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그게 되겠어요? 루터카우 각궁도 작은 물건은 아니잖아요?”
“어차피 어떤 생물이든 날개를 펴고 날아가려면 예비 동작이 필요해요. 그사이에 시위를 가눌 수 있게 연습한다면, 불가능은 아닐 거예요.”
“…우선 연습해 보죠. 만약 안 되면 월연 님은 검보다 활에 집중하셔야 할 거예요.”
“네, 영주님.”
“그리고 지크. 지크는 우선 듀발의 보조예요. 듀발이 상대의 공격에 큰 타격을 입든지, 아니면 충격에 튕겨 나가면 그가 돌아올 때까지 지크가 책임져줘야 해요.”
“딱 패시브가 발동될 상황이군요. 그러면 아무래도 방패보다 체술로 피하는 게 낫겠습니다. 제가 방패를 쓰는 건 그리 능숙하지 못하니…….”
“어쩌면 그게 더 괜찮을 수도 있겠네요. 듀발이 날아갈 정도의 공격을 지크가 완벽하게 방어할 거라고 기대하긴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다음 차례는 듀발이었다.
“듀발, 넌 지금부터 무조건 공격을 흘리는 것만 연습해. 정확히 막는 것보다 최대한 피해 없이 흘리면서 상대의 시선을 끄는 게 너의 목표야.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놈의 공격력이 너의 방어 능력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크니까.”
“예, 영주님.”
“마지막으로 린과 제필 경은 무조건 효율적으로 적에게 타격을 주는 거예요. 평소에도 하시던 일이니 어려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절대 상대로부터 타격을 입지 않는 거예요. 분명 장기전이 될 텐데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것보다 본인이 안전한 게 우선이란 걸 꼭 기억하세요.”
여기까지 각자에게 목표와 임무를 부여한 로빈은 자신이 계획한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했다.
“우선 미리 확인해 놓은 Y-A급 큐브에서 오우거를 상대로 연습할 거예요. 지금 Y-A급 큐브 세 개를 따로 준비해 놨거든요? 그리고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최근에 생겨난 Y-S급 큐브로 성과를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상대가 자이언트 오우거라는데 아마 한 마리뿐일 가능성이 크니 놈을 상대로 연습한 성과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거 같군요.”
“Y-S급…….”
“그리고 최후에는 대수림 안으로 들어가 놈과 가장 비슷하다고 추측되는 가메라를 상대로 마지막 점검을 해볼 생각입니다. 물론 날지 못하는 놈이지만 놈은 확실히 용종이니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상급 마수까지 상대한다는 말에 다들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놈이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연습은 확실할수록 좋았다.
로빈이 황도에서 레드 큐브를 열람해 보고 느낀 건 생각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거였다.
소설에서 그 황제를 빈사지경까지 몰고 갔던 데스포베가도 지금 영지에 생겨난 큐브와 동급인 R-B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끗발은 위일 거라 짐작했는데 동급이라니.
물론 황제도 그 큐브를 클리어한 이후에는 다른 레드 큐브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어쨌든 등급 자체로 보면 두 큐브의 난이도가 비슷하다는 의미였다.
소설을 볼 때는 그냥 레드 큐브라니 그렇구나, 하면서 등급까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는데 두 큐브의 등급이 같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후에는 그래도 B급이라는 안도감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최대한 할 수 있는 준비를 다한 후 전투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데스포베가가 물리 피해를 대부분 상쇄시키는 말도 안 되는 놈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우리가 상대할 놈도 만만치 않은 비밀이 있을 거야. 소설에서는 이걸 어떻게 잡았을까? 아니, 그전에 소설에서도 레드 큐브가 다섯 개였나? 분명 그때는 이쪽 북부가 거의 그로기 상태였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 의문은 그저 의문으로 남을 뿐이었다.
다음 날부터 바로 합동 연습에 돌입했다. 당연히 모두에게 통신기를 전달해 혹시 모를 의사소통의 문제까지 완벽하게 해결한 후였다.
그리고 일행을 모아 오우거를 사냥하기 위해 큐브에 입장했는데.
“핫!! 죽어! 이 덩어리!!”
“스핀 애로우!!”
“당신의 아이가 감히 청하오니~ 저희에게 힘을 내려주소서~ 뜨겁고 단단하게! 샘솟는 정욕이여~”
“으핫!!”
“용력!! 발산!!”
“용력!! 발산!!”
“음…….”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로빈은 깊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오우거 세 마리.
선두에 선 놈을 듀발이 방패로 막고 견제하는 사이 제필과 백랑이 뒤를 파고들어 놈의 등짝에 구멍을 내버렸다.
