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그놈이라니요?”
“그, 있잖습니까? 예전에 족장이 가메라를 끌고 올 때요. 그때…….”
로빈은 전사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11년 전 전 마수 범람 때.
백랑과 모야족 전사들은 마수들이 들끓자 생존을 위해 가메라 서식지에 들어가 가메라를 꼬셔서 트리플헤드의 구역으로 도망쳤었다.
그리고 그때 가메라를 꼬신 방법이…….
“설마, 백랑이 던진 도끼에 대가리를 맞았다는 그 새끼 가메라요? 죽은 게 아니었어요?”
“…아무리 새끼라도 상급 마수인데 그렇게 쉽게 죽겠습니까?”
“그…건 그렇네요. 그러고 보니 머리 쪽에 깊게 파인 흔적이 있네요.”
“네,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저놈은 어렸을 때 백랑에게 도끼 빵을 당한데다가 부모까지 잃은 그놈이란 거네.
백랑은 부모의 원수고?
놈이 뛰쳐나온 것도 아마 백랑의 냄새를 맡아서겠지?
…그래, 가메라. 너의 복수심만은 온당하다.
황망한 일이었지만, 최소한 녀석의 복수심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그냥 얌전히 넘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 왜 하필 저놈이냐? 이래서 연습이나 되겠어?
아무래도 가메라를 상대로 작전대로 싸우는 건 포기해야 할 거 같았다. 놈이 끝까지 백랑만 물고 늘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적인 연습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대로 놈의 사냥을 중단할 순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로빈은 어쩔 수 없이 지금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의 포지션을 선택하기로 했다.
“하, 어쩔 수 없네요. 포지션 변경. 백랑이 선두로 아웃스탠더. 듀발이 보조해. 가능하면 한 방이라도 막아 놈의 공격을 흘리도록 하고.”
[예! 영주님.]
[아씨, 짜증 나네. 알았어, 영주님.]
“타네, 투네는 종전과 마찬가지. 사슬 대기해요. 지크, 공격조로 투입. 월연, 제필도 합류해서 최대한 힘을 빼세요. 대마수 포지션으로 변경합니다.”
[네, 영주님!]
백랑만 무턱대고 노리는 가메라.
하지만 덕분에 상대하기는 더 편했다. 패시브 스킬로 더 날렵해진 백랑을 놈도 쉽게 제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듀발 역시 간간이 놈에게 타격을 주며 시간을 끌어주었다. 가끔 날아드는 놈의 앞발이며 꼬리를 열심히 흘려내고 있었고.
또한 백랑에게만 집중하는 가메라의 빈틈을 제필과 월연, 그리고 지크가 노리고 들어갔다. 물론 치명상은 아니지만 계속되는 공격으로 상처에 상처를 더해가며 놈도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음……. 아직 어린 녀석이라서 약한 건가? 생각보다 수월한 느낌인데……. 어째 예전과는 좀 다른 거 같고.”
하지만 단순히 느낌이 그럴 뿐 이번 가메라가 더 약한 건 아니었다. 가메라가 장수 종이긴 하지만, 드래곤처럼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년기가 짧은 가메라는 10년이 되기도 전에 성체가 되고, 성체가 된 이상 10년이 된 녀석이나 100년이 된 녀석이나 그 전투력 자체는 그리 차이 나지 않았다.
결국 그때와 달라진 건 영지의 전투력뿐이었다.
“이 정도면, 상급 마수를 사냥하고 다녀도 되겠어. 물론 아무나 그럴 순 없겠지만, 최정예 집단이라면…….”
[헛!!]
[뒷발 온다!]
[꼬리!!]
본격적으로 사냥에 들어가자 로빈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가메라의 움직임이 느린 건 아니지만 날렵함보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마수였고, 직접 싸우는 전사들이 알아서 놈의 움직임을 파악해 서로에게 알리고 있어서였다.
예전에는 피하기에 급급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격세지감이었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는 먹이를 노리는 굶주린 흑표범.
영주의 최종 병기 린이 호시탐탐 놈의 목줄을 노리고 있었다.
다른 전사들과 기사들 역시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는데, 로빈이 명령하는 즉시 놈에게 달려들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황이었다.
“지금!!”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을 끌고 놈의 몸에 제법 상처가 쌓여가고 있을 때, 로빈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명령에 맞춰 놈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듯 사슬이 날아갔다.
공격까지 완전히 포기하고 놈의 주변에서 번개같이 움직이던 백랑에게 정신이 팔려 사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놈은 마법까지 걸려있는 사슬에 목을 내어주고 말았다.
[흐아!!]
[흐아!!]
