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와, 이걸 이렇게 먹어보네요. 사실 혼 래빗 그것도 먹기 힘들잖아요? 영주면 뭐 해요. 팔 물건이라 손도 못 대고. 가끔은 야속하고 속상할 때도 있다니까요.”
월아가 대접한 그것을 맛있게 냠냠하며 백랑에게 하소연했지만 백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로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상하네, 분명… 영주 저택으로는 주기적으로 몇 개씩 들어가는 거로 아는데. 영주님한테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
“…그래요? 몇 개씩이나요?”
로빈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사실이 조합되며 한 가지 해답에 도달했다.
혼 래빗 농장을 최종적으로 관리하는 백랑이 거짓을 말할 리는 없으니 분명 물건이 집으로 들어오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범인은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나 여사.
그리고 그 혼 래빗 거시기는…….
“하, 아빠구나. 물론 나한테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걸 다 아빠에게. 아니지, 할아버지도 함께인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끌끌, 역시 우리 사부인은 재미있는 분이라니까. 그걸 다 사돈어른께 몰아 드린 거야?”
“끙.”
“영주님, 어차피 영주님은 그런 거 필요 없다면서? 린이 맨날 그러던데. 완전 죽여준다고.”
“훗. 제가 몸 쓰는 건 엉망이지만, 침대에서는 패왕이거든요.”
“그래, 그러니 뭐, 좋게 생각하자고.”
“그래야죠. 별 도리가 있나요.”
결혼식 날 술부터 혼 래빗까지 뭔가 연속으로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그냥 허탈한 웃음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하여간 금실 하고는……. 먹을 거 가지고 투닥투닥이라. 확실히 나쁘지 않네. 정겨운 모습이야.”
정말 왜 동생이 생겨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금실이었다.
그리고 사이좋은 부부 관계는 화목한 가정의 상징이었으며, 전생에서는 꿈에서나 바라던 그런 행복한 모습이기도 했다.
지금 자신이 안 어울리게 직접 큐브 공략에 나서는 것도 사실 그런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뭐, 그건 그렇지만 한 번 정도는 써먹을 수 있겠는걸? 큭큭.”
다만 이 일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훗날 어머니가 아이 이야기를 꺼내면 이걸로 시간을 끌어볼 생각이었다. 사실 그 부분은 로빈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는데 좋은 무기가 생겼달까?
너무 몰아붙이지만 않으면 어머니의 마음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시일을 좀 미룰 수 있을 거 같았으니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 * *
그렇게 남쪽 요새 마을에서 먹고 마시며 즐긴 일행은 영주 성으로 돌아와 최종적인 브리핑을 진행했다.
가메라를 상대할 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 계획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사냥했기 때문에 이 점을 논의해 추가로 사냥 일정을 계획할지, 아니면 바로 큐브 공략에 나설지도 결정해야 했다.
“우선,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우리 10인만으로 사냥이 가능할지 염려했는데, 예상보다 더 잘해주셨고요.”
“아닙니다.”
“당연하지! 주인!”
“아,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로빈의 치하에 다양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참 성격대로라고 할까?
대부분 겸양하는 가운데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저 부녀는 역시 요주의 인물이었다.
“어제 사냥이 어땠는지 개인적인 의견을 먼저 듣고 싶어요. 연습 목적이었는데, 그게 전혀 안 됐으면 뭔가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하거든요.”
로빈의 질문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듀발이었다.
“어제는 사실 제가 별로 한 게 없었습니다. 다만 몇 번의 공격을 흘려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충격은 있었지만 버틸 만은 했으니까요. 방패 도발을 사용할 수 없어서 백랑 족장에게 몰려가는 걸 차단하진 못했지만 만약 큐브 안이었으면 그렇게 마음 놓고 백랑 족장을 노리진 못했을 겁니다.”
“그래? 그거 좋은 소식이네. 확실히 액티브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어제 같은 일은 거의 없을 거야. 타네 경은 어때요?”