다른 한 놈은 지크가 유려한 몸놀림으로 다른 쪽으로 끌고 가버렸고.
마지막 놈은 린이 일대일로 상대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그 순간 레아 사제의 기도가 마무리되고 모든 멤버가 일종의 축복 피버 상태로 들어섰다.
그랬더니…….
“듀발이 상대하던 오우거는 백랑과 제필의 콤비네이션에 바로 급살. 지크가 데려간 놈은 사슬에 묶여 월연의 스핀 애로우 직격, 치명타를 입은 놈은 지크가 바로 마무리. 심지어 린은 혼자 빨개지더니 그냥 썰어버렸네?”
“흠흠.”
“이건 놈들이 약한 거야. 어쩔 수 없지.”
“역시 이 멤버를 모아서 오우거를 잡는 건…….”
사실 영지에서 가장 강한 인간들만 모아놨기 때문에 Y-A급 큐브를 무난히 클리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신의 축복이 이 정도로 대단한 효율을 낼 줄이야. 특히 린과는 또 궁합이 얼마나 좋은지 버프를 받자마자 바로 붉은 학살자가 발동되어 버린다.
정확히는 붉은 학살자+붉은 파괴 전차라고 할까?
어쨌든 저 둘이 같이 발동하니 오우거가 버텨내질 못했다.
영지 전력이 대단하단 건 정말 환영할 일이지만, 문제는 이래서야 연습이고 뭐고 의미가 없다는 거다.
“호흡을 맞추기도 전에 다 잡아버리니 이래서야 의미가 없어요. 여러 돌발 상황을 겪어봐야 나중에 당황하지 않는 법인데…….”
그래서 로빈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우선 큐브를 클리어했으니 물부터 빼고 정신을 차린 후에 내일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기로 말이다.
“하,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렇게 해도 잡을 수 있겠지? 큐브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는 건데.”
큐브 앞에 미리 준비한 막사에서 린을 위로 올리고 허리를 튕기던 로빈은 내일 있을 공략전을 생각하며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괜히 연습한답시고 시간 끌다가 이상한 문제라도 생길까 걱정되어서였다.
“하아~ 학~ 겨우 그 정도로 문제가 생길 리는 없어, 주인. 우릴 믿어.”
“그래, 그렇게 쫀쫀하게 조이면서 믿으라니 나도 믿고 싶긴 하네. 언제나 실망 주지 않는 린이니까.”
“히힛~ 앞으로 연습 끝날 때까지 낮 시간은 내가 독점할 거 같은데. 언니도 그렇고~ 하아~ 우리 꼬맹이도 바쁘잖아?”
“그건 그런데, 그러다가 나중에 어쩌려고? 오… 윽~ 독점이면 그만큼 책임져야 하는 거 알지?”
“힉~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어, 주인. 언니가 날 가만히 두지 않으려나 봐.”
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비아지만…….
그런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그게 무서워하는 얼굴이니? 그리고 갑자기 미친 듯이 조이는 건 또 뭔데.
그렇게 몸을 푼 후 다시 멤버들을 모았다. 모두 전투 후 뜨거운 섹스로 몸을 풀어서인지 컨디션이 매우 좋아 보였다.
이번 일을 위해 월연의 남자 루이와 백랑의 여자 월아, 적호까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제필의 애인인 소꿉친구 로네아 양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문제의 타네, 투네 형제 역시 하루 만에 어디서 여자를 구해왔다. 어제 회의가 마무리되자마자 월연이 어디로 데려가더니 어떻게 짝을 구해온 모양이다.
아니, 분명 이 세계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숙맥으로 보였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하루 만에 섹스까지?
로빈이 놀랍다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자 마찬가지로 루이와 뜨거운 한 판을 벌이고 온 월연이 환하게 웃으며 설명해 줬다.
“두 형제는 유명하다니까요. 누가 저 동정을 차지하나 내기까지 붙었는데요.”
그러니까 저 형제는 힘 좋고, 건실한데다가 기사이기까지 해서 모야족 내에서는 이미 인기 만점이란다. 지금까지 짝이 없었던 건 저 형제가 지나치게 둔감해 상대의 적극적인 대시도 전혀 알아채지 못해 그런 거였고.
그리고 본격적으로 짝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자 어제 바로 LTE급으로 짝을 구할 수 있었단다.
하여간 이런 쪽으로는 미친 듯이 빠른 세상이었다. 하긴, 다이앤도 첫날 바로 가슴을 허락했으니…….
