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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48화 (248/303)

248화

데스포베가는 물리적 피해를 대부분 무효화시키는 말도 안 되는 가죽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소설 속 황제도 제법 강자였지만, 물리 피해 면역이라는 변수에 마땅한 대비책을 찾지 못했고, 그 때문에 멤버 여럿이 목숨을 잃고 만다.

결국 외부가 아닌 내부를 타격하는 방법뿐이라는 걸 깨달은 황제가 놈의 아가리를 파고들어 치명적인 타격을 주며 사냥에 성공하지만 그 자신 역시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설명했던, 황제의 흑마법사가 황제를 살리는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황제가 데스포베가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어떻게든 몇 가지 힌트를 줄 생각이었지만 지금 그의 태도를 보니 놈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거로 보인다.

아마 1회 차에서 놈을 상대해 본 거 같은데, 만약 그랬다면 1회 차 로빈이 놈의 특징에 대하여 알아서 설명해 줬을 것이다.

“그렇군. 이름만 들어서는 뭔지 도통 알 수 없군 그래.”

이 양반, 뻔뻔한 거 보소.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러시지.

“그런가요?”

“붉은색이라……. 이쪽은 그레이츠가 먼저 아닌가? 아마 내가 전국을 순회하고 돌아오면 그레이츠에서 붉은색 큐브를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겠군. 사실 나도 붉은색은 좀 껄끄러우니, 후작의 정보를 기대하겠네.”

다른 건 몰라도 붉은색이 껄끄럽다는 말은 정말인 거 같았다. 아마 1회 차 때도 놈을 처리하는 데 제법 큰 피해를 본 게 아닐까?

이거, 진짜 괜찮은 건가?

아니지. 저 양반이 대책 없이 움직일 리가 있나.

그 후에도 큐브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바로 클리너 길드에 대한 칙령이 발포된다는 내용부터, 차후 큐브의 명칭이 그린, 옐로우, 블루, 레드로 통일된다는 이야기까지.

그리고 실비아가 부탁한 여러 가지 부산물을 사갈 수 있게 허락까지 받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려는데 황제가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 참. 후작, 그거 아는가? 내가 만약 큐브에서 크게 다치거나 일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그 공백기에는 후작이 황실을 지켜야 한다네. 참 재미있는 일이야. 안 그런가? 혹여 그런 일이 생기면 선황 폐하를 물고 늘어지진 말게나. 하하.”

응? 이건 또 무슨……. 어? 진짜네.

현재 황족이라고 해봤자, 황제와 장인어른이신 상황 전하, 그리고 다이앤이 다였다. 상황 전하의 친척들도 모두 사망해 다른 친척조차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의 생사가 위태로우면 누가 황위를 지키게 될까?

선황인 룩센 대제나 현 황후인 레니아, 아니면 1황녀인 다이앤이 잠시 황위를 맡게 되는 것이다.

원래라면 당연히 라이언 2황자가 맡을 테지만 그는 지금 황실 명부에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황위를 맡을 수 없었다.

우선 황후인 레니아는 황제와의 자손을 보지 못하는 한 황제의 부재 시 황실을 맡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황제가 출진했을 때 그녀가 황실을 돌봤던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황실의 법이 그랬다.

남편인 황제가 굳건할 때는 그 권위를 빌려 황후가 통치할 수 있지만, 황제의 생사가 불확실한 순간에는 그 권한을 잃는 것이다. 만약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의 권한을 그녀가 대신 행사할 수 있다는 게 변수지만, 근일 내에 그럴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남는 건 룩센 대제와 다이앤인데, 지금 황제는 그렇게 될 경우에 룩센 대제에게 황위를 맡기지 말고 다이앤에게 맡긴 후, 나보고 황위를 관리하고 있으라고 말한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래, 좋군. 후작이 붉은색 큐브를 공략했다는 소식만 기다리고 있겠네.”

큐브에 대한 이야기까지 마치고 황제의 집무실을 나서는 로빈의 표정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 * *

로빈이 문을 나서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젝트가 황제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씀하는 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선황 폐하께서 나서신다면……. 그리고 확실히 결정된 사항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럴 일은 없어. 부황께서는 절대 돌아오지 않으신다. 로빈이 물고 늘어져도 절대 안 오실 거야. 원래 그런 분이시니……. 그리고 그레이츠 후작도 대충 무슨 말인지 알아먹었을걸? 그리고 자네 말대로 확정된 사항은 아니지. 그냥 백지화될 가능성도 크고. 하지만 이렇게 운을 띄워 놓으니 자기 혼자 고민할 게 뻔히 보여 뭔가 산뜻한 기분이군.”

