진 않았는데 말이야. 그래도 심통이 나니 적당히 골려줘야지.”
그렇다면 로빈의 진심은 무엇일까?
어젯밤, 이해할 수 없는 기승전떡으로 린의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갔다. 지금은 정신이 없어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몇 번의 실전을 거치면 린도 그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고작 밤새 떡 친 걸로 저 정도 레벨업이면 남아도 많이 남는 장사인데다 린의 엉덩이에 깔려 그야말로 따먹히는 기분도 사실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쥐어짜인다는 건 여신님도 커버할 수 없을 정도의 쾌락이 계속 몰아쳤다는 뜻이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어쨌든 어제는 로빈에게 남는 것만 있는 보람된 하루였다.
뭔가 당한 듯한 기분의 억울함은 별개로 하고 담백하게 사실 관계만 따지면 그렇다는 거다.
그럼에도 오늘 여자들에게 화난 척한 건 바로 실비아 때문이었다. 물론 다이앤과 린에게 화난 척 심통을 부려 혼내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실비아를 각성시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으니 말이다.
자기의 천재성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고 있는 저 재능충을 자극해 좀 더 빠르게 좋은 결과물을 가져오게 하기 위한 연극인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나오면 실비아는 분명 그걸 만회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뭔가 특별한 걸 만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나름 노력하고 있을 테지만 뭔가 계기가 있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는 건 그 밀도와 집중도가 달랐다. 특히 실비아처럼 천재적인 재능을 갖춘 기분파인 녀석은 더욱 그랬고.
“물론, 연구하는 기간 동안 겪을 마음고생은 덤이지. 결과는 좋았지만 잘못을 했으니 혼나긴 해야 하니까. 그런 큰일을 이 정도로 넘어가다니, 역시 난 관대하군.”
결국 같이 즐겨놓고 자신이 깔린 것만 억울해하는 쪼잔한 로빈은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며 만족했다.
* * *
린이 다시 정상적으로 단계를 밟기 시작하자 로빈도 슬슬 R-B 큐브의 공략조를 구상할 시기가 되었음을 느꼈다.
큐브가 처음 생겨난 게 다섯 번째 달, 그리고 붉은색 큐브가 폭발하는 게 거의 한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열한 번째 달이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겨울에 들어가기 전에 처리하는 게 옳았고, 이제 여름이 거의 지났으니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물론 그전에 시기가 임박해진 파란 큐브, B-C도 처리해야 하지만 그건 붉은색에 비하면 애피타이저 수준밖에 되지 않아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실비가 해결책을 못 찾거나 그 해결책이 별로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예비 인원까지 생각해야겠네.”
큐브 공략전은 마수 토벌이나 전쟁보다도 멤버들 간의 호흡이 더욱 중요했다. 한 명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호흡이 맞지 않는 순간 위기가 찾아올 수 있는 상급 큐브 공략에 사전에 손도 맞추지 않고 멤버를 투입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가능하면 붉은색 큐브를 처리하러 들어가기 전 실비아가 뭔가 해결책을 찾았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고려해서 멤버를 구성해야 할 거 같았다.
“아, 그전에 장비부터 좀 맞추고.”
로빈이 찾은 곳은 히센의 연구실과 장인들의 공방이었다.
우선 어제 린이 말한 대로 새로운 마법 사슬을 만드는 일과 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마법 물품을 만들 수 있는지 히센에게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큐브에서 다양한 재료를 얻기 전에는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참고 기다린 거였다.
“그러니까, 초소형 마법 구슬을 만들어달라고? 그것도 귀에 착용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네, 히센. 통신 거리는 100미터에 미치지 못해도 괜찮은데 크기가 아주 작고, 동시에 여러 명이 통신을 할 수 있어야 해요.”
로빈이 원한 마법 물품은 바로 다자간 통신 장치.
큐브 공략 중 다양한 변수 때문에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걸 막기 위한 특별한 장치였다. 기존의 통신 수정구에 비하면 대단히 복잡한 장치지만, 어쨌든 통신 수정구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감해하는 히센을 보니 역시 쉽지 않은 일인 거 같았다.
“그런 연구가 없었던 건 아니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라 연구가 중단되었지만…….”
“오, 그래요?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라도 그걸 만들려고 하면 만들 순 있다는 거네요?”
“그건 그런데…….”
“문제가 뭔데요?”