“도대체 같이 놀자고 치마를 슬쩍 들어 올리는 부족 처녀에게 훈련 때문에 바쁘다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건 또 뭐래요? 덕분에 더욱 불타오른 처녀들도 있는 거 같지만……. 참 신기한 남자들이라니까요.”
지나가는 듯한 월연의 푸념에 로빈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정도면 저쪽 세상에서도 고자급인데? 이쪽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긴 하구나.
하지만 저 험상궂은 얼굴도 스트라이크 존이 태평양 같은 우리 모야족 처녀들에게는 야성미라니, 짝을 잘 만나긴 했다.
아니, 이 경우에는 오히려 급박한 상황을 틈타 두 남자를 겟한 여자들이 짝을 잘 만난 건가?
“자, 오늘……. 뭐, 수고 많으셨어요. 하지만 이래서는 연습이 안 될 거 같아서 조금 계획을 바꾸려고 해요. 다른 건 필요 없고요. 내일 올 때는 마수 뼈 몽둥이를 준비할 거예요. 듀발, 네가 대표로 가서 여덟 자루 받아와. 무슨 말인지 알지?”
“마법 부여도 안 된 마수 뼈 몽둥이를 만들어달라고 하면 되는 겁니까, 영주님?”
“응, 아마 금방 만들어줄 거야. 하급 마수의 뼈로 된 것도 괜찮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로빈의 계획은 간단했다.
어차피 연습이 안 될 거 같으니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빨리 잡고, 남은 한 마리로 연습하는 것.
하지만 제대로 된 무기로 공격하면 금방 잡을 테니 타격을 주기 어려운 몽둥이로 놈을 잡는 거였다. 갑옷까지 벗고 몽둥이로 놈을 상대하다 보면, 위기감도 제법 느끼게 될 테고, 전투 시간도 길어져 호흡을 맞출 시간도 나오겠다는 계산이었다.
물론 제법 등급이 높은 Y-A급 큐브를 가지고 이래도 되나 싶지만 정 안 되면 기존의 무기로 바꿔 바로 잡으면 되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계획을 변경하고 오늘 훈련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물론 각자 모여서 따로 훈련하긴 하겠지만 기본적인 일정은 종료된 것이다.
* * *
“이 녀석도 분명 그냥 애완동물은 아닐 텐데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참…….”
훈련을 대충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온 로빈은 자신의 애완동물(?) 칸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패시브 스킬로 탄생한 영혼의 파트너가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름: 라이칸 드라우제라츠 밀라드리오스 3세 (영혼의 파트너)
종족: 늑대 정령 (성체)
특성: 귀여움
스킬:
녀석을 소환할 때 들어간 그 엄청난 마나를 생각하면 그래도 뭔가 있을 거 같은데 아무리 고민해 봐도 저 녀석은 단순한 애완동물에 불과했다. 미성숙한 상태라면 몰라도 버젓이 성체라고 떡하니 적혀있으니 이견의 여지가 없었고.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녀석의 상태창에 비어있는 스킬 란.
거기서 뭔가 얻을 수만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저 녀석이 왜 나와 영혼의 파트너일까? 나랑 대체 무슨 연관이 있길래……. 어? 저 녀석, 어디 가는 거지?”
한참이나 칸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로빈은 녀석이 갑자기 정원 어딘가로 뛰어가자 호기심이 일어 조용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로빈?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
“어? 아아. 저 녀석을 좀…….”
“응? 칸이네요~ 음… 지금 이 시각이면 그곳이려나요?”
“다이앤은 뭔가 아는 게 있어?”
“그러지 말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가볍게 웃으며 로빈을 안내하는 다이앤, 로빈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이앤을 따라 칸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그냥 걸어 다니는 것도 동화책이네. 귀여운 건 정말…….”
종종걸음으로 짧은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꼬리를 붕붕 돌리는 칸. 특히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실룩거리는 모습은 녀석의 치명적인 차밍 포인트였다.
“헤헤. 그렇죠. 정말 귀엽다니까요. 칸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 저기 보세요. 딱 저렇게 되죠.”
“응?”
저 길이 칸이 주로 움직이는 산책로인지 하녀 하나가 반갑게 달려오더니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칸에게 내밀었다.
딱 봐도 제법 고급스러운 과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과자를 날름 받아먹더니 하녀의 품에 안겨 힘껏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꺄~ 칸. 간지러워~”
얼핏 보기에는 정말 가슴 따듯해지는 장면이지만 하녀의 품에 안겨 뺨을 날름날름 핥은 후, 이내 가슴에 폭 안겨 머리를 비비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