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두 번째 전언이 따로 있긴 했지만, 만약 내가 미스릴을 바쳤으면 좋다고 냉큼 받았을 황제였다. 서로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 역시 그랬을 거고.
그러니 다시는 이런 물건을 황제에게 요청하지 말아야겠다. 뭐, 이제 딱히 황실 쪽에서 지원받을 만한 물건이 별로 없기도 했다.
“미스릴의 연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마법을 부여할 수 있겠어요?”
“내가 이번에 마법 부여 스킬을 각성한 게 아니라 여간 답답한 게 아니더군. 마법 부여 스킬을 따로 각성한 친구 놈들과 같이 작업하고 있는데 슬슬 길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건 좋은데, 아무래도 이번 붉은 놈을 상대할 때까지는 좀 무리겠죠?”
“그건 좀 힘들지 싶군. 아마 황실도 마찬가지일 거야.”
“역시 그런가요? 흠…….”
“하지만 완성만 되면 큐브 내외에서 모두 사용 가능한 고성능 갑옷이 탄생하는 거니 기대하게나.”
“아마 그렇겠죠. 상급 마수의 것보다 더 튼튼한 갑옷이라니. 확실히 도움이 되겠어요. 나중에 상급 마수를 잡을 때도 그렇고요. 어쩌면 그 이상이라도…….”
그레이츠령에서 산다는 건 언제나 마수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이야 상급 마수 이상이 잠잠하지만,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겨 재앙급 마수가 움직인다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정말 희박한 확률이요, 소설에서 등장하지도 않은 이야기지만 사람의 일은 정말 알 수 없으니 대비할 수 있는 만큼 대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예전 언데드 난리 때 얼핏 봤던 그 말도 안 되는 대형 늑대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 * *
그렇게 며칠 뒤, 눈이 퀭해진 실비아가 드디어 결과물을 들고 로빈 앞으로 나섰다.
잠을 잘 자지 못하여서 그런지 낯빛은 초췌하고, 눈가에는 우울함만이 가득한 걸 보면 뭔가 또 엉뚱한 걸 만들어온 모양이었다.
만약 진짜 좋은 걸 만들었으면 저 실비아가 이런 태도일 리 없었으니 말이다.
“후. 영주님, 뭔가 만들긴 했어요. 하지만……. 이게 영주님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이게 뭔지 잘 파악이 안 되어서요.”
이 녀석이 대체 뭘 만들었길래 이래?
로빈은 실비아의 태도에서 마음을 비우고 그녀가 내민 물약을 살펴봤다.
“…미친. 이런 걸 만들었다고? 아니, 이게 대체…….”
“왜요, 영주님? 이거 괜찮은 거예요? 제가 예상한 것보다 페널티가 너무 강해서 좋은 거 같으면서도 도통 이해가 안 가던데, 영주님은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허, 와……. 그런데 이거 페널티가 왜 이래?”
실비아가 내민 물약의 페널티는 무려 성욕 폭발.
사용 시간이 종료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성욕이 끓어오르는 물약이었다. 누가 봐도 이 녀석이 만들었음이 분명한 그런 페널티가 아닐 수 없었는데, 전투용 물약에 굳이 저런 페널티를 넣은 녀석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그나마 가장 줄인 게 그거였다고요. 만드는 데 하루밖에 안 걸렸는데 페널티 바꾸는 데만 3일이나 걸렸거든요.”
“뭐? 3일?”
“그럼요. 아무리 그래도 한 번 먹으면 팔이 날아간다든지, 한 달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건 너무 심하잖아요.”
… 페널티가 그 정도라고? 그게 말이 되나?
이런 부류의 페널티는 기본적으로 등가 교환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이쪽 큐브 시스템이 판단하길, 팔이 날아가는 것과 한 달간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게 비슷한 가치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 정도 페널티를 성욕으로 대신했다는 실비아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진짜 가능한 건가?
“그게 가능해? 성욕이 일어나는 거로 그런 페널티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데.”
“…그거야 그렇죠. 단서가 있어서요.”
“단서?”
“예, 성욕을 풀지 못하면 죽어요.”
“…그럼 그걸 가장 먼저 말했어야지.”
그 정도라면 어느 정도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 1차 페널티로 상쇄하지 못하면 다른 것보다 압도적으로 큰 2차 페널티가 있는 구조라면 확실히 저울추가 비슷해질 거 같았다.
