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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43화 (243/303)

243화

물론 그게 큰 흠은 아니지만 백랑급 호색한으로 오해받는 건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영주의 위신이…….

에휴, 됐다. 언제부터 그런 걸 생각했다고.

[어쨌든 베이스캠프 근처에서 작은 부락을 발견했어. 이제 바로 공격에 들어갈 거야.]

“네, 조심하세요. 다른 분들도 들으셨죠? 무슨 변화가 생길 수도 있으니 모두 집중해 주세요.”

[예, 영주님. 경계 철저히 하겠습니다.]

백랑이 공격에 들어가고, 적군과 싸우면서 상황을 계속 보고했다.

되도록이면 작은 부락을 몇 개 처리하는 동안은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게 베스트라 한 마리도 남김없이 처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는데, 일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 건지 공격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스캠프 쪽으로도 오크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뭔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게 있든지, 아니면 큐브의 신비로 공격이 시작되면 놈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보네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신속하게 대처할 리가 없는데요.”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우선 등장한 적은 수백 마리 정도군요.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공격조는 클리어. 바로 다른 부락으로 이동할게.]

[궁수조는 바로 사격에 들어갑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로빈도 서둘러 격전지로 향했다.

달려오는 적은 대략 수백, 수십의 오크 전사와 무기만 든 평범한 오크들이 섞인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병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달려오다 궁수들의 화살에 꿰어져 목숨을 잃거나, 목책 주변에서 자리를 지키는 전사들에게 막혀 유명을 달리했다.

그렇게 같은 방법으로 작은 부락 몇을 처리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한 부락을 공격하면 주변 부락 몇이 동시에 공격해 온다는 걸 확인한 것이다.

마치 게임에서 링크로 연결된 것처럼 유기적이고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 * *

그날 밤, 주변을 들쑤시고 돌아온 백랑은 이제 이 근처에는 오크가 남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우리가 처리한 부락은 대략 여섯 개인데, 이제 근처에는 남은 놈들이 없네.”

“방어조 쪽에서 처리한 놈들이 대충 천 마리는 넘으니까요. 이제 근처에 쉬운 놈들은 다 처리한 거 같아요.”

베이스캠프에서 먼 곳의 놈들일수록 규모가 크고 무장 정도가 충실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오늘 처리한 건 그저 근처에 있는 잔챙이들.

그리고 목표인 족장이 있는 부락은 가장 성가시고 강력할 게 분명했다.

“계획을 좀 바꿔야겠네요. 아무래도 우리가 건드리면 그 주변에 부락들이 동시에 공격하는 모양인데, 오늘은 간단했지만 내일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죠.”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공격조는 공격이 아니라 유인으로 목적을 변경하고, 이곳 캠프의 방어를 더 철저히 하는 게 낫겠어요.”

“가장 빠른 놈들로만 데려가서 치고 바로 빠지란 거지?”

“네. 공격하는 것보다 방어하는 게 편하니, 그렇게 하죠.”

“음……. 나쁘지 않은데?”

* * *

그렇게 다음 날은 첫날과 달리 공격에는 힘을 뺀 상태로 백랑과 소수의 인원이 적을 유인하고, 방어조가 단단히 지키는 쪽으로 공략이 진행되었다.

유인조가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오크 전사가 늘어나 상대의 질이 높아졌지만, 방어하는 전사들 역시 점점 놈들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져 방어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다행인 건 놈들이 한꺼번에 모조리 몰려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건드린 만큼만 달려들기 때문에 무난하게 상대할 수 있다는 거였다.

“진짜 많긴 하네요. 이놈들이 모조리 달려들었으면 좀 피곤할 뻔했어요.”

“아직도 많이 남았다니 그렇긴 하군요.”

적을 잔뜩 썰고 잠시 돌아와 쉬고 있던 흑웅은 전사들의 상태를 보고하며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부락을 건드리는 게 이쪽으로 공격 오는 트리거가 된다면, 족장이 있는 부락은 가장 나중에 건드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음……. 족장을 건드리면 모조리 튀어나올 수도 있단 말이죠?”

“네, 지금 놈들의 움직임을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거 같군요.”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족장의 부락이 가장 멀리 있을 거 같으니 아마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진행될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백랑 님, 백랑 님도 들었죠? 좀 조심해 주세요.”

혹시나 해 노파심으로 백랑에게 당부했는데, 이 인간이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잠시 감도는 묘한 정적.