“그건……. 너무 악취미시군요.”

“아니, 재미있지 않나? 나갈 때 표정 봤지? 아마 황제 앞에서 대놓고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인간도 저 녀석뿐일 거야.”

“표정을 보니 대충 눈치챈 거 같긴 했습니다. 고민이 많겠군요.”

“하지만 뒤끝이 긴 녀석이니 뭔가 달랠 걸 준비해야 해. 안 그러면 이상한 거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 수도 있거든.”

젝트는 황제의 악질적인 태도에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그래도 자신이 당하는 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황제라는 자리를 잠시라도 그레이츠 후작에게 맡길 수 있는 황제의 믿음이 대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황제와 그레이츠의 문제일 뿐 자신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문제는…….

“폐하, 대체 조단 크라우 그 양반은 언제 돌아옵니까? 일이 계속 밀리고 있습니다.”

“아, 조만간 오겠지. 처가에 인사하러 간 걸 나보고 어쩌란 건가?”

“끙, 그럼 제대로 된 인재라도 추천해 주시든지요. 자꾸 이러시면 제가 그레이츠 후작을 찾아가 다 불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조단이 있을 때는 앞뒤가 꽉 막혔다고 뭐라고 하더니, 없으니까 또 답답한가?”

“조단은 앞뒤가 꽉 막혔지만 일 처리는 빨랐는데, 지금 있는 관료들은 앞뒤가 꽉 막힌데다가 일 처리까지 느려 터져서 환장하겠습니다. 가뜩이나 크레톤 공작 각하께서 절 들볶고 있는데 이래서야…….”

“그래도 어쩌겠나. 재무부 쪽 업무를 마스터하지 않으면 딸을 못 주겠다는데. 크레톤 공작 영애는 자네를 응원하고 있으니 힘내시게나.”

“끙.”

대전에서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철혈의 황제로 이름 높지만 저럴 때 보면 정말 얄미웠다. 그레이츠 후작이 황제만 만나고 나면 똥 씹은 얼굴로 돌아가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하지만 계급이 깡패라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마 그레이츠 후작도 지금 그런 생각으로 욕을 삼키고 있을 게 분명했다.

* * *

젝트의 짐작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마차에서 다이앤을 기다리던 로빈이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황제에게 이를 갈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우, 이 양아치 같은 인간이 또 무슨 사고를 칠 생각이군. 겁나 피곤하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라이언 형님을 호적에서 빼는 게 아니었는데.”

다이앤의 안전을 위해 라이언을 황실에서 뺀 건 좋았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다.

일의 내막은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겠지만 확실한 건 황제가 지금 자리를 비우려고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머지않은 시간일 거 같았다.

“로빈~ 응? 어?”

그렇게 욕설을 내뱉고 있는데 마차 문을 열고 다이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욕하는 로빈의 모습에 동공이 흔들리더니 다시 마차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억! 다이앤, 아니야. 돌아와.”

로빈이 애타게 외치자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다이앤은 울먹이는 눈으로 로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로빈은 그녀에게 욕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지만 황제를 욕한 거였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건 조금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제가 뭘 잘못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미안미안, 그런 게 아니었는데 타이밍이 참…….”

우여곡절 끝에 다이앤을 잘 다독인 로빈은 그녀가 황후와 만나 나눈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황후 마마께서 잘 아시는 거장이 있다지 뭐예요. 그분께 전해 드릴 소개장까지 써주신 거 있죠. 내일 그분을 뵙고 정중하게 청해볼 생각이에요.”

“아, 그래? 그거 잘됐네.”

“헤헷. 로빈을 따라 황도에 오길 잘한 거 같아요.”

황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왜 황도까지 왔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 모양인데, 설명을 들은 황후가 흔쾌히 자신이 아는 연출 전문가를 소개해 준 모양이다.

다이앤이 한껏 상기되어 기뻐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고.

“그런데 연출가를 모시려면 뭔가 있어야 하지 않아? 하다못해 극본이나 대본이라도 있어야 뭐가 될 텐데.”