그 와중에 깨알같이 성욕 관련 페널티인 건 참 실비아답긴 하지만 그래도 3일이나 연구해 바꿀 만한 가치가 있긴 했다.
“어차피 영주님이 전투에 나설 땐 무조건 그 멍청이도 같이 가는 거잖아요? 그러니 최소한 죽을 일은 없겠다 싶더라고요. 물론 급하면 아무 여자라도 잡고 풀어야겠지만……. 웬만하면 그 멍청이한테 풀어주세요. 큐브에 들어가실 땐 밖에 저와 언니도 대기하고 있을게요. 큰 천막 쳐놓고요.”
“…뭐, 그래. 좋을 대로 해. 그런데 이거 양산은 가능한 거야?”
“노. 안 돼요. 하나 만들 때마다 최소한 마수 핵 정도의 효율을 내는 마나석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대빵 큰 놈이나, 아니면 중급 수십 개? 최소한이 그러니 당분간은 무리죠. 이제 우리 마수 핵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러네. 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세 개만 더 만들어놓자.”
“알았어요, 영주님. 대신 한 번에 한 개만 드셔야 해요. 만약 더 이상이면 대체 어떤 페널티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거든요.”
“좋아, 명심할게.”
어쨌든 실비아가 나에게 뭔가 딱 맞는 놈을 만들어오긴 했다. 이걸 언제 쓸 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효과만은 보장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물론 페널티가 좀 우울하지만, 살기 위해서라면 아끼지 않고 쓸 생각이었다.
“영주님. 난 실망했는데, 영주님은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네요?”
“응? 음… 음… 뭐…….”
“이제 와서 그런 반응이셔 봤자 늦으셨어요. 이 정도면 포상 각인가요?”
“흠, 포상이라…….”
“설마 아니라고 거짓말하시진 않겠죠. 사람을 일주일도 넘게 굶겼으면서? 정말 이러시면 재미없어요?”
“오, 협박이야? 뭘, 어쩔 생각이신데?”
“음약에 쩔어서 절대 섹스를 피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겠어요. 흐흐흐, 영주님은 이제 제 음약이 무서워서 식사도 마음 놓고 하지 못하시겠죠. 제가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지만 이건 정말 못 참거든요. 사람이 죽음을 각오하면 못 할 일이 없다더니 딱 그렇더라고요.”
이 무서운 녀석.
하지만 진짜 무서운 점은 이 녀석의 실력이면 나에게만 통하는 그런 음약도 만들 수 있다는 거였다. 특히 이쪽으로는 세계 제일의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끙. 그래, 졌다. 오늘 포상 가자. 지금까지 수고했어, 실비.”
“오! 진짜요? 히힛. 아싸!!”
음험한 분위기를 한껏 풍기다 다시 웃음 짓는 실비아의 모습에 헛웃음이 난 로빈은 그녀의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작게 한숨지었다.
그런데 혹시 뒷수작으로 다이앤과 린만 안아준 걸 들키진 않겠지? 이걸 들키면 좀 많이 곤란할 거 같은데.
어쨌든 그 일은 셋만의 비밀로 간직해야 할 거 같았다. 안 그랬다가는 앙심을 품은 실비아가 또 무슨 이상한 약을 만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내 엉덩이가…….
이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울분으로 눈이 돌아간 실비아라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런 흉악한 짓도 충분히 벌일 수 있었다.
* * *
“모두 집중해서 호흡을 맞춰! 혼자 튀어 나가지 말고! 언제까지 조무래기들만 상대할 거야? 그렇게 각자 놀면 우린 잔챙이들만 상대해야 한다고!”
“악! 족장, 그건 무리예요.”
“맞아! 우리에게 합공이라니. 너무 과한 요구입니다.”
“시끄러워! 그럼 혼자 존나 센 놈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든지!”
“그런 억지를…….”
물자가 대부분 준비되고, 큐브에 진입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기에 로빈은 확인 차 모야족 전사들이 훈련하고 있는 훈련장을 찾았다.
개별적인 전투 훈련부터 여럿이 군진을 이루고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것까지, 백랑의 훈련은 거칠기 그지없었는데, 어떻게 보면 심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이었다.
거친 훈련에 익숙한 저 전사들이 저렇게 우는 시늉을 할 정도니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요즘 계속 저렇게 훈련하고 있는 건가요?”
“네, 족장이 요즘 좀…….”