뭔가 불안감을 느낀 로빈은 다시 한 번 백랑을 불렀으나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설마 멀리 간 건가? 하긴, 통신 범위가 1킬로미터 정도라고 했고 이제 이 근방에는 남은 오크가 없으니 멀리 가야 하는 건 맞는데…….”

“왠지 불안하군요.”

“그러게요. 예전에도 상급 마수를 마을로 끌고 온 전력이 있는 인간이라…….”

“흑웅, 혹시 모르니까 방비를 단단히 해주시겠어요?”

“네, 영주님.”

그리고 그때 통신기로 백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듯, 그렇게 경쾌하고 밝은 목소리였다.

[영주님! 드디어 찾았어. 족장이 있는 마을을 발견했다고!]

…미친. 진짜냐?

“백랑 님, 혹시 공격한 거예요?”

[어! 전사 몇을 쳐 죽이니 놈들이 튀어나와서 베이스캠프로 유인 중이야. 이놈만 죽이면 끝인 거잖아? 수가 많아서 이 자리에서 격살하는 건 어려워 보이거든? 그러니……. 어? 뭐야? 이 미친놈들이…….]

“백랑 님, 뭐예요?”

[갑자기 오크들이 이쪽으로 달려와 날뛰고 있어. 이런 젠장. 이러면…….]

“흑웅, 바로 탈출 지원하세요. 백랑 님이 포위된 거 같아요.”

“예, 영주님.”

상황의 급박함을 알아챈 흑웅은 바로 날랜 전사 100을 이끌고 백랑을 지원하러 떠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통신 가능 거리인 1킬로미터 내에 들어와서 포위당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 정도면 충분히 지원해 탈출시킬 수 있었다.

물론 찾는 거 자체가 가장 문제였지만, 이들은 숲에서 행동하는 것에 익숙한 전사들이었고, 백랑이 남겨놓은 표식을 따라가면 그를 발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식량 수급하던 인원들도 모조리 집합하세요. 본격적으로 전투에 돌입합니다.”

전사가 100명이나 빠진 상황에서 적이 몰려오기 시작할 테니 더 이상 여유를 부리는 건 무리였다. 되도록이면 빨리 백랑을 구조해 돌아오는 게 가장 중요했지만, 그전까지는 지금 있는 병력으로 놈들을 막아야 했다.

“에휴, 왜 굳이 이지 모드를 하드 모드로 만드냐? 이게 무슨 업적이 있는 게임도 아닌데.”

잠시 통신기를 끄고 린에게 투덜거린 로빈은 서둘러 격전지로 향했다.

“린, 아무래도 같이 싸워 줘야 할 거 같아.”

“응, 주인. 아빠가 올 때까지 내가 지킬게.”

“그래, 좋아. 믿음직하네. 우리 린, 역시 믿을 건 너뿐이야.”

“후후. 나만 믿어, 주인.”

린의 사기를 한껏 올려준 로빈은 전방을 주시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일부는 백랑을 포위 공격하겠지만, 그곳과 다른 방향에 있던 오크들은 이쪽으로 들이닥칠 게 뻔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족장이 지내던 부락이 먼 곳에 있어 족장이 당도하기 전에 어느 정도 적을 줄여놓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 무리를 짓는 몬스터들은 수장이 있을 때와 없을 때 그 차이가 상당한 경우가 많았고, 오크 족장이 이곳에 당도하면 오크들의 전투력 역시 더욱 배가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옵니다, 영주님.]

“그래요, 월연. 사격 준비는 마치셨죠?”

[예. 영주님. 적… 전사로 보이는 오크 수백. 500은 넘어 보입니다.]

“아후, 빡세겠네요.”

[영주님, 여신님의 축복 지원하겠습니다.]

“어? 그게 광역으로도 되는 거예요?”

[네, 신성력을 다 쏟아부으면 지금 있는 인원에 다 넣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럼 치료는 힘들다는 거네요. 어차피 레아 사제님께 치료를 부탁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니 축복으로 부탁드립니다.”

[네, 그럼…….]

아무리 사제라도 짝이 생기면 치유 사제에서 은퇴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니 레아 사제에게 치료까지 부탁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었다.

그녀에게 기대한 건 큐브 경험과 전투력 그리고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한 축복인데, 지금이 딱 축복을 넣을 적기인 거 같았다.

“문제는 역시 성욕 후폭풍인가? 하지만 족장까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으니… 장기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로빈이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근처를 밝게 비추는 성스러운 빛이 떠오르고, 그 빛은 이내 아름다운 여신님, 그것도 겟츄 포즈와 안이 훤히 비치는 하늘하늘한 옷깃으로 사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우리 여신님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사방으로 퍼져 전사들의 몸속에 흡수되었다.

