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언제나 좋은 걸 얻을 수는 없는 법이라지만, 쪽지가 나왔다는 말에는 실망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로빈의 마음을 알아챈 건지 실비아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에이, 그래도 이상한 내용의 소설은 아닌 모양이던데요. 히센 님께 바로 보냈는데 히센 님의 표정을 보니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어요. 물론 그게 무슨 비전서나 연급 조합식은 아닌 거 같았지만, 그래도 뭔가 있는 거 같아요.”
조합식이나 비전서도 아닌데 히센이 실망하지 않았다라. 최소한 야설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슨 정보가 기록된 쪽지일까?
그게 뭔지는 나중에 알아봐야 하겠지만 레드 큐브를 힘겹게 공략하고 나온 게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 썩 달갑진 않았다. 뭔가 손해 본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무사히 클리어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모든 일이 예상 밖이라 식겁했으니까.”
하지만 이미 나온 보상을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모두 무사하다는 걸로 마음을 다스렸다. 큐브는 앞으로도 계속 생겨나기 때문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주인.”
“응? 린, 왜?”
나와 실비아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 그러던 녀석이 너무 의기소침해 있어서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고.
혹시 이 녀석, 내가 쓰러진 게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입버릇처럼 날 지키는 게 자신의 가치라고 말하던 녀석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좀 다르지 않나?
“꼬맹이한테 다 들었어. 주인이 그런 약까지 먹게 만들다니. 다 내 잘못이야!”
큰 죄를 지은 듯 무릎까지 꿇고 사죄하는 린을 보니 이게 뭔가 싶어 헛웃음만 나왔다.
일종의 도게자? 뭐 그런 비슷한 모습이었는데 저렇게 엎드려 있는 린을 보니 또 막 괴롭히고 싶은 욕구가…….
로빈은 자신이 이런 엉큼한 생각을 하는 게 다 실비아가 약을 잘못 만들어 그렇다고 합리화하며 린을 일으켜 세웠다. 계속 저대로 두다가는 욕망에 무너진 자신이 뭔가 또 변태적인 짓을 할 거 같아서였다.
아무리 아내들을 대할 때는 좀 막 나가는 자신이지만 저렇게 진지한 린에게 차마 그럴 순 없었으니 말이다.
“에휴, 로빈. 좀 말려봐요. 로빈이 쓰러진 후 내내 저런다니까요.”
“솔직히 멍청이 잘못은 아니죠. 다 아는 걸 저 멍청이만 모른다니까요. 멍청해서 그런가?”
“음…….”
그러고 보면 실비아와 린도 참 애증의 관계랄까? 서로 심심하면 물어뜯지만 또 묘하게 선을 넘지는 않는다. 은근히 서로를 위하는 것도 같고.
저런 관계를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로빈은 고개를 저으며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린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하지만… 내가 좀 더 강했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녀석을 막막 때려잡으면 그게 인간이냐? 괴물이지. 이번에는 진짜 우연에 우연이…….
아, 그래. 이 녀석도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지?
놈에게 치명타를 날리기 위해 무기를 던져 불알에 정확히 명중시킨 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상황이 워낙 긴박했고, 린의 능력이라면 놈을 맞히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물론 직접 몸을 움직여 놈을 공격하는 게 베스트였지만 급한 마음에 무기를 던진 걸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결과였다.
린의 붉은 마나를 가득 품고 날아간 린지애가 놈의 불알을 꿰뚫었으면 몰라도 아예 폭발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맞다. 너, 대체 왜 무기를 던진 거야? 빗나갔으면 어쩌려고.”
“으…응? 그게…….”
“그게?”
“무조건 맞을 거 같았어. 주인이 그랬잖아. 난 전차 같은 여자라고. 막 화가 나니까 전차처럼 녀석을 날려버릴 방법이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했는데…….”
“했는데?”
“드디어 스킬이 생긴 거 있지? 아무래도 전차처럼 그렇게 행동한 게 답이었나 봐.”
이름: 린 그레이츠
성향: 호전적. 도전적. 호색.
