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그래, 뭐. 내일 대본을 가지고 소개받은 연출가를 한번 만나보자. 나도 함께 갈 생각인데, 괜찮지?”
“어머~ 정말요? 로빈, 고마워요.”
상처받을 다이앤을 생각하니 도저히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 동행을 결정했는데, 그녀는 내 속도 모르고 마냥 고마워하기만 해 왠지 죄를 짓는 기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황후 마마께 태기는 없으시대?”
마음이 묵직해 말을 돌리는 김에 로빈은 슬쩍 궁금한 것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런 말씀 없으시던데요. 사실, 제가 슬쩍 물어봤거든요. 황손을 잉태하는 건 중요한 일이잖아요? 물론 두 분 다 젊다 못해 어린 수준이지만, 다른 황족이 없는 상황이라 불안하기도 하고요.”
“그렇지. 그런데?”
“그런데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아닌가 봐요.”
혹시 황제가 예상치 못한 불의의 타격이라도 있을까 싶어 기대했는데 역시 그 철저한 양반은 2세 계획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황후가 임신이라도 딱 했으면, 제대로 반전이었는데 아쉽다고 할까?
저러다가 황후보다 아이리스 경이 먼저 임신해서 바가지나 옴팡지게 긁혀야 깨소금 맛일 텐데.
하지만 그렇게 말을 돌리고 나니 대본에 대한 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예고한 대로 다이앤과 함께 거장이라는 연출가를 찾아갔다.
가면서 그의 이력을 간략하게나마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지금 쉬고 있다고?”
“네, 로빈도 알다시피 지금 황도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극단도 많이들 문을 닫았대요. 그런데 그분이 후배들을 위해 알아서 자리에서 물러나셨다나 봐요. 자신은 이미 많이 했으니 쉬고 싶다면서요.”
“아…….”
참 저러기도 쉽지 않은 일이라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황후와도 연결 고리가 있는 거장이라더니,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물론 정말 쉬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저런 상황이라면 더욱 자리를 내놓고 싶지 않은 게 사람 마음인데 그렇게 초연하다니.
그래서 더욱 기대되었다. 과연 거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무조건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거라는 사실이다. 나와 다이앤이 지체 높은 인물이라도 상관없이 말이다.
* * *
로빈은 우선 제국 은행을 찾아가 황제에게 허락받은 재료를 구입해 챙기고 바로 거장이 머물고 있다는 그의 자택을 찾았다.
황도 한쪽 작은 집에 살고 있는 거장은 귀족이 직접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다이앤이 황후의 소개장을 건네자 고개를 끄덕이며 태도를 부드럽게 바꾸더니 곧장 안으로 안내했다.
소개장 한 장으로 저렇게 태도를 바꾸다니, 얼핏 봐도 황후랑 제법 막역한 사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소개장을 보니 황후 마마께서 좋은 자리라면서 추천해 주셨더군요. 혹시 그레이츠 후작령의 로빈 그레이츠 후작님, 본인이십니까?”
“아, 예. 그렇죠. 반가워요. 마에스트로…….”
“드올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래요, 마에스트로 드올. 저희 영지에서 새로 소극장을 만들고 극을 상연할 생각인데, 그 작업을 전체적으로 조율해 줄 연출가가 필요해요. 물론 마에스트로를 모시기에는 부족한 자리지만, 부탁드리고 싶군요.”
“음……. 자리의 크고 작음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만, 이 가슴을 뛰게 만들 작품이 있느냐가 중요하겠죠.”
그래, 그렇지. 돈이나 자리로 거장을 초빙할 수는 없는 거지.
로빈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이앤에게 눈짓해 그 문제의 대본을 드올에게 건넸다.
대본까지 미리 가져왔을 줄은 몰랐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대본을 살펴보던 드올은 처음에는 가볍게 읽는가 싶더니 점점 진지한 눈으로 대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눈을 감고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드올.
로빈은 대체 저걸 보고 고민할 게 뭐가 있는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올은 눈을 뜨고 로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혹시 이건 실화를 바탕으로 기록된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개뻥, 과장, 날조지.
“그럼요, 마에스트로. 영주님의 어머님께서 직접 기록하신 건데 당연하죠.”
