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그러니까, 황제 폐하가 원하는 제국은 이런 모습이 아니라고요. 그런 제국은 오래가지 못하니까요.”
“…….”
황제가 원하는 제국은 천년만년 그 영광을 이어가는 제국이었다.
그건 소설에서도 그랬고,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래 배우길 그렇게 배운데다가 보고 들은 게 그것이니 당연하달까?
절대적인 권력을 자랑하는 황실.
그런 제국이 얼마나 그 세를 이어갈 수 있을까?
지금 황제야 알아서 잘 조절하겠지만, 그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까지 황제처럼 그런 마음가짐으로 제국을 운용할까?
황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절대적인 권력은 결국 폭군을 낳고, 폭군으로 쇠약해진 제국은 언젠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국이 지금까지 천 년이나 이어올 수 있는 건, 그런 권력의 균형이 절묘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고, 황제 역시 이번 위기만 넘기면 그 저울추를 다시 맞추려 할 것이다.
그리고 황제에게 그런 마음이 없더라도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기사들의 수준이 점점 올라가면 황제가 모든 큐브를 독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큐브로 기사들이 강해지면 결국 수가 많은 귀족이 더 유리했다. 귀족 하나가 황실과 비견될 수 없겠지만, 수십 명의 귀족이라면 말이 달랐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은 황실을 도와 최대한 민심을 안정시키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제가 황제파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당장 급한 건 황실을 견제하는 게 아니라 큐브를 클리어할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만드는 거예요. 황실을 견제하는 건 그 뒤에 해도 충분해요. 사실 시간은 귀족들의 편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나? 시간이 지나면 귀족이 황실의 힘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당연하죠. 황실의 기사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5천 정도 아닌가요? 귀족들의 기사를 다 합치면 1만 명은 족히 넘을 텐데, 그들이 상향 평준화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계산이 나오지 않나요?”
“음.”
“그리고, 그때 가서 황제 폐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면 저도 공작님께 힘을 보탤게요. 저도 절대 권력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요. 하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군. 알았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야. 내가 너무 성급했군. 당장 우리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거늘.”
리아넨 공작이 내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큐브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건 정확히 이해한 거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 좋은 이야기 듣고 가네. 나중에 보세나.”
“네, 공작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공작님.”
“언제나 아름다우신 후작 부인도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이앤과 함께 리아넨 공작을 배웅하고 저택으로 들어가며 한숨을 쉰 로빈은 작게 한탄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 내가 극혐하는 끔찍한 상황이 올 뻔했구먼. 황제 폐하도 좀 적당히 할 것이지. 이거야, 원.”
“왜요, 로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별일 아니야, 앤. 빨리 들어가자.”
로빈은 개인적으로 큐브 같은 걸 눈앞에 두고 쓸데없이 심력 낭비하는 상황을 극도로 혐오했다. 레이드 소설을 볼 때도 협회와 정부, 길드의 정치 싸움이 끼어있는 건 무조건 거르고 봤으니 말이다.
리아넨이 저런 식으로 움직인다는 건 리아넨 공작 주변에 이미 귀족들이 어느 정도 포진해 있음을 의미했다.
물론 오늘 리아넨 공작의 말은 밥그릇 싸움 같은 거랑은 조금 달랐지만, 리아넨 공작이 저렇게 느낄 정도면 다른 귀족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귀족들은 리아넨 공작과 달리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조금 살 만해지자마자 벌써부터 그런 낌새가 느껴지는 건 어이없는 일이지만, 거기에는 강경 일변도로 귀족들을 몰아친 황제의 책임도 있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 이어지긴 했지만, 황제가 하려고 했으면 귀족들을 어느 정도 보듬어 안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닐 텐데.”
자체적으로 파란색 큐브를 클리어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황제를 배제하고 독자 노선이라도 걸을 생각인가?
그러려면 최소한 붉은 놈을 처리한 후에 그러든지.
대체 누구 머릿속에서 이런 의견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가관이었다.
“내일 황제 폐하를 뵙고 나서 생각해 볼 일이지. 이런 분위기를 황제가 모르고 있을 리는 없으니.”