헐떡이며 잠시 피해있는 전사에게 훈련 상황을 물었더니, 요즘 계속 저렇게 단체 훈련을 이어오고 있단다.
기사들과 이번 큐브에 투입될 인원에 대하여 논의할 때 다수의 오크는 전사들이 더 잘 잡는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전사들이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지극히 당연한 소리를 듣고 난 후부터 저러고 있다는 이야기에는 솔직히 기가 찰 정도였다.
한두 해를 같이 지낸 것도 아닌데, 기사들이 무시하는 말투로 그런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음…….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기사들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척하고 있지만…….”
“저희 족장이 어디 그리 섬세한 인간이던가요? 그냥 심심해서 저런다니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정답이네요. 훈련할 병사들이 없으니…….”
거기다 지금까지 조금씩 엉뚱한 짓을 벌였던 전사들에 대한 응징까지 포함되어 있으리라.
다른 영지에 투입했을 때 ‘하얀 늑대 기사단 만세’를 외쳤다든지, 일전에 결혼 인사 차 모야족 마을에 들렀을 때 족장 교체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는 또 은근히 쪼잔한 어른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명분이 너무 확실해서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네요. 조금만 참으세요.”
“끙, 역시 그렇습니까?”
“뭐야! 여기 한 놈이 비잖아? 이 새끼는 또 어디로 토꼈어?!”
“윽. 걸린 모양입니다, 영주님. 그럼……. 그리고 가능하면 투입이나 좀 빨리…….”
저 멀리에서 백랑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돌아가는 전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좀 짠한 기분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도 저렇게 축 늘어져 들어갈 거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 정말 시기를 앞당겨야 하려나? 웬만하면 황제가 클리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정보까지 알아본 후 들어가고 싶었는데.”
당연히 자신 있었지만 좀 더 안전을 기하고 싶었는데, 굴려지는 전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일정을 좀 앞당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저 훈련조차 전사들에게 좋은 약이 되긴 하겠지만 저렇게 거칠게 굴려서야 투입하기도 전에 많이 다치게 생겼다.
“아, 그건 또 아닌가? 악랄하게 사제님들까지 훈련장에 모셔놓고 굴리는 중이니까. 전사들이 불쌍하다고 일정을 당길 수도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뿐인가?”
이미 두 번의 경험으로 어떻게 굴리면 효율적으로 굴릴 수 있는지 터득한 백랑이다 보니 전사들의 한계점을 파악하는 솜씨 역시 탁월했고, 전사들은 한계까지 굴러가며 점점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 수준의 전사들을 훈련만으로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니.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전사들의 기세에 로빈의 입에서도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고,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전사들이 기다리던 황도 소식이 영지로 전해졌다. 황제가 드디어 파란색 큐브를 공략했다는 소식이었다.
“던전 돌파형이라……. 거기다 최종 보상이 그 ‘얼어붙은 영광’이란 말이지? 결국 시기가 좀 이상해졌지만, 큐브 구성 자체는 그대로라는 뜻이고.”
황제는 파란색 큐브를 공략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공표하고, 그 자세한 내용까지 공개했다. 그리고 바로 다른 지역의 파란색 큐브를 모두 정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유나 공주의 결혼식을 크게 열어 황도의 민심을 안정시킨 것과 일맥상통하는 정책이었다. 제국의 강함을 과시함으로써 큐브 때문에 일어난 혼란을 서서히 잠재우고 제국의 백성들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일종의 선전이었으니 말이다.
로빈 역시 비슷한 방향으로 영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긴박한 상황임에도 소극장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다이앤의 주도하에 많은 문화 시설을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파란색 큐브를 공략한 후에는 황제처럼 영지민들에게 크게 알릴 생각이었다.
어쨌든 황제가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꽤 많은 것을 추가로 알게 되었다.
파란색 큐브는 노란색 큐브와는 달리 입장 시 목적, 그러니까 일종의 퀘스트를 부여받고 그걸 완료하면 클리어할 수 있다는 것과 입장 후 시작까지 좀 더 긴 시간을 정비할 수 있다는 것까지.
그리고 소소한 다른 정보들이었다.
물론 소설을 통해 알고 있는 정보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렇다는 걸 황제가 직접 확인한 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큐브를 공략한 후에 황도에 들르긴 해야겠네. 확인할 것도 좀 있고, 황제에게 도움받을 일도 있으니…….”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