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 * *
큐브를 클리어하고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기사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영주님… 벌써 끝난 겁니까?”
기사들의 반응을 봤을 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3일이나 지났는데 저런 반응일 리는 없으니 예상보다 내부와의 시간 차가 제법 큰 모양이다.
“주인!!”
“야! 그래도 여기선 안 돼! 집으로 가서!”
그리고 달려드는 린을 억지로 떼어놓았는데 이 녀석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 들쳐 메고는 냅다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녀석의 행동에 당황해 바둥거리긴 했지만, 어차피 이 녀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얌전히 있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기사단장이 영주를 보쌈(?)해 간다고 수군거리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마음먹고 속도를 내니 진짜 빨랐다.
큐브가 자리 잡고 있던 영주 성 구석에서 집까지 불과 수십 초도 되기 전에 도착해 버렸고, 바로 갑옷을 벗어 던진 후 린과 함께 정화 마법이 걸려있는 풀장에 풍덩.
그리고 그곳에서 린의 욕심을 잔뜩 채워 주기도 했다.
물론 그게 내 욕심을 채우는 일이기도 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린과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다 클리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이앤, 실비아까지 이 대열에 합류.
결국 그날은 종일 다른 업무를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실비아와 다이앤 역시 표현은 안 했지만, 나를 많이 걱정하고 있었는지, 그만큼 격정적으로 나를 원했기 때문이다.
뭐, 뒤처리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한껏 달아오른 상태인데다 아내들이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상황에서 그까짓 뒤처리를 생각할 정도로 매너(?) 없는 남자는 아니었기에 오늘은 그냥 아내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밤새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로빈은 조금씩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하……. 미치겠네. 역시 여신님인가. 내가 그랬단 말이지.”
몇 번의 사정 끝에 맨정신으로 돌아온 로빈은 자신이 그 상황에서 전사들에게 돌진을 명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잘 해결된 거 아닌가요?”
“그래, 뭐. 잘 해결되었다면 해결된 건데. 내가 원래 그런 식으로 뒤 없는 판단을 하는 사람은 아니잖아? 너무 냉정을 잃었던 거 같아서 당황스럽네.”
지금이야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지, 만약 그때 포위당한 상태에서 린이 오크 족장을 처리하지 못했으면 정말 위험할 수도 있었다.
정상적인 상태였으면 아마 차분하게 막고 놈들을 조금씩 줄이는 쪽으로 행동하지 않았을까?
족장 처리반도 상대를 어느 정도 줄인 후에 투입했을 가능성이 컸다. 전 병력이 몰려나가는 그런 과감한 판단은 하지도 못했을 테고.
“뭐가 문제야, 주인? 그 상황에서 계속 막기만 했다가는 우리가 더 먼저 지쳤을 거 같은데. 주인도 봐서 알겠지만, 그 뒤에도 오크 놈들 엄청 많았어.”
“에휴, 모르겠다.”
확실한 건 당시 내가 그런 판단을 하는 데 여신님의 버프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거다. 그때 느꼈던 그 뜨거운 고양감이란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지의 감정이었으니 말이다.
“히힛. 그래도 덕분에 어제는 주인한테 예쁨 많이 받았네. 언니도 그렇지만 저 꼬맹이도 어제는 제법 배려해 줘서…….”
“어제는 우리 린이 상을 받아 마땅한 날이었지.”
“그래, 배가 좀 아팠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멍청이, 네 녀석이 그 오크 족장인가 뭔가를 족쳐버려서 다들 무사했다지? 덕분에 영주님도 무사했으니까, 상을 받을 만했어.”
린이 말한 것처럼 어제는 린이 주인공이었고, 실비아와 다이앤은 철저히 린을 보조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서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던 평소와는 조금 다른 서비스랄까?
어제 큐브 공략에서 린이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배려한 모양인데 어쨌든 덕분에 린은 마음껏 욕심을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너희들, 힘쓴 건 난데 왜 너희들끼리 서로 뿌듯해하고 있는 건데?
남의 X지로 기분 내기 있냐?
그런 여자들의 대화에 헛웃음을 짓던 로빈은 문득 마지막에 보여준 린의 그 말도 안 되는 몸놀림이 다시 떠올라 새삼 감탄이 터져 나왔다.
허~ 그랬지.
그래, 그 정도면 확실히 칭찬받아 마땅하지.
솔직히 격투 게임 캐릭터라도 그렇게 움직이지는 못할 거야. 만약 그런 캐릭터가 있다면 개사기라고 너프나 처먹겠지.
