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소설에서 설명할 때 상급 마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보다 오히려 나은 면이 있다는 식으로 묘사됐었는데, 저건 훨씬 튼튼하다는 거잖아?
문제는 미스릴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데, 그 미스릴로 갑옷을 얼마나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우리 쪽에 있는 미스릴 갑주로 갑옷을 만들어 마법을 인챈트하면 몇 개나 가능할까요?”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스무 개는 될 거 같은데? 통짜 미스릴 갑옷보다 마수 가죽을 추가로 덧대는 게 오히려 나을 거야. 아무리 미스릴이라도 어쨌든 광석이라 착용감이 가죽 갑옷보다 좋은 건 아니니까. 그리고 실로 뽑아 다른 공정을 추가해 만들면 제법 튼튼한 걸 많이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래요?”
“천 년이 지나는 동안 발전한 기술을 찾아보면 예전처럼 통 미스릴이 아니라도 충분히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하지.”
“일이 이렇게 되니 황제께 바친 미스릴 갑주가 조금 아까워지네요.”
“하하, 그 덕분에 승작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그러면 곤란하지 않나?”
“아, 그랬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열 받는데요. 그것만 안 바쳤으면 승작도 안 하고…….”
“그랬으면 지금의 후작 부인도 없었겠군.”
“…그러네요. 취소할게요.”
그래,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야. 어차피 우리보다 더 빡세게 뛰어다니는 게 황제인데 이제 와서 그런 생각 하면 곤란하지. 그때 백작으로 승작하지 못했으면 다이앤이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테니, 그것도 그렇고.
차라리 이 사실을 빨리 황실에 알리고 황실에서 미스릴 갑주를 만들게 해 그 과실을 나누는 게 훨씬 나았다. 지금 그 미스릴 갑옷은 황실 창고에 잠자고 있을 게 분명하고, 내가 지금 말해주지 않으면 그걸 쓸 생각조차 못할 테니 말이다.
혼자 개발하는 것보다 머릿수가 많은 황실이 끼어들면 훨씬 빠르게 연구가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개발된 갑옷을 황제나 친위대가 입고 설치기 시작하면 붉은 큐브도 좀 더 수월하게 공략할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제국이 더욱 안전해지게 된다.
그리고 제국의 안정은 나와 그레이츠를 포함한 북부의 안정이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우리에게 이익이었다.
“그래, 크게 보자고. 우리 영지 에이스들한테 줄 건 충분하니까. 너무 크게 먹으려고 하면 배만 터지는 법이야.”
그렇게 황제에게 보고할 내용이 하나둘씩 늘어만 가고 있었다.
“아, 그리고요. 큐브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사슬을 따로 만들 생각인데요. 큐브 메탈에 마수의 뼈를 조합하면 내구성도 나쁘지 않겠죠? 중력 마법을 부여해 놈들의 움직임을 방해할 생각이거든요.”
“나쁘진 않겠군. 큐브 메탈과 마수의 뼈라…….”
“가능하긴 하죠?”
“장인들에게 따로 물어보긴 해야겠지만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아. 큐브에서 각성한 제련 스킬 때문에 장인들의 수준도 제법 올라갔으니까.”
“다행이네요. 그럼 그건 간단한 일이니 그것부터 해결하고, 미스릴로 새로운 갑옷을 만드는 걸 연구하죠. 아무래도 통신 장치는 조금 미뤄야 할 거 같아요.”
한 번에 모든 연구를 진행하기에는 인력이 모자라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통신 장치도 물론 중요하지만, U10 정도라면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을 가능성도 컸으니 말이다.
이번만 어떻게 넘기면 새로 생길 붉은 큐브는 통신 장치를 만들어 좀 더 안정적으로 클리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물론 황제에게 따로 문의하면 상황이 또 어떤 식으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 당장은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그래도 마법 갑옷만 인챈트하다가 뭔가 연구다운 연구를 하니 좀 낫긴 하더군. 친구들도 비슷한 반응이고.”
물론 마법 공학자가 하는 일이 원래 그렇다지만 마법 갑옷이나 무기만 계속 만드는 건 상당히 지루한 작업이었을 거다. 저 히센이나 그 친구들이나, 특수한 상황(모야족 처녀들에게 코가 꿰인)이 아니었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방어구 제작을 멈추고 미스릴을 연구했던 시간이 더욱 알차게 느껴진 거 같았다.
