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물론 큐브를 클리어할 용병들을 철저하게 교육하겠다는 황제의 계획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매우 바람직했다. 다만 두 달 후부터 외부 인원을 쓰길 원하던 로빈으로서는 좀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그냥 치안대를 그쪽으로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마수 사냥에 치안대까지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최후의 방법으로 생각하려고요. 치안대는 치안대 본연의 임무에 집중하는 게 베스트니까요. 아시다시피 외부인에 대한 경계는 계속 늦추지 말아야 해요.”
“그럼 결론은 한 가지군요. 영지에서 장정들을 차출해, 클리너로 키운다. 그 외에는 없지 않습니까?”
“하, 결국 그렇네요. 괜찮을까요?”
“안 될 것도 없지. 어차피 영주님이 무슨 대단한 큐브를 맡길 것도 아니잖아? 우리 영지 큐브 등장 비율을 보면……. 녹색이 60% 정도 되네? 세 개 중에 두 개는 녹색이라는 건데 기껏해야 고블린이나 코볼트, 좀 올라가면 오크나 놀이라는 거잖아? 영주님이야말로 우리 그레이츠의 남자들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그건… 그렇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래요.”
아니, 저 양반은 대체 언제부터 그레이츠 남자였다고 저러시나.
댁은 따지고 보면 모야족의 남자지. 어디서 신분 세탁을…….
게다가 백랑이 통계까지 들먹이며 이야기하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난이도와 상관없이 큐브 클리어는 의욕과 의지가 필요한 일입니다. 확실히 징집으로 해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죠.”
“제가 걱정한 것도 그거거든요. 이게 문제가 생기면 혼자 죽는 것도 아니니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만 클리너로 쓸 생각이었는데…….”
“음, 가만 보면 영주님은 너무 걱정만 앞서는 거 같아. 어차피 모집해서 자원자가 많으면 상관없는 거 아냐? 우선 모집부터 해보자고.”
백랑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항상 행동하는 것보다 생각이 먼저 앞서는 게 바로 나 로빈 그레이츠니까.
나 자신도 이런 성격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영지민과 가족 모두를 책임지는 영주라는 무거운 자리에 앉아있다 보니 전생보다도 그런 성격이 심해져버렸다.
제법 아픈 일침이라 뜨끔하긴 했지만, 그것보다 더 껄끄러운 건 저 백랑의 자신감이었다. 뭔가 혼자 안다는 듯 당당하지 않은가?
“흠, 백랑 님은 뭔가 자신만만하네요. 무슨 생각이에요?”
“후후, 우리 부족의 머저리들이 최소한 300은 지원할 거야. 집에 얹혀사는 건 지겹고, 그렇다고 규율이 엄한 치안대는 싫다고 거부한 멍청이들이 그 정도는 되거든? 남녀 합쳐서 최소 300인데 이 기회에 이 녀석들을 사람 구실하게 만들어야겠어.”
“…300이나요? 예전에 아이들이 워낙 많긴 했지만, 아직도 그렇게나 많이 남았어요?”
저번 치안대 모집 때 모야족에서만 500이나 치안대에 지원했다. 덕분에 쉽게 병력을 모을 수 있었고.
총인구 8천에서 시작해 이제 대충 1만 2천 정도로 늘어난 모야족인데 아직도 청년들이 그렇게나 남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 아니구나.
남녀 합산이라고 했지?
기본적으로 여자가 더 많이 태어나는 모야족이지만 대수림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생존자들이 대부분 청장년에다 아이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500 정도가 치안대에 지원한 건 그리 많은 수가 아니었다.
그러니 남녀 합쳐서 300 정도 더 지원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전혀 아니었고.
“어쨌든 우리 부족이 그 정도야. 기대하라고.”
“음……. 부족에서만 클리너를 선출하는 건 불공평한 일이죠. 우선 영지 전역에 모집 공고를 내겠습니다. 영지민의 뜻을 한번 모아보죠.”
“아니, 이게 영지민을 뜻을 모을 일은 아니고요. 치안대로 일하는 건 조금 꺼려지지만, 힘과 체력에 자신 있는 사람들을 한번 모아보세요. 이제 영지민들도 큐브가 어떤 존재인지는 다들 알고 있잖아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제가 충분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루이 경. 부탁드릴게요.”