크게 휘두르는 도끼를 그런 식으로 막아내는 것도, 그렇게 대검을 밀어 넣고 놈과 밀당하다 당기는 것도, 그리고 간격이 좁혀진 상태에서 틈을 벌리려고 손잡이로 밀어 친 것까지, 어느 한 동작도 정상적인 게 없었으니 말이다.
타인의 동작을 읽어내는 것에는 탁월한 로빈도 사실 그때 린의 그 움직임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에이씨, 못된 재능충 녀석!”
“억, 주인. 갑자기 왜 그래!”
“닥치고 이리 와!”
“악!!”
“오! 뭐예요? 갑자기 혼내주는 분위기?”
“좋아! 멍청이에 대한 배려는 역시 하루로 충분해요! 히힛~ 나도~ 끼어야지!! 각오해라, 멍청이!!”
* * *
그 후로도 제법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로빈은 관저로 출근해 어제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전리품은 마나석이네요.”
“정확히는 마나석에 큐브 메탈, 그리고 고급 오크 가죽인데 가장 중요한 전리품은 마나석이 맞습니다. 아, 두 개뿐이지만 보석도 있군요.”
“그래도 500인이라 그런지 양은 제법 많네요. 중급이 56개에… 상급도 12개라. 큐브 메탈도 이 정도면 상당한 양이고요. 보석도 두 개뿐이지만 나쁘지 않아요.”
“네, 오크 가죽은 아무 의미도 없는 전리품이지만 그 외에는 그럭저럭 쓸 만합니다. 하지만…….”
“뭐, 황제 폐하께서 운이 좋으신 거지 완제품은 안 나오는 게 정상이긴 하죠. 지금까지 영지 큐브에서 완성된 무언가가 나온 적은 없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조금 아쉽긴 하군요.”
“좋아요. 물건은 장인들에게 넘기면 되겠네요. 그리고 보자……. 어제 전사들의 상태가 썩 좋지 못했는데 무슨 문제는 없었나요?”
성욕이 끓어오르는 상태로 제법 오랫동안 싸웠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전사들.
한두 명도 아니고 300명이나 되는 전사들이 갑자기 영주 성에 나타났으니 소소한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
“작은 소동이 있긴 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사제님들뿐이더군요. 우선 부상자들은 기사들이 챙겨서 신전으로 옮겼고, 그 외의 전사들은 각자 알아서 해결했는데, 좀 소란스럽긴 했지만 범죄를 저지른 전사는 없었습니다.”
초반에 기세 좋게 적진을 꿰뚫었지만, 후반에는 상대에게 포위당해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부상자가 없을 순 없었다.
하지만 지온의 보고를 들어보니 제법 크게 다친 전사들은 있지만, 사망자는 없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린이 오크 족장을 빠르게 처리하면서 전투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그런 거 같았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사제님들이 고생하셨겠어요.”
어쨌든 무사히 신전까지 옮겨갔으니 성욕과 부상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을 거다.
오히려 다치지 않아 사제들의 힘을 빌리지 못한 채 거리를 배회한 전사들보다 그들이 더 나았다고 할까?
봉사 업무를 보는 사제들이 대거 다른 영지 쪽으로 영업(?)을 나가 영주 성에 있는 본단에는 봉사 사제가 거의 없었다. 영업하는 봉사 사제들은 에보니 마을과 우버 마을에 집중적으로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주 성에서 그쪽까지 달려가는 방법도 있지만 당장 급한 전사들이 자리까지 옮길 정도로 여유 있었을 거 같진 않았다. 부인이 있는 전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거면 몰라도 말이다.
“일부는 푸시 캣츠로 달려갔습니다. 그쪽에서 소란이 좀 있긴 했는데…….”
“소란이요?”
“예, 전사 여덟이 일제히 레이카라는 분을 찾는 바람에.”
“아아, 그렇죠. 그건 어떻게 됐나요?”
“레이카라는 분은 지금 황도에 있답니다. 본점에서 호출이 있어서 그렇다는데, 전사들이 그 말을 듣고 광분하는 바람에 조금 곤란할 뻔했습니다.”
“네? 와, 그건 또 반전이네요. 그래서요?”
“때마침 지나가던 백랑 족장이 알아서 처리했습니다. 적당히 두들겨서 부상자로 만든 후에 신전으로 보냈으니까요.”
“그… 그래요? 강제 부상자행이라.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그런데 백랑 님은 멀쩡했나요? 그 양반도 밝히는 건 둘째가라면 서러운 양반인데.”