타이틀: 흉포한 검은 야수(S).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L). 붉은 학살자(L). 대검의 달인(R). 큐브 정복자 - 레드(S)
패시브: 붉은 파괴 전차 (랭크 B)
엑티브: 분노의 포격 (랭크 C)
끙, 무슨 대포라도 되냐? 분명히 이 전차가 그 전차는 아닐 텐데. 게다가… 응?
예전에 잘못 설명한 전차 때문에 또 이런 식으로 꼬여버린 거 같은데 저런 스킬이 생긴 게 린에게 득인지, 실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스킬의 파괴력만은 굉장한 것 같지만 무기를 던지는 스킬이라니. 잘못 사용하다가는 죽기 딱 좋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갑자기 생겨난 타이틀, 큐브 정복자였다. 분명 지금까지는 저런 게 없었는데 레드 큐브부터는 뭔가 다른 보상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첫 번째 레드 큐브를 정복한 소설 속 황제가 큐브에서 날아다니더니, 큐브 내에서 전투 능력이 향상된다는 저 큐브 정복자 때문인 거 같았다.
잠깐, 그럼 나도 저 타이틀을 얻은 거잖아?
그럼 내 전투 능력도 올라간 거고. 이거 생각보다… 더 괜찮을지도?
“주인? 표정이 좀 이상한데…….”
“응? 아니야. 어쨌든 네 잘못은 아니고 괜찮으니까 기분 풀어. 알았지?”
“응. 고마워, 주인. 사… 사랑해!”
“풋, 그래. 알았어.”
왜 또 갑자기 훅 들어오고 그러냐? 당황스럽게.
하지만 주변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해하는 다이앤을 보니 린답지 않은 행동은 그녀의 코치 덕분인 거 같았다.
이 선머슴 같은 녀석이 저런 귀여운 모습이라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물론 스킬에 대한 건 좀 더 상황을 지켜볼 필요성이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제법 만족스러웠다.
“다이앤, 칸은 어디 있어?”
“칸이요?”
“왕~왕~”
그리고 린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겨준 불세출의 애완견 칸.
다이앤에게 이 녀석이 어디 있는지 물었는데 자신을 부른다는 걸 또 어떻게 알아챘는지 저쪽에서 헉헉대며 뛰어오고 있었다. 뒤뚱뒤뚱 뛰어오는 모습이 또 어찌나 귀여운지.
갑자기 나타나 놈의 불알을 깨물고 도망치는, 그런 희대의 히트 앤드 런을 구사했다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와. 이 녀석, 진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품에 안았더니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며 좋아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요 녀석아. 그래도 정령인데다가 명색이 늑대인데, 품격은 지켜야지.”
“왕!왕!”
정령이라지만 그래도 늑대인데 진짜 강아지보다 더 사람을 잘 따르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 한마디 내뱉은 로빈은 녀석을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친 채로 자세히 관찰했다.
이름: 라이칸 드라우제라츠 밀라드리오스 3세 (영혼의 파트너)
종족: 늑대 정령 (성체)
특성: 귀여움
스킬: 물어, 왕!(비활성). 나 잡아봐라(비활성)
“…진짜 스킬이었잖아?”
그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하며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스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진짜 스킬인 걸 확인하고 나니 감개가 무량할 정도였다. 저 녀석이 대단하다는 건, 녀석을 탄생시킨 자신의 스킬 역시 대단하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저 마스코트 같은 귀여운 녀석인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제법이지 않은가.
“게다가 이건 진짜 개사기인데?”
물어, 왕!
라이칸 드라우제라츠 밀라드리오스 3세가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으로 상대의 치명적인 급소를 공격, 상대를 도발한다.
도발 성공 확률 100%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순간 이동으로 불알을 물어버리니 절대 못 피할 거 같긴 했다. 그리고 놈이 칸만 쫓아다닌 것도 저 도발 능력 때문인 거 같았다.
사실 이것만 해도 사기적인데 더 가관인 건 다음 스킬이었다.