“그래요? 하긴 지금까지 반복 작업이 너무 많긴 했죠. 지금도 히센은 특별한 연구를 하고 있잖아요? 무려 이계 언어로 된 문서를 분석하고 있으니까요.”
“끙, 그건 말도 하지 말게. 진짜 남사스러워서. 내 살다 살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설은 또 처음이야. 무슨 단서나 정보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답답해 죽을 지경이지.”
“음……. 그 정도예요?”
무려 쌍둥이를 동시에 냠냠해 인생 자체가 야설인 히센이 남사스럽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역시 수간이 문제인가?
다른 건 몰라도 수간만은 이곳에서도 터부시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몬스터를 짐승처럼 생각한다면 히센의 저런 반응이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히센의 생각과 같은 이유로 그 작업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그래요, 히센 님. 하지만 그걸 멈출 수 없는 건 아시죠? 혹시 알아요, 나중에 무슨 대박이라도 건질지?”
“정말 그랬으면 좋겠구만. 안 그러면 내가 속병이라도 걸릴 거 같아.”
히센에게 힘들겠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연구해 달라고 격려한 로빈은 생각난 김에 푸시 캣츠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푸시 캣츠를 찾은 로빈은 황제에게 연락을 넣었다. 따로 비밀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 관저에서 연락해도 되지만 굳이 이곳을 찾은 건 겸사겸사 다이앤에게 압박(?)을 넣기 위해서였다.
[의외로군. 후작이 또 연락하다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흠흠, 무슨 말씀을 그렇게 각박하게 하십니까? 문안 인사를 올리기 위해 연락했을 수도 있는데요.”
[그건 후작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게. 자네도 양심은 있을 테니 말이야.]
사실 그건 그렇다. 무슨 문제가 있어야 서로 연락하는 사이 맞지, 뭐.
내가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이긴 하지만 원래 황제와 지방 귀족이 대부분 그런 관계였다. 그런데 굳이 그걸 지적한다는 건……. 설마 내가 이번 분기 귀족 회의 때도 영지를 핑계로 황도에 올라가지 않아서 저러는 건가?
확실히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내가 영지에 있는 게 제국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황제다 보니 예전처럼 심심하면 황도로 올라오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귀족 회의까지 빼먹은 건 좀 그랬나 보다. 물론 그 시기에 다른 영지로 출진하긴 했지만, 그 출진은 굳이 내가 따라갈 필요 없던 가벼운 큐브 폭발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귀족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을 정도로 바삐 움직여 북부의 평화를 지킨 그레이츠 후작은 무슨 일로 연락을 넣었는고?]
정답이네. 역시 그거였어.
이번 귀족 회의에서는 클리너 길드를 정식으로 발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안건이 올라와 있었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된 건 클리너 길드와 제국 은행의 연계.
그런 단체의 설립 필요성에 대해서는 귀족들 모두 인정하는 바였지만, 일차적으로 모든 물품을 제국 은행에서 사간다는 게 귀족들의 불만이었다.
결국 자기네 영지에서 나온 물품은 자기들이 구입하고 싶다는 건데, 이게 이권과도 관련된 부분이라 귀족들의 마음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 역시 초반에는 물품을 독점해 빠르게 큐브를 클리어해 나가야 하는 만큼 마냥 양보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귀족들도 자신들이 직접 기사단을 운영해 클리어한 큐브의 전리품은 그들이 가져가기 때문에 자신들이 쓸 물자는 충분히 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황제 역시 그들의 입장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바였기에 큐브 시스템이 안정화되는 시기까지는 제국 은행이 물량을 독점하고, 그 뒤에는 각 영지의 귀족들에게 우선 매수권을 풀어주는 거로 절충하려 했다.
여기서 다시 문제가 된 게 바로 그 기간.
황제는 5년을 제시했고, 귀족들은 2년을 제시한 상황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것이다.
로빈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그냥 3년 정도로 합의 보면 문제도 없을 텐데 쓸데없이 에너지만 낭비한다 싶어 귀족 회의에 불참하기로 결정했었다.
특별한 안건이 없었으면 황도의 상황을 염탐(?)하기 위해서라도 황도에 들르려고 했는데 저런 쓸데없는 걸로 논쟁이라니.
물론 황제는 나라도 올라와 한 손 보태기를 바란 모양인데, 솔직히 그건 아니었다.