“적호 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백랑 족장은 나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적호 님이랑 같이 풀었죠.”
“…백랑 님답네요.”
그래, 적호 님이 있었지. 부인이랑 같이 들어간 거니 무리는 없었을 거다.
다만 그 자리에서 풀었단 건 거리에서 바로 바지를 내렸다는 건데, 저쪽 세상이었다면 바로 풍기문란 같은 거로 잡혀갈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선, 뭐…….
좀 어이없긴 하지만 작은 장인어른의 난행을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가기로 했다. 만약 린을 제지하지 못했으면 로빈 자신도 저런 상황이었을 테니 말이다.
“엄청 즐거워하셨다는군요. 대놓고 공개 플레이라고요.”
“그건 그렇죠. 하여간 그 양반도 참……. 하지만 그것보다 다친 여덟 전사의 이야기가 좀 짠하네요.”
백랑도 백랑이지만 여덟 남자가 애타게 찾던 레이카, 푸시 캣츠의 일원이니 암살 전문 특수 요원일 가능성이 큰 그 레이카가 황도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비웠단 건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누구를 선택할지 나 역시 은근히 궁금했는데 그런 식으로 나가리라니.
한껏 흥분 상태인 전사들이 난동을 부린 것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정상 참작은 된다고 할까?
물론, 이미 백랑에게 두들겨 맞고 충분히 죗값을 치렀으니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 밖에 보고할 사항이라면…….”
“네,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다 보고하세요.”
“여궁수와 전사들 사이에 대략 스무 쌍의 커플이 탄생했습니다. 뒷일은 알 수 없지만, 어제 상황으로는 그랬죠.”
어제 관계를 맺고 커플이 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는데, 어제 백랑처럼 거리에서 거사를 치른 커플 수만 스무 쌍 정도였단다.
그걸 보고받고 지온이 그렇게 예상한 것.
그게 단순한 욕정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에 호감이 있었는데 그걸 계기로 맺어진 건지는 훗날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몇 커플 정도는 살아남을 게 분명했다.
“백랑 님이랑 월연 님이 좋아하셨겠네요. 여궁수들의 결혼 문제는 제법 신경 쓰이는 문제라고 했으니…….”
“그렇다는군요.”
“뭐, 좋아요. 그쪽의 보고는 이제 됐어요. 특별히 범죄가 일어나진 않은 거 같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죠.”
“그 밖에 따로 보고할 내용은 없습니다. 영주님이 들어가신 후 세 시간 만에 바로 나오셔서 무슨 일이 있을 새도 없었죠.”
“그래요? 어쩐지 기사들이 당황하더라니.”
파란색 큐브에서의 하루가 이곳에서는 한 시간이라니.
그 정도면 제법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고한 것에 비해 너무 빨리 나온 거라 기사들이 당황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 비율이 다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라니.
하긴 원래 그걸 정상적인 방법으로 처리했으면 적어도 열흘, 여유 있게 처리하면 보름 이상 걸리는 거였으니 그 정도 시간 배율이 적당하긴 했다.
500이나 되는 인원이 큐브에 묶인 채 며칠이 지나버리면 클리어하지 못하는 큐브가 늘어나 그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파란색 큐브가 클리어되었다는 걸 영지민들에게 알렸죠?”
“네, 영주님. 이미 모든 영지민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군이 믿음을 줘야 주민들도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겠죠. 그리고 빨간 놈도 조만간 처리할 거라고 알리세요. 그것까지 처리하면 주민들도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거예요.”
“네. 그러겠습니다, 영주님.”
“아, 그리고 빨간 놈을 처리할 인원을 확정했거든요. 백랑, 린, 제필, 듀발, 지크, 레아, 타네, 투네, 월연, 그리고 저까지. 백랑 님에게 명단을 넘기시면 알아서 할 거예요.”
“영주님이 직접 백랑 님께 전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은데 백랑 님도 좀 쉬어야 하고, 전 따로 할 일이 좀 있거든요.”
“할 일이라고 하시면…….”
“황도에 잠시 다녀올 생각이에요. 명단에 든 인물 외에 다른 기사들을 호위로 데려갈 거고요.”
“황도에 가신다고요?”
“네, 이제 곧 황제 폐하께서 예고한 대로 전국을 순회하며 파란색 큐브를 클리어할 테니 지금이 아니면 시기를 놓칠 거 같아서요. 가서 황제 폐하도 좀 뵙고 황도 상황을 직접 확인해 보려고요.”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아요.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 어차피 워프 게이트로 가는 거라 문제 될 일도 없고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