* * *
다음 날, 로빈과 다이앤은 나란히 황실에 초대를 받아 황궁에 들어섰다.
다이앤은 황후전으로, 그리고 로빈은 황제의 집무실로.
먼저 이야기가 끝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기다리기로 하고 시종의 안내에 따라 각자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오호,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그레이츠 후작이 황도에 납시다니.”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잘 왔군. 큐브 클리어 소식은 들었다네. U500이라니, 제법 신경 쓰였겠어.”
“큐브가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황제의 집무실에는 황제 외에도 젝트와 측근으로 보이는 여기사 한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사는 단정한 단발에 단단하고 야무진 느낌의 미인이었는데, 소설에서 봉구가 묘사한 아이리스와 딱 일치하는 모습이라 그녀가 누군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젝트야 이미 여러 번 봤으니 알겠고, 이쪽은 내 측근인 아이리스 경이네.”
“아이리스입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아이리스 경.”
“그렇지 않아도 큐브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지. 후작이 클리어한 큐브가 어땠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집단전 형태의 큐브는 처음이라서 말이야. 레오니스 공작령에 자리 잡은 놈이 U1,000. 아마 집단전 형태인가 본데, 참고할 만한 사항이 있는지 들어보고 싶군.”
“음, 그런가요? 기본적인 큐브랑은 좀 달랐는데요.”
로빈은 자신이 클리어할 때 느낀 점을 몇 가지를 설명했다.
황제가 1회 차에 집단전 형태의 큐브를 상대해 보지 않았을 거 같진 않고, 설명하기 애매하니 자신의 입을 빌려 아이리스 경이나 젝트에게 설명하고 싶은 모양이니 그 의중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황제를 슬쩍 살펴봤다.
이름: 페리안 엡솔루트 트와이드
성향: ???
타이틀: 주인공(O). 아수라장의 파괴자(S). 마스터(S). 검제(L)
패시브: 패황의 검 (랭크 B)
액티브: 둠 슬래서 (랭크 B)
역시 성향까지 알아내는 건 무리인가 보군.
그런데 원래 황제의 스킬은 황제의 검 아니었나? 액티브도 완전 다른 거네.
황제의 스킬은 소설에서 설명한 것과 완전히 달라져 저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스킬이 활성화되었고, 신검합일은 검제라는 뭔가 심오한 타이틀로 변했다. 아무래도 신검합일이 저걸로 발전한 모양인데, 레전드 사이에도 서로 간의 우위는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저렇게 보니 우리 린나니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주인공 보정을 생각하면 직접적인 대결은 아직 무리겠지만, 적어도 타이틀상으론 우위에 섰으니 비빌 정도는 되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검제라, 신검합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검제란 말이지.
“결국, 식량까지 필요하다는 건가? 그건 결국 그레이츠 쪽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겠군.”
“아무래도 그렇군요.”
“물론 내부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시스템인 거 같지만 하루나 이틀 치를 미리 준비해 놓고, 아니고는 제법 차이가 클 거 같습니다.”
“어떤가, 후작. 그 정도는 협조해 주겠지?”
“네, 폐하. 돌아가는 대로 바로 준비해서 보내도록 하죠.”
“좋아. 그런데 후작은 왜 온 건가? 이런 것들은 다 보고서로 대체할 수 있는 내용이니 후작이 이렇게 찾아올 이유는 없지 않나?”
사실 이렇게 찾아온 주목적은 황제의 상태창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고, 부차적으로 앞으로 있을 붉은색 큐브 공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거였다. 어제 리아넨 공작이 찾아오면서 또 다른 목적이 생겨났지만 말이다.
“어제 리아넨 공작이 찾아왔는데요. 황권이 너무 강해지는 걸 경계하더라고요.”
“그건 그렇지. 약한 것도 문제지만 너무 강한 것도 문제는 문제지. 당장이야 시국이 너무 급박해서 그렇지만 내 대가 끝나기 전에는 바로잡아야 할 거야.”
역시 황제는 절대 권력을 누릴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내가 리아넨 공작에게 장담했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균형을 찾게 될 가능성이 컸다.