사실 2년이든, 3년이든 초반 1년만 넘기면, 아니 솔직히 첫 번째 붉은색 큐브만 문제없이 클리어하면 그 후에는 어느 정도 원활하게 돌아갈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별로 끼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어쨌든 귀족 회의의 결과 황실의 우선 매수권은 5년으로 확정되었다.
물론 큐브가 한 번도 폭발하지 않은 채 한 분기를 마무리 지으면 큐브 시스템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판단하고 우선 매수권을 풀어준다는 단서가 있었지만, 회의 자체는 황제가 압살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매수권을 가져가기 위해서라도 영주들이 더욱 분발할 테니 황제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결론이었다.
결국 내가 없어도 무조건 이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저러는 건 황제가 너무 쪼잔한 거였다.
“예. 뭐, 별일이라면 별일인데요.”
처음에는 조금 퉁명스러운 태도였지만 로빈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황제 역시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그도 깨달은 것이다.
[미스릴… 미스릴이라. 미스릴이면 마수 가죽으로 만든 것보다 더 튼튼하겠지?]
“예, 아무래도 그렇죠. 내구도랑 방어력 하나는 정말 끝내주더군요. 거기에 마법까지 부여할 수 있으면…….”
[그래, 이번 레드 큐브 공략전에 큰 도움이 되겠어. 창고에 있는 놈을 당장 꺼내야겠군. 문화적인 가치뿐인 줄 알았던 물건이 그런 의미가 있었다니. 아까운 물건을 놀릴 뻔했군 그래.]
“그건 그렇죠. 사실 이제 와서 굳이 미스릴을 연구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솔직히 로빈도 아무 생각 없이 그걸 입고 큐브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전혀 몰랐을 일이었다. 소설에서 언급된 부분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소형 통신기를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게…….”
[그렇군. 확실히……. 10인 정도라면 몰라도 25인이나 그 이상이 되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일리가 있는 말이야. 보석이라……. 물건이 많진 않지만 한번 알아봐야겠군.]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 저희 영지도 그게 좀 필요해서요.”
[아아, 그렇지. 후작의 영지에도 레드 큐브가 있었지? 전국에 다섯 개밖에 없는 건데 후작도 참 운도 없구만.]
이 양반이 다 알면서 저러네. 저거 지금 약 올리는 거지?
큐브가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전국에 총 다섯 개의 붉은색 큐브가, 열세 개의 파란색 큐브가 나타났다.
불행히도 그레이츠 후작령은 그 다섯 군데 중 하나였고, 황도를 제외하고는 파란색과 붉은색이 동시에 나타난 유일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소설에서처럼 제법 많은 영지에 나타난 줄 알았던 붉은 놈이 시기가 빨라서 그랬는지 다섯 개뿐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속이 쓰렸던지.
황도를 포함한 대도시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북쪽 외지에 있는 그레이츠령은 왜 포함되었는지 의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붉은 놈을 자력으로 공략할 만한 영지가 몇 안 되고, 우리 영지가 그중 하나였기 때문에 근처 다른 곳에서 생겨났어도 우리가 가서 공략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영지의 운명을 걸고 한 판 벌여야 한다는 사실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황도의 큐브는 언제 클리어하실 생각이신지요? 아직 여유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계획은 있으시겠죠?”
[우선 파란 놈을 처리하고 며칠 후에 바로 시작할 생각이야. 그리고 순차적으로 레오니스, 리아넨, 그리고 리아누스까지 처리하면 대충 마무리지. 그레이츠 쪽은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
“네, 그래야죠. 경험도 중요하니까요.”
[그래, 그래서 다른 영지의 것을 클리어할 때는 그쪽의 병력에 나 하나만 추가로 투입해 클리어할 생각이네. 그들에게도 경험은 필요하니까.]
역시 황제도 독식보다는 경험의 축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큐브가 늘어날 텐데 자신 혼자서 설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씨, 우리도 황제 정도는 투입해 달라고 부탁할까? 최소 린급 괴수가 둘이면 그만큼 편할 텐데.
하지만 황제가 들어오면 지휘 자체를 황제가 맡게 되기 때문에 내가 가진 장점을 활용하기 힘든 상황이 되는지라 애써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우선 장비는 황실에서 따로 연구해 보겠네. 연구에 성공하면 바로 정보를 건네주지. 그리고 그놈들 말인데, 놈들이 계속 용병 길드를 들쑤시는 걸 발견하고 꼬리를 잡았네. 용병 길드를 존속시키고, 황실과는 별개로 큐브를 클리어해야 한다나? 대체 이놈들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