“맞아요. 그래서 제가 이미 준비해 왔다는 거죠. 후훗. 바로 이거예요.”

로빈의 지적에 해맑게 웃으며 책자 하나를 꺼낸 다이앤.

로빈도 다이앤이 어떤 연극을 만들려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책자를 살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사자후 로빈」. 설마 이걸 만들 생각이야? 누가 대체 이런 걸…….”

제목만 들어봐도 망작 필이 물씬 풍겨 다리가 후들거렸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는지 도저히 용서하기 힘들 지경이었으니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 찾아가 다리몽둥이를…….

“헤헤, 어머님이 손수 집필해 주신 거예요. 어머님께서 이 정도로 대단한 능력자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조물조물 정성껏 주물러 드려야 할 거 같았다.

“…어머님이라면, 장모님 말고 우리 어머니, 마리아나 그레이츠 여사님을 말하는 거지?”

“그럼요~ 어머님이 또 있나요?”

이걸 자신의 친모인 마리아나가 집필했다는 말에 다시 천천히 대본을 살펴보는 로빈.

로빈은 대본을 읽으며 무려 세 번이나 놀랐다.

위용 넘치는 필체로 적힌 ‘사자후’라는 단어에 우선 정신이 혼미해졌고, 수많은 소설을 섭렵한 자신이 봐도 무난하다고 느낄 정도로 깔끔한 문체에 두 번 놀랐으며, 손발을 가루로 만들려는 듯 오그라드는 내용에 세 번 놀란 것이다.

어머니의 글 쓰는 재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지만 왜 그 재능으로 이런 쓸데없는 글을 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중 가장 압권인 건 역시 제목인 사자후.

물론 무슨 뜻으로 저 단어를 선택했는지는 알겠는데, 무슨 스님이나 무림 고수도 아니고 사자후라고 하니 시작부터 오그라들어 손발이 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머니. 아무리 사자가 좋아도 그렇지, 이건 좀…….

“설마……. 이걸 황후 마마께도 보여 드린 건 아니겠지?”

왠지 너무 부끄럽고 망신스럽다는 생각에 설마 아니겠지, 하며 물었는데 다이앤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당연히 보여 드렸다고 대답했다.

게다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가슴까지 내미는데, 로빈은 차마 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한숨만 쉴 뿐이었다.

“황후 마마께서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셨어요. 세기의 명작이라면서 꼭 제작해 달라는데, 저도 용기가 솟아나더라고요.”

“…그래?”

부부는 닮아간다더니, 황후 역시 황제한테 옮았는지 나를 망신 줄 생각으로 만만한 거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허언을 내뱉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환하게 웃은 건 즐거워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하긴, 저런 오그라드는 대본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음, 앤. 그런데 꼭 저걸 만들어야겠어? 내가 생각하기에는 좀 별로일 거 같은데?”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황후 마마도 그렇고 가족들도 그렇고, 다들 좋다고 했거든요. 왜 로빈의 눈에는 이게 별로일까요?”

“그… 그래?”

그거야 그 사람들은 나를 놀려 먹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런 거지.

웬만하면 좋게좋게 다이앤을 설득하려고 했으나 그녀의 반응을 보니 무조건 첫 작품으로는 저걸 제작할 생각뿐인 거 같았다.

이미 마음을 굳혀 다 틀렸다고 할까?

로빈은 한숨을 쉬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다이앤을 말려봤자 결국 서로 마음만 상하게 될 거 같았다. 그럴 바에는 그냥 거장에게 검증받고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리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한 분야의 거장이라고 하면 자존심이 대단하고,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작품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 거로 알고 있다.

하물며 황후가 소개해 줄 정도의 거장이라면 그 자존심이 오죽할까?

일반인인 내가 봐도 손발이 가루가 될 거 같은 이 대본을 거장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확신한다.

베스트는 거장이 다른 작품을 권해 새로운 대본을 구하는 것.

차선은 거장이 그냥 매몰차게 거절하는 거였다.

물론 거절당하고 마음 아파할 다이앤의 모습을 보는 건 씁쓸한 일이지만, 그래도 잘 위로해 주고 거장이 아니더라도 제법 솜씨가 괜찮은 연출가를 구하는 거로 그녀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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