이어서 터져 나오는 타네, 투네 형제의 괴성.
온 힘을 다해 가메라를 끌어당기는 두 형제의 완력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선천적으로 강한 힘을 타고난 두 형제가 큐브를 통해 더욱 강해져 가메라도 순간적으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려 린이 뛰어들었다.
거대한 대검, 린지애에 가득 깃든 붉은 마나.
축복을 받은 건 아니지만 몸에도 붉은 기류가 퍼져 나오기 시작한 걸 보니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흥분 지수가 꽤 올라간 모양이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 린은 듀발의 등짝을 밟고 다시 한 번 뛰어올라 몸부림치는 가메라의 굵은 목덜미에 대검을 박아 넣었다.
아무리 단단한 가메라지만 목덜미 부위는 가장 연약한 곳이었고, 그것에 정확히 파고든 대검은 목줄부터 뒤통수까지 그대로 관통했다.
“하……. 그때 그 모습의 재현이네. 폴 경이 린으로 바뀌었을 뿐. 역시 상급 마수는 이게 답인가? 큐브에서도 이렇게만 흘러가면 정말 좋으련만.”
정확히 계획대로 진행된 건 아니지만 결국 그렇게 10인만으로 가메라를 제압할 수 있었다.
물론 계획과 상관없이 두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닌 백랑은 욕설과 함께 놈의 시체를 한 번 걷어차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 왠지 우리가 악당 같은데. 저 백랑을 보니 딱 악당이 어울려. 잘 살고 있던 화목한 가메라 가족을 저렇게…….”
여유가 있어서인지 로빈도 이상한 상상과 함께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잠시지만 백랑의 마수에 유명을 달리한 가메라 가족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하지만 좋은 마수는 죽은 마수뿐이었다.
* * *
일이 엉뚱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어쨌든 상급 마수를 처리한 전사들은 보무당당하게 영지로 돌아왔다.
영지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가족들, 그리고 주민들 역시 거대한 가메라의 사체를 확인하고는 만세를 불러댔다.
“지난 5일간 수고 많으셨어요. 오늘은 쉬고 내일 상황을 점검할게요. 모두 해산!”
“와!!”
“오늘은 마을에서 잔치다! 모두 모여!!”
백랑의 선언과 함께 대수림 원정에 참여했던 모든 인원이 남쪽 요새 광장에 모여들었다. 물론 로빈과 기사들도 함께였다.
그리고 주민들까지 모두 모여 그야말로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하하! 마시라고!!”
“그때 린 단장이 딱, 하고 뛰어들어서 놈의 멱을 그냥!!”
“캬~ 그림 같았지. 역시 모야족의 자랑, 린 단장이라니까!”
“백랑 족장도 수고했지. 얼마나 얄밉게 놈 앞에서 알짱거리는지. 하하.”
“원래 족장이 그런 식으로 싸우는 남자는 아니지. 그런데 놈이 계속 자기만 노리니 어쩔 수 있나. 마지막에는 무기까지 버리고 피하는 것에만 집중했다니까? 물론 그 모습이 더 얄밉긴 했지만, 족장도 죽다 살았을걸?”
“도망 다니는 족장이라니. 11년 전 대수림 이후 처음 아냐? 아씨~ 내가 그걸 봤어야 했는데.”
마을 광장 한쪽에 설치된 상석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로빈은 전사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웃음을 터트리며 백랑을 바라봤다.
“아우, 저놈들을 진짜.”
도망 다니던 자신의 모습을 차지게 묘사하는 한 전사의 방정에 백랑도 어이가 없는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당사자인 백랑이 들어도 손에 땀을 쥘 정도로 실감 나는 묘사.
그리고 그 주위에는 백랑이 꽁지 빠지게 도망 다니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어 하는 모야족으로 가득했다.
사실 전사의 말대로 백랑이 고생하긴 했다. 원래 대마수 공략의 아웃스탠더는 그야말로 민첩한 움직임으로 최적화된, 세이라 같은 녀석이 서는 자리였으니 말이다.
백랑도 느린 건 아니지만 그 자리를 맡기에는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
예전에 가메라가 뛰쳐나왔을 때 백랑이 비슷한 역할을 맡긴 했지만 그건 가메라가 백랑 외에 다른 전사들까지 신경 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오늘같이 백랑만 죽자 살자 노렸으면 아무리 백랑이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거다. 그때보다 더욱 기량이 발전한 백랑이 오늘 고생한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에 가메라 시체에 화풀이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 모습 때문에 백랑이 더욱 악당같이 보였지만 뭐, 어떤가? 원래 마수와 인간의 싸움은 어떻게든 이기는 놈이 장땡이었다.