하지만 로빈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다이앤이 냉큼 대답을 가로챘다. 로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아니, 당연하지 않아. 우리 어머니가 원래 날조의 고수라고. 저쪽 세상의 인터넷 신문사는 저리 가라 할 정도라니까.
“역시 그렇군요. 이렇게 제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대본은……. 30년 만에 처음입니다. 이 작품의 초연을 제가 맡을 수 있다면, 보수와 자리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거 같군요.”
“어머~ 정말요? 고마워요, 마에스트로.”
…제정신이냐, 마에스트로?
로빈은 화기애애하게 두 손을 맞잡아 의기투합하는 다이앤과 마에스트로 드올의 모습에 아연해져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역시 세상에는 생각보다 정신 나간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한탄하면서 말이다.
마에스트로 드올과 다이앤이 짝짜꿍이 맞아 화기애애하게 찻잔을 나눌 때도 로빈은 자괴감으로 가득한 현자 타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마이스트로 드올이 저 대본을 높이 평가했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둘의 대화가 점점 대본과 극단 쪽으로 흘러가면서 드올의 생각을 전해 들을 수 있었고,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되었다.
“대본을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긴 하더군요. 하지만 묘하게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상황 묘사가 마음에 들었죠. 음……. 원작자님과 상의해서 몇 군데는 손을 볼 생각인데, 괜찮을까요?”
그 대본이 완전히 마음에 든 건 아니고, 몇 군데는 손봐야 한다는 말에는 로빈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역시 거장답게 대본이 구리(?)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나 보다.
“북부의 사자, 그레이츠 후작님에 대해서는 평소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전에는 그냥 뜬소문이라고만 생각했지만, 그날…….”
한때 황제가 고의로 퍼트린 북부의 사자에 대한 낭설이 황도를 강타했을 때, 드올은 그냥 웃고 말았다고 한다. 원래 소문이란 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도 않은 일에는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사실 언데드를 무사히 처리한 그 당시, 언데드 대란에 관한 극을 준비하는 제작자나 연출가가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 극에 꼭 등장하는 인물이 황태자 페리안, 즉 현 황제와 북부의 사자 그레이츠 자작(현 후작)이었으니 그레이츠 자작은 주인공인 황태자 페리안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조연이었다.
어쨌든 언데드 대란을 주제로 한 연극과 공연은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뒤로도 종종 그와 비슷한 극이 황도 극장가에 오르내리곤 했단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북부의 사자는 드올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랬던 드올의 생각이 바뀐 건 바로 황태자가 반란 누명을 쓰고 도망쳤을 때, 2황자 라이언과 로빈이 기사들을 이끌고 황궁까지 돌격하던 그날의 그 사건이었다.
“그날 보고 말았죠. 기사들을 이끌고 용맹하게 황궁으로 돌진하는 북부의 사자! 포효하는 사자 갑옷과 황태자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 의기와 의리! 그리고 뜨거운 우정! 그제야 전 북부의 사자는 허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이 시대의 전설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자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절 직접…….”
…마에스트로라더니, 상상력 진짜…….
로빈도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자신은 분명 스물이 넘는 기사들에게 철저하게 보호받으며 황궁으로 돌진했었다. 하지만 적과 마주치거나, 심지어 화살이 날아올 때도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사들이 알아서 다 쳐냈었을 뿐.
그런데 그게 어떻게 용맹한 사자의 모습인지 정말 기가 막혔다.
직접 눈으로 봤다면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기억이 날조될 수 있는 걸까? 아무래도 너무 눈에 띄는 그 사자 문양이 문제였던 거 같았다.
그리고 드올은 그날부터 나에게 꽤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자자인 내가 직접 모시러 왔으니 감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보고 흠칫하더니 단순히 귀족이 직접 찾아와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찾아와서 그랬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다이앤이 원하던 마에스트로를 영지에 모실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운이 쫙 빠졌던 로빈도 대본을 수정할 거라는 말에는 기대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마에스트로의 손을 거쳐 기름기가 쏙 빠진다면, 그래도 봐줄 만한 물건이 탄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마에스트로이니만큼 과한 아들 사랑+과장과 날조의 달인인 마리아나 여사보다는 더 이성적이고 객관적일 게 분명했으니까.