심지어 일부의 빛무리가 숲 속으로 날아간 것을 보니 그야말로 이 지역을 전체적으로 커버하는 엄청난 광역 버프임이 분명했다.

“와. 레아 사제님, 진짜 대단하네. 어디서 저런 걸물이…….”

모든 신성력을 다 사용한다는 큰 제약이 있긴 했지만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빛이 로빈에게까지 흡수되면서 이 버프의 위력을 직접 느낄 수 있었는데 뭔가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기분과 함께, 몸에는 활력이 넘치는 것이 그 효과 역시 대단했다.

“크아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오크들과 버프를 받아 사기가 충천한 전사들.

“꺼져!!”

“크악!!”

“한 방에 쓸어버렷!”

“이놈도 한 방!!”

“거지 같은 족장 놈아!!”

하지만 정작 격돌해 전투가 시작되자 전사들이 오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오크 전사가 많다지만 버프까지 받은 전사들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인 것.

적의 수가 많긴 하지만 이대로 가면 무난히 놈들을 처리할 수 있어 보였다.

[영주님. 족장을 발견, 합류했습니다.]

[후. 영주님, 미안. 애들이 좀 다쳐서 몸을 빼기가 힘들었어.]

“좋아요. 무조건 빨리 복귀하세요. 오크 족장의 위치는 확인되었나요?”

[족장은 안 보이고 상당한 무위와 무장을 갖춘 오크들이 있습니다. 친위대로 추측됩니다.]

“그래요? 그럼 족장도 금방이겠네요. 서둘러요.”

[네, 바로 빠집니다.]

흑웅의 합류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린 로빈.

그리고 흑웅과 백랑이 다시 캠프로 복귀하기 전에 당장 캠프로 쳐들어온 오크들은 모조리 처리할 수 있었다.

훈련의 성과인지, 버프의 위력인지, 그것도 아니면 백랑에 대한 울분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전사들의 수준은 오크를 압살할 정도였고, 수는 많지만 절대 강자가 없는 오크들이 한 방에 몸을 갈라버리는 전사들의 매서운 도끼질에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백랑과 흑웅을 위시한 최정예 병력이 빠진 상황이라 제법 위기일 거로 생각했던 로빈으로서는 좀 허무한 결과였지만, 사실 전투는 무조건 압도하는 것이 가장 좋았으니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

백랑과 흑웅이 무사히 캠프로 합류하고 급한 대로 주변의 적을 모두 처리하자 전장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오크들이 모여들고 있는데, 놈들도 자신들의 족장을 기다리는 거 같았으니까.

생각 같아서는 바로 뛰쳐나가 놈들을 도륙해 조금이라도 수를 더 줄이고 싶었지만, 이쪽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달려들어 무리를 한 건 사실이라 조금 쉴 필요가 있었다.

“하하, 영주님.”

“아휴, 백랑 님. 이거 왠지 예전에 가메라를 끌고 올 때가 생각나는 정면인데요. 그래, 족장은 봤어요?”

사실 이지 모드를 하드 모드로 바꿔 버린 백랑이 좀 어이없긴 했지만 이제 와서 그걸 지적하진 않았다. 어차피 따져봐야 소용없는 일이고, 미리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는데다가 굳이 백랑을 탓해 전사들의 사기를 꺾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내가 뭐라고 해봤자 들을 사람도 아니고, 몇 날 며칠 오크를 계속 잡는 것보다 이렇게 한 번에 처리하고 족장을 사냥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응, 봤는데. 좀 커. 딱 봐도 내가 족장이다, 라고 온몸에 써놨다고 해야 하나? 착각할 일은 없을 거 같아.”

“그래요? 상황 봐서 놈을 저격하는 게 최선이겠네요. 저기 밖에 모이는 놈들의 수를 보니……. 저걸 다 잡는 건 답이 없어 보여서요.”

“그렇지. 어차피 놈만 잡으면 끝인데 굳이 잡다한 놈들을 모두 잡을 필요는 없잖아? 가면서 보니까 오크 부락이 아직도 수십 개는 넘게 남았더라고. 물론 이런 식으로 모두 튀어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해볼 만하지 않겠어?”

“그렇죠. 아까 전사들 수준을 보니까 해볼 만은 하더라고요. 문제는 역시 아까 백랑 님이 말한 그 정예 전사 오크들인데…….”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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