“역시 모야족이에요. 언제나 절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저런 모습을 보고 그러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떻게 하면 족장을 골탕 먹일 수 있을지만 생각하는 녀석들이라니까.”
백랑의 말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린 로빈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다시 한 번 기울였다.
알싸하면서도 향긋하고 깔끔한 느낌.
한입만 먹어봐도 반할 수밖에 없는 정말 좋은 술이었다.
“이 술은 뭐예요?”
“그거? 아아, 부족에서 담그는 술이야. 원래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그해에 술을 담아 그 아이가 결혼할 때 꺼내거든. 그 술인데, 영주님도 알다시피 우리가 대수림을 떠나면서 술 같은 걸 챙겨올 새가 없었잖아? 가메라 서식지 주변에도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마을에 그게 남아있더라고. 그래서 당연히 챙겨왔지.”
“그랬어요? 그럼 아직도 대수림에 이런 술이 남아있는 건가요?”
“에이, 우리가 여기 정착한 게 몇 년인데. 당연히 대부분 다시 챙겨왔지. 그런데 그 마을은 워낙 작은 곳이라 그냥 내버려뒀는데 술이 있을지는 몰랐지 뭐야.”
모야족도 그런 풍습이 있었구나.
잠깐, 그러면 린이 결혼했을 때도 월아 님이 직접 담은 술이 있었단 말이잖아?
“아, 그래요? 잠깐만요. 그럼 린이 결혼할 때도?”
“응? 당연히 깠지. 캬~ 그때 먹은 게 진짜였거든. 헤파렌 약초(저쪽 세상의 산삼과 비슷한 약초)랑 각종 과일로 빚은 거라 정말 맛이 기가 막혔는데 말이야. 월아가 그런 건 또 끝내주지. 흐흐.”
“그 좋은 걸… 혼자 드셨어요?”
“에이,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전대 영주님, 윌리엄 님. 마리아나 님과 함께 먹었지. 그게 풍습이야. 아, 세릴 님도 계셨지, 아마?”
그러니까 나만 빼고 모든 가족이 함께 먹었다?
뭐, 이런…….
그런 좋은 걸 자신만 빼고 먹었다는 사실에 묘한 배신감을 감추기 힘들었던 로빈은 왠지 꽁해져서 제 앞에 놓인 두툼한 고기를 집어 들고는 거칠게 씹어댔다.
하지만 고기의 맛이 입 안에 퍼지자 자기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양념이 잘 배 짭짤하면서도 육즙이 얼마나 풍부한지, 순간 울컥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려 나갈 정도였다.
“이거……. 루터카우네요?”
“응, 그래도 좋은 날이라 창고에 있는 걸 좀 꺼냈어.”
“오늘 꺼낸 게 다 루터카우예요? 엄청 무리했네요.”
“뭐, 기분 좀 내봤지. 먹고 기운 좀 내자고. 큰일 앞두고 있는데.”
축제 때 이미 별미로 인정받은 루터카우는 모야족 족장인 백랑도 자주 먹지 못하는 귀한 고기였다. 일반 토끼보다 더 빠르게 자라는 혼 래빗과 달리 루터카우는 소보다 생육이 느렸고, 개체 수도 거의 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대수림이 한가할 때야 그렇게 루터카우를 생포해 올 수 있었지만, 요즘처럼 대수림이 거칠게 맥동하는 시기에는 그런 위험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오늘 내온 고기의 양을 보니 적어도 두세 마리는 잡은 거 같은데 일주일 이상 숙성이 필요한 루터카우를 지금 도축한 건 아닐 테고 예전에 잡아 오늘을 대비한 거 같았다.
“덕분에 잘 먹었네요. 역시 루터카우예요.”
“후훗.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지. 기대하라고?”
“응? 뭘 또……. 어, 저건?”
백랑이 지시하자 월아가 직접 큰 접시를 챙겨 나왔다. 그리고 그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루터카우의 그것이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혼 래빗 그것보다 효과가 대단하지는 않지만, 맛과 풍미를 생각하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물건이었다.
아니, 희소성만을 따지자면 오히려 이것이 단연 우위였다.
“호호, 영주님. 맛있게 드세요. 제가 직접 요리한 거예요. 먹고, 아시죠?”
“네, 그럼요. 정말 감사합니다.”
작은 장모님 월아의 윙크가 무슨 의미인지 모를 로빈이 아니었다.
물론 이런 것과 상관없이 린을 아껴…준다기보단 괴롭혀주고 있지만, 서로 좋은 일이니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물건을 친히 대접해 준다면, 더 격렬하게 린을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