“아무래도 황후 마마가 미리 알고 소개해 준 거 같은데. 마에스트로 드올이 평소에도 날 주제로 한 극을 만들고 싶어 했다는 걸 황후 마마께서 모를 리가 없지.”
그야말로 부창부수.
아무래도 저 커플은 남을 엿 먹이는 것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거 같았다.
* * *
황제부터 황후까지 뭔가 기를 쪽쪽 빨린 듯한 기분으로 영지로 돌아온 로빈은 그제야 황도를 방문했음에도 아무런 선물 없이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암담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예전처럼 황도에 다녀오는 게 먼 여행은 아니지만, 가족들의 성향을 생각했을 때 선물이 없으면 서운해할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 말이다.
막판에 드올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지만 않았으면 기억했을 텐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들볶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로빈. 제가 다 준비했어요. 어머님과 아버님, 할아버님, 그리고 도리아 여사님. 그리고 우리 귀여운 아가씨 선물까지요. 물론 엄마와 아빠의 것까지 따로 준비했답니다. 이 기회에 사위로서도 점수를 따셔야죠~”
“오~ 정말? 와, 앤…….”
어쩐지 뭔가 짐이 많다 했더니, 내가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선물부터 장만했나 보다.
“그러니까, 어머니 선물은……. 큐브 소설 명작 3선, 아버지는 고급 조각 교본? 할아버지는 큐브 메탈 낚싯대? 벌써 이런 게 나왔어?”
“아버님은 요즘 그림보다 조각에 관심이 많으시더라고요. 이제 조각까지 하실 생각이신가 봐요. 할아버님은 탄성이 좋은 고급 낚싯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요. 그래서 이렇게 준비했어요.”
“그런데 저 큐브 소설은……. 설마 그건가?”
두 가지 물건은 그럭저럭 이해가 갔지만, 큐브 소설은 또 뭔가 싶어 살펴봤는데, 예상대로 지난번 히센과 함께 보고 기막혀했던 그 큐브제 야설이었다.
그나마 영지에서 발견된 그런 난폭한 야설은 아니고, 『그이의 두껍고 부드러운』처럼 로맨스 형태의 야설이었지만 재빠르게 이런 걸 발간해 베스트셀러까지 만든 출판사의 수완에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큐브 메탈로 만든 낚싯대처럼 큐브와 관련된 물건이 실생활에도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 역시 신기한 건 마찬가지였고.
다이앤이 준비한 선물은 호평 일색이었다.
특히 명작가 줄리(줄리에타 성녀)가 집필을 중단하면서 벌써 몇 년이나 마땅히 읽을 게 없었다던 마리아나 여사가 가장 기뻐했는데, 아무래도 나와 관련된 말도 안 되는 대본이 탄생한 것도 심심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거 같았다.
어쨌든 다이앤이 철저하게 준비해 준 덕분에 어른들에게 점수를 좀 땄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다이앤이 사서 할아버지께 선물한 큐브 메탈 낚싯대는 짝퉁이었다.
로빈도 이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런가 했지만, 사실 큐브 메탈을 사적으로 구입하기는 힘든 시기였고, 사기꾼이 그럴듯하게 꾸며놓은 강철 낚싯대였던 것이다.
훗날 카인의 낚싯대를 보고 부러워하는 장인어른께 로빈이 직접 영지에서 얻은 큐브 메탈로 낚싯대를 만들어 드렸는데, 둘을 비교해 보니 그 차이점이 명확해서 그 물건이 짝퉁임이 밝혀졌다.
물론 그 사기꾼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라 잡을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 * *
로빈이 짧은 황도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다음 날, 황실에서 클리너 길드에 대한 칙령을 정식으로 반포했다.
클리너 길드를 단순히 큐브를 클리어하는 용병 길드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던 로빈도 칙령에 올라온 조항이 예상보다 훨씬 복잡해서 당황했는데, 시스템부터 확실하게 잡고 넘어가야 한다는 황제의 의도가 명백하게 느껴지는 그런 조치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