“재료가 문제지. 큐브 내에서 사용하기 위해 그걸 만드는 거겠지? 마나석이야 그렇다 치지만, 그 정도로 정교한 정치를 만들려면 마나석과 보석을 합성해 몸체를 만들어야 하고, 당연히 다양한 품질의 보석이 필요할 거야. 작은 몸체에 섬세한 마법진을 새기고 그걸 발동하려면 품질은 물론 강도까지 생각해야 하지.”
“아… 보석이요? 그건 좀 난감하네요.”
큐브에서 나오는 물건 중 가장 가격이 비싼 건 단연 보석이었다. 거의 나오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보석의 가치가 희소성임을 생각했을 때 큐브제 보석은 시중에 팔리는 보석보다 그 가격이 월등히 높았다.
물론 그레이츠의 재력으로 출혈을 감수하고 구하려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지만 진짜 문제는 그 희소성 자체였다. 사람들이 잘 팔려고 하지도 않고, 가끔 경매에만 나올 뿐이니 물량을 확보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역시 너무 이른가? 시간이 지나서 보석이 더 많이 나오면 가능하긴 하겠지만…….”
“그래, 바로 그게 문제야. 물건을 구할 수가 없다는 거. 연구까지 하려면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나 필요한 일이니까. 일반 보석으로 연구해 봤자, 큐브의 보석은 재질부터가 달라서 다시 연구해야 할 거야.”
“그렇죠. 이름만 같은 보석이지 전혀 다른 물질이니까요.”
물건이 없다라……. 난감하네.
“어쨌든 그게 불가능은 아니라는 거죠?”
“불가능은 아니야. 돈이 많이 들다 뿐이지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어. 큐브에서 생산되는 보석은 생각보다 마법진이 잘 먹는다고 하니까. 우리 영지에서도 노란 보석이 한 개 나왔었지? 그놈을 연구하고 있는데 기존의 보석보다 내구성이 월등히 뛰어나더구나.”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쨌든 이건 앞으로도 제법 중요하게 취급될 물건이니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아, 그리고 전에 미스릴과 마수의 뼈, 그리고 큐브의 상관관계를 알아보라고 했었지?”
“오, 뭔가 나왔나요?”
“그래, 특별한 건 아닌데, 도리아랑 미스릴과 마수의 뼈를 분해해 면밀히 살펴보니 조금 신기한 점이 있더구나.”
“뭔데요?”
“배열의 차이가 있을 뿐 미스릴과 마수의 뼈가 기본적으로 같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었어. 그 배열에 현혹되어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는데 둘을 같이 놓고 보니까 그제야 그게 보이더구나.”
“같은 구성이라…….”
“그래, 그러니까 아마 미스릴은…….”
“마수의 뼈가 땅속 깊은 곳에서 변형을 겪어 만들어진 광석이란 거네요. 그래서 마수 산맥 인근에서만 발견되었고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탄소가 환경에 따라 흑연도 되고 다이아몬드도 되는 것처럼, 마수의 뼈가 오랜 시간 변형을 겪어 미스릴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이제야 왜 미스릴이 큐브에서 없어지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마수의 부산물이 큐브에서 유요한 이유는 아직 미지수지만, 적어도 다른 예외가 추가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인챈트 방법을 바꾸면, 미스릴에도 마법을 부여할 수 있겠더구나. 지금까지 미스릴은 인챈트할 수 없다는 과거의 통설에 매몰되어 고정관념에 빠져있던 거지. 사실 그 통설은 천 년이 넘은 학설이고, 마법 공학은 그 이후에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는데 그걸 생각하지 못한 거야.”
“천 년 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지금의 기술로는 가능하다는 거네요.”
“아직 그 방법까지 찾아낸 건 아니지만 가능성만은 충분해. 같은 재질로 된 마수의 뼈에도 마법을 인챈트할 수 있으니 거의 확실하지. 사실 그 시절에는 마수의 뼈에 인챈트하는 기술도 없었거든.”
“그럴듯한 가설이네요. 미스릴에 마법을 부여하면……. 확실히 지금보다 더 괜찮은 방어구가 나오겠죠?”
“그렇지. 상급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것보다 훨씬 더 튼튼한 놈이 탄생하는 거지.”
그 정도면 황제가 훗날 큐브를 공략하고 얻게 될 전신 갑주 ‘얼어붙은 영광’보다 더 대단한 거 아닌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