“순간적으로 힘을 모두 쥐어짜니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사슬을 정확히 적중시키기만 하면 마법의 도움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으니 자신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타네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들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어제만 해도 액티브 스킬 없이 가메라를 힘으로 버텨냈다. 그건 아무리 중력 마법의 보조를 받았다고 해도 정말 대단한 공이었다.
그리고 큐브 안에 있는 놈이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액티브 스킬인 용력 발산까지 사용한다면 어제 가메라의 움직임을 봉쇄한 것처럼 그렇게 막아낼 수 있으리라.
“좋아요. 사슬 쪽은 그렇고. 공격조는…….”
“저희야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훈련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호흡이 빗나가지 않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건 역시 공격조.
사실 어제도 백랑이 빠진 가운데 제필과 월연, 그리고 지크만으로 놈에게 상당한 대미지를 누적시켰다. 놈을 마무리 지은 린은 말할 것도 없었고.
사람들의 말을 전부 들어보니 결국 어제 전투에서 얻은 건 두 개의 사슬로 상급 마수 정도 되는 괴수를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물론 그 괴수가 상당히 지치고 상처 입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대로 결전에 들어갈까요? 아니면 다른 상급 마수라도?”
“음, 영주님. 그전에 상급 마수를 잡을 여건이 되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거 같은데. 이게 무턱대고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사나 그런 게 필요하잖아? 저 가메라 서식지 찾는 데도 며칠은 걸렸거든? 조사에 오고 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그게 될까?”
“시간이… 촉박하네요.”
로빈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팀을 대표해 제필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번 연습의 목적은 듀발이 상급 마수 정도 되는 대적을 상대했을 때 그 공격을 무난하게 넘길 수 있느냐와 사슬로 놈을 제압할 수 있느냐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상태로 괜찮지 않을까요?”
그건 그랬다. 가장 의문 나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점은 어제 충분히 확인하긴 했다.
그러니까 결국 더 이상 연습 시간을 늘려도 큰 변화는 없을 거란 말이었다.
“시간도 문제군요. 무조건 겨울에 들어서기 전에 큐브를 클리어하는 게 목표인데 지금 벌써 겨울의 초입입니다. 준비는 철저한 게 좋다지만 이래서야…….”
“그렇네요. 확실히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어요.”
결국 로빈은 가능하면 빠르게 큐브에 도전하는 쪽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원래 계획도 가메라까지 처리하면 바로 큐브에 도전하는 거였고.
제필의 말대로 가장 중요한 걸 확인했으니 더 시간을 끄는 것보다 공략에 나서는 게 나았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 하나.
이 일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패하는 순간 영지가 날아갈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안이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략조로 선발된 인원 모두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언제나 발랄한 저 두 부녀의 경우는 좀 달랐지만, 제필이나 듀발, 그리고 타네, 투네 형제의 경우 그 긴장감이 로빈에게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마 영주인 로빈까지 공략조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긴장감을 더욱 배가시켰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딱 좋은 상태였다. 어제 가메라를 잡고 자신감이 올라갔음은 물론, 남쪽 요새에서 먹고 마시면서 긴장도 제법 풀렸으니 말이다.
만약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다시 긴장감이 고조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긴장감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작당한 긴장감이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대신, 과한 긴장감은 일을 망치게 된다. 변수가 많은 큐브에서 과하게 긴장해 몸이 굳어있으면 될 일도 안 되기 십상이었으니까.
“좋아요.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겠어요. 그럼 하루 쉬고 컨디션을 회복한 후 바로 도전하죠. 모두 준비하세요.”
“예, 영주님.”
그렇게 회의를 마무리 짓고 남은 시간에 잠시 잡담을 나누는데 반갑지 않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큐브만 공략하면 바로 결혼할 생각이야.”
“오, 형제의 합동결혼식인가요? 타네 경, 축하합니다.”
듀발에게 조만간 결혼할 거라 자랑하는 타네 경과 투네 경 형제.
“자네도인가? 사실 나도 결혼 날을 받아놨지. 그녀가 제법 오래 기다렸어.”
그때 봤던 그 소꿉친구와 결혼하겠다는 제필 경.
“어머, 저희도 이제 결혼할 생각인데요. 호호.”
그리고 레아 사제와 지크 역시 큐브만 클리어하면 바로 결혼하겠단다.