나 잡아봐라
도발한 대상으로부터 도망칠 경우, 상대는 라이칸 드라우제라츠 밀라드리오스 3세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
지속 시간 10초
놈이 미친 듯이 칸을 뒤쫓았지만 잡지 못하고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한 게 바로 저 스킬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무려 10초나 칸을 따라다니며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말이 10초지, 린 같은 녀석이 날뛰기 시작하면 수백 명도 날려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만 비활성화 상태라는 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저 스킬은 자신의 마음대로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아닌 모양이다.
하긴 저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면, 예전에 큐브에 데리고 들어갔을 때 오우거를 상대로 바로 저 스킬이 발동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 해도 어딘가. 저런 사기적인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로또를 맞은 기분이었다. 스킬의 사용 조건은 어떻게든 알아내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아우~ 이 귀여운 녀석!!”
로빈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녀석을 끌어안고 볼을 비비자 녀석도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녀석을 관찰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하녀들에게는 적극적이지만 하인들의 접근에는 무덤덤했는데 그래도 영혼의 파트너라고 자신이 좋긴 한가 보다.
“훗, 우리 칸이 귀엽긴 하죠. 로빈도 결국 칸에게 함락되신 거군요. 지금까지 너무 무심하신 거 같아 걱정되었는데.”
자신이 마치 칸의 부모라도 된 양 의기양양한 다이앤의 모습이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칸과 내가 영혼의 파트너였으니, 녀석과 다이앤과의 사이도 보통이 아닌 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하하, 그래. 이제 좀 더 신경 쓸게.”
그리고 이제 더욱 녀석을 신경 쓸 생각이었다.
물론 이 녀석이 보물 중의 보물이라는 게 확실해져 특별 관리에 들어가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녀석을 부둥켜안고 한껏 귀여워해준 후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뭔가 허전했다. 당연히 야단법석을 떨고 있어야 할 가족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네. 왜 가족들이 조용하지?”
자신이 무려 3일이나 기절한 대사건이었다. 할아버지 카인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지만, 자신의 일이면 두 팔 걷어붙이는 어머니, 마리아나가 조용한 건 정말 의외였다. 지금쯤이면 한달음에 달려와 다시는 큐브에 들어가지 말라고 대성통곡하는 게 당연한 일이거늘.
“지금 다들 쉬고 계세요. 3일 동안 내내 이곳을 지키고 계셨거든요. 쓰러지실 거 같아서 억지로라도 돌려보내야 했어요. 바로 깨울까도 했는데, 너무 지치신 거 같아서 아직 알리지 않았고요.”
“아, 그래? 잘했네. 어머니께서 그러셨어?”
“아뇨, 다들요. 아가씨까지 와서 대성통곡이었다니까요.”
“…세이 녀석까지?”
꼭 쓰러진 사람 옆에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다가 자기가 쓰러져 막상 그 사람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자신의 가족들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쓰러졌을 때 모든 가족이 이곳에서 자리를 지켰다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무려 3일이나 말이다.
응? 3일이나? 그렇다는 건…….
“앤, 그러니까 3일 내내 다들 이곳에 있었다고? 돌아가지도 않고?”
“네, 로빈. 당연하죠. 가족이 그렇게 쓰러졌는데 어떻게 마음을 잡겠어요?”
“아니, 그건 그런데. 내 말은 그러니까……. 3일 내내 내가 수십 번 벌떡 했다지 않았어? 그냥 불끈하기도 하고, 정신을 잃은 중에 거칠게 응응하기도 했고.”
“예? 네. 그랬죠.”
“그러니까, 그럼 그걸 다들 봤겠네?”
“에이, 로빈.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당연하죠. 다들 여기 계셨는데요.”
“…그래, 별말 없으시디?”
“음……. 다들 슬퍼하는 가운데 그때만은 즐거워하셨죠. 아버님이랑 할아버님은 역시 그레이츠의 장남이라고 기꺼워하셨고요. 어머님이랑 작은어머님은……. 저렇게 화끈하니 곧 아이를 보지 않겠냐고 그러셨던가? 그리고 아