다만 문제는 그 시간 동안 쌓일 귀족들의 불안과 울분이었다.
“당연히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좀 위험한 상황인 거 같아서요. 귀족들을 너무 억누르면 그들이 조금씩 힘을 되찾을 때 난처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도 완전히 찍어 누르신 거죠?”
“아아, 그 이야기인가? 물론 그렇겠지. 억누를수록 강하게 튀어 나가는 법이니까. 아마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는 정책 하나 시행할 때마다 바락바락 대들고 나서겠군.”
아니,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그걸 알고 있었으면 적당히 체면 세워 주면서 이끌어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뭐. 후작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사실 몇 가지 이유가 있네.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정책과 시스템이 잘못 정착되면 그걸 바꾸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큐브 정책을 놈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이해시킬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지.”
“음.”
“그리고 사실 일부러 그렇게 유도한 감도 있으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뒤에 숨은 놈들이 노린다면 누굴 노리겠나?”
“아…….”
황제의 말을 들어보니 그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완전히 숨어버린 놈들을 수면 위로 올리기 위해 불만 세력이 생겨나도록 조장한 것.
그렇다면 지금도 귀족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리아넨 쪽으론 협조를 구하는 게 좋을 거 같군요. 훗날 안 해도 될 고생을 하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리아넨이라, 하긴 그렇군. 지금 귀족들이 다 그쪽으로 몰려가서 당황스럽긴 할 거야. 태생이 그렇다 보니 자네 말대로 걱정도 많을 테고.”
그렇게 말하고 잠시 고민하던 황제는 웃으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좋아. 리아넨 쪽은 따로 협조를 구하도록 하지. 나도 쓸데없는 일로 심력을 낭비하고 싶진 않군. 그건 자네에게도 엄청 피곤한 일이겠지?”
“…솔직히 그렇습니다. 황도에서 괜히 정치 싸움에 들어가면 좀 피곤해지죠. 어쨌든 저도 황제 폐하 쪽 파벌이니까요.”
귀족들이 힘을 다시 회복하고 황제와 대립할 경우.
황제가 폭정을 일삼는 경우라면 당연히 나는 물론이고 크라우 백작, 그리고 레오니스 공작까지 황제를 막으려 할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모든 귀족이 들고일어나는 거라 내 쪽에서 피곤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때가 되면 모든 귀족이 힘을 합쳐 황제의 전횡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지금 쌓인 억하심정으로 귀족파가 똘똘 뭉쳐 황제에게 쓸데없는 태클을 거는 경우였다. 그 경우에는 나 같은 황제파 귀족들이 그들과 지저분한 논쟁을 끝없이 이어 나가야 할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건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런 문제를 어느 정도 방지하기 위해 미리미리 리아넨 공작 같은 거물에게는 협조를 구하라고 조언한 것이다. 적어도 리아넨 공작만 잘 설득해도 훗날 있을 그런 소모적인 논쟁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데 그래도 리아넨 쪽에는 협조를 구한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건가?”
아, 그렇지. 원래 목적은 이게 아니었지.
그럭저럭 괜찮은 답을 얻은 로빈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오면서 큐브를 살펴봤는데, 야수형에 데스포베가라는 놈이더라고요.”
“아아, 그걸 알 수 있나? 후작의 스킬이 그쪽인가 보군.”
“네, 안에 뭐가 있는지 알게 해주는 건데, 조금의 정보라도 될까 싶어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차피 내 스킬을 알고 있을 황제에게 이걸 굳이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황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떠볼 수도 있는 거고.
역시 황제는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데스포베가란 놈은 소설에서도 황제가 상대했던 팔이 네 개나 달린 이상한 대형 고릴라였다.
파란색 큐브에서 소설에서 나온 아이템이 떡하니 나온 걸 보고 혹시나 싶었는데, 이 붉은 큐브도 소설에 나왔던 바로 그 큐브였다.
그리고 중요한 건, 소설 속 황제는 저 데스포베가에게 큰 상처를 입고 사경을 헤매게 된다는 거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