루이가 이상한 곳에서 경쟁심을 느끼는 것 같아 정정했지만, 왠지 알아들은 거 같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여야 하나 싶어 고민하는데 백랑이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냥 그렇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렇게 모으기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영주님, 아무래도 다시 훈련장을 가동해야 할 거 같은데.”
“…왜 그렇게 신나 보이세요? 백랑 님은 바빠서 맡지도 못하실 텐데요.”
“뭐? 말도 안 돼. 내가 뭐가 바빠서.”
“말이 안 되는 건 백랑 님이죠. 우리 같이 레드 큐브 클리어해야 하는 건 기억하고 계시죠? 훈련보다 그게 더 중요한 일이거든요.”
“아아, 호흡 맞춘다는 거? 걱정 마, 영주님. 잽싸게 큐브 클리어하고, 바로 훈련 들어갈 테니까. 영주님이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빠지면 훈련 효율이 안 나와요. 우리 지금 급하잖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백랑 님의 말이 사실입니다. 만약 모야족 청년들이 클리너로 지원한다면 백랑 님이 있고, 없고는 제법 차이가 클 겁니다.”
“별건 아니지만, 그 녀석들의 바닥까지 끌어내는 건 또 내 전문이거든.”
“…그건 그렇겠네요.”
그래서 전사들이 저 백랑을 그렇게 미워(?)하는 거겠지.
결국 훈련은 또 백랑 쪽에 맡겨야 하나?
하긴 큐브 클리어 외에는 결국 개인 훈련 쪽으로 진행될 테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긴 한데.
“좋아요. 다른 건 몰라도 이번에는 백랑 님의 말이 옳죠. 더 이상 고민만 해봤자 의미 없으니 우선 모집하고 보겠습니다. 모집 인원 중 모야족이 더 많으면 백랑 님을 교관으로 하고,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맡길 거예요. 그리고 모집 인원이 생각보다 시원찮으면 어쩔 수 없이 올겨울은 치안대나 기사단, 그리고 전사단이 더 수고해 주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 그러자고.”
“알겠습니다, 영주님. 시간이 없으니 바로 모집하겠습니다.”
훈련이나 그런 건 사실 두 번째 문제라 우선 모집부터 하기로 했다. 원래라면 클리너 길드의 존재를 알리고, 영지민이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게 순리였는데 상황이 이러니 따로 모집해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회의를 마무리 지은 로빈은 주노를 따로 불러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것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주노, 황도에 가보니 노는 예술가들이 많던데, 왜 포섭이 안 된 건가요?”
“예? 아아, 마님께서 맡기신 일 말씀이시군요. 이 인간들이 배가 불러서 황도가 아니면 싫다는군요. 그래서 곤란했는데 영주님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셨다니 얼마나 속이 후련하던지. 역시 영주님은 낚시의 귀재십니다. 다섯 살 때 이미 히센 님과 도리아 님을 낚으신 영주님이시니까요.”
“낚시는요. 서로 이득 되는 방향으로 결정한 거죠. 누가 들으면 제가 착취라도 하는 줄 알겠네요.”
큰일 날 소리를 내뱉는 주노를 돌려보내고 생각해 보니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황도는 모든 예술의 메카.
지금 당장 경기가 안 좋아도 이게 영원한 것도 아니고, 가능하면 황도에서 일하고 싶은 게 예술가들의 마음일 거다.
물론 이런 침체기가 몇 년간 이어진다면 몰라도 이제 겨우 몇 개월이니 아직은 여유 있을 테고.
결국 황후 마마께서 거장을 소개해 주지 않았으면 쉽게 구하지 못했다는 건가?
그렇게 작은 의문까지 해결하고 나니 결국 우리 영지에는 마에스트로 드올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결론만 남았다.
그러니 이제 그쪽 일은 잊고 새로 클리너를 모집하고, 레드 큐브를 해결하는 것에만 집중해야겠다.
* * *
다음 날부터 바로 큐브를 클리어할 인원을 본격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각 마을마다 방을 붙이고, 관리들과 치안대, 심지어는 영지 최고의 정보통이라는 아주머니들의 입까지 동원해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부터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게 다 지원자들이라고요?”
“네, 15세 이상, 40세 미만의 인원만 추린 게 이겁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요. 왜 이렇게 많이 지원한 거랍니까?”
많아도 너무 많았다.
지금까지 신청한 사람들만 무려 2천여 명.
그리고 지금도 지원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제법 돈이 되는 일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지원하다니.