“그래? 좋은 일이네. 하긴 이번에 나도 큐브만 클리어하면 바로 아이를 가질 생각이거든. 저걸 클리어하면 다음 붉은 큐브가 언제 나올지 모르겠지만, 날 대신할 사람을 충분히 구할 수 있지 않겠어? 궁수대의 부대장 진진과 에이스 요미도 이제 제 몫을 하고 있으니…….”
심지어 믿었던 월연까지 이번 일을 마치면 반드시 아이를 가질 생각이라는데.
“와. 이모, 진짜? 그럼… 나도?”
…넌 안 돼, 이것아. 낄 데 끼어야지. 이 녀석이 또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그나저나 이 파티, 진짜 괜찮은 건가?
결혼 예정자가 무려 다섯에, 한 명은 임신 예정자.
온갖 플래그가 난무하는 상황이지 않은가.
하지만 로빈은 그냥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지금 저기에 끼어들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 같았으니 말이다.
* * *
그렇게 다음 날.
큐브 공략조가 큐브에 돌입한다는 소문이 영지 내에 파다하게 퍼진 지 오래였다.
이런 이야기가 퍼져 나가는 걸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막을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널리 알려 큐브 근처 인원을 수월하게 통제하는 게 더 바람직했으니 말이다.
당연히 큐브 주변에는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모든 기사, 그리고 전사들이 철통같이 경비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영지에 세작이나 그런 걸 침투시킨다면 오늘이 가장 위험한 날이다 싶어 모든 치안대를 동원해 영지 각 곳을 순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영지 전력 전체가 심혈을 기울인 총력전이었다.
“로빈, 꼭 무사히 돌아오세요.”
“응, 다이앤. 걱정하지 마. 나도 그렇게 무모한 놈은 아니니까.”
“로빈은 영주인데 굳이 그런 위험한 곳에…….”
“내가 가는 게 오히려 큐브 클리어 가능성이 높아. 예전에 다 설명했잖아.”
“그래도…….”
당연히 레드 큐브 클리어 팀에 가담하겠다는 걸 다이앤에게 이해시킨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막상 그날이 현실로 다가오자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가 보다.
“축복까지 받고 싸울 거야. 그 후가 어떻게 될지 알 만하지? 그러니까 딱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요, 로빈. 예전에 그 뭐지? 검스? 찢어지지 않아서 속상했죠? 이번에 공장에서 찢어지는 거로 새로 개발했대요. 그거 입고 기다릴 테니……. 알죠?”
피드백 속도 오지네, 진짜. 아무리 내가 영주라지만… 그렇게 빠르게 신제품을 개발했다고?
앤과 실비아가 그걸 입고 기다릴 걸 생각하니 또 불끈불끈한 게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멤버들도 가족 및 애인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니 또 사방에서 플래그가 꽂히는 기분이었지만, 나 역시 다이앤에게 엄청 꽂아서 이제 더 이상 깃발을 꽂을 곳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차피 죽고 사는 문제는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할 수 없는 법이니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자, 출발!”
로빈의 신호와 함께 모든 일행이 일제히 큐브에 돌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처럼 갑자기 시야가 바뀌며 전혀 생소한 곳에 도달했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분지.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놈, 드라쿠나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 이런 양아치들을 봤나. 꼬리만 달려있으면 용종이냐? 진짜 환장하겠네.”
체고는 대충 3미터 정도.
작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메라나 상급 마수처럼 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꼬리가 있을 뿐 두 발로 땅 위에 서있는데다가 양손에는 장창까지 들고 있었다.
즉, 저 녀석은 용종이지만 사실상 인간형처럼 무기를 다루는 놈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놈의 근육 형태, 체형, 그리고 무기를 봤을 때, 놈은 밖에서 예상했던 것과 달리 힘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빠른 몸놀림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민첩형이라는 거였다.
만약 이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사슬을 쓴다든지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거다. 저런 놈을 상대할 때는 오히려 몸놀림이 빠른 모야족 전사들이 훨씬 나았으니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 상황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로빈.
하지만 백랑은 놈을 바라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