그래도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인데 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 로빈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게… 참. 최하급 큐브의 고블린의 경우, 사실 하급 마수보다 약한 놈이잖습니까? 장비만 있다면 하급 마수 따위는 일도 아니라는 모야족 청년들과 처녀들, 마수에 익숙한 에보니 마을 청년들, 그리고 은퇴한 기사들이나 병사들까지. 심지어는 투잡을 뛰겠다는 에테 마을 장정들까지 모조리 지원했습니다.”
“아니, 은퇴하신 분들은 마흔도 넘으신 분들이잖아요?”
“하지만 경력자인데다가 워낙 정정하신 분들이라 제외하기도 좀…….”
“보자, 무술관을 운영하시던 전대 기사들…하고 정년을 마치고 집에서 소일거리를 찾는 병사들이네요. 원래 그 나이면 현역에서 물러나는 게 맞는데 왜 이렇게 된 거죠?”
“그… 신전이 들어오고부터인가? 회춘하시는 어르신들이 늘어났다는군요. 실제로 몇 분 만나봤는데 기력이 젊은이들 못지않았습니다. 그분들에게 하급 마수 정도는 우스운 일이죠.”
“아, 신전…….”
언데드 대란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후, 신전을 위해 네 개의 강철 남근상을 바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얻은 혜택이 노화 방지.
그저 할아버지 카인이 좀 더 무병장수할 수 있을 거 같아 좋게 생각했던 그 노화 방지가 단순한 노화 방지만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50대 어르신들이 큐브에 들어간다는 건…….
“그리고 교육장에서 훈련받고 큐브에 출입하면서 치안대도 눈에 띄게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스킬이 대한 정보가 영지에 파다하게 퍼져서 우선 그거라도 얻고 보자는 생각도 있는 것 같고요.”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네요. 스킬이라니……. 그런데 이건 뭐예요? 투잡이라니요?”
“어차피 큐브는 하루에 한 번밖에 클리어하지 못하니 마을 근처의 큐브를 배정받으면 기껏해야 한 시간. 그러니까 생업에 종사하면서 여유 시간에 일을 처리하고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닌데, 제가 계획한 거랑은 너무 다른데요. 전 이것만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정예 파티를 모으고 싶었던 건데…….”
“아무래도 돈이 되는 일이라 그런 거 같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고 먹고사는 걸 걱정해야 했던 그레이츠 영지.
하지만 본격적으로 배를 띄우고 여러 가지 수입원이 추가되면서 영지 전체에 다양한 물건이 유입되었고, 이젠 돈만 있으면 웬만한 건 다 살 수 있었다.
돈 때문에 인심이 각박해질 정도는 아니지만 벌 수 있으면 뭐라도 해 돈을 벌자는, 그러니까 돈 버는 재미와 돈 쓰는 재미를 모든 영지민이 알아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 모야족조차 돈을 벌기 위해 따로 마수를 잡아 가죽을 벗기는 상황이 되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건 좀 곤란해요. 지금은 이렇지만, 앞으로는 양상이 달라질 텐데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뽑을 순 없죠.”
앞으로도 큐브의 수는 더 늘어나고 수준도 점점 높아진다.
지금은 그린 큐브가 60% 정도였지만 로빈이 본 소설의 최신 연재분에서는 노란색 큐브, 그러니까 옐로우 큐브가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즉, 이제 앞으로는 점점 옐로우 큐브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가장 낮은 등급의 옐로우 큐브에서 등장하는 적 중 대표적인 것은 흡고블린과 놀 워리어 정도인데 이 정도만 해도 하급 마수와는 상대도 안 되고, 수가 조금만 모이면 중급 마수도 사냥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우선 각성부터 하고 큐브 스킬을 얻은 후 다른 길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가죽 장인이라든지, 하급 마법 공학자들 있잖습니까? 큐브의 재료를 다루는 게 앞으로 대세가 될 거라고 그러는데, 듣고 보니 그럴듯하더군요.”
“아아, 그렇네요. 지금까지 병력들이 전적으로 처리했으니 그 사람들한테는 기회가 없었네요. 물론 영지 주요 인사들이야 미리 각성했지만요.”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다 보니 영지를 위해 일하는 인사들만 신경 썼는데 그 사람들 말고도 영지에는 기술자가 많았다. 각성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진 상황이니 그들도 각성에 대한 욕심이 없을 순 없을 거다.
“영주님, 우선 지원자들 모두를 2차 각성시키는 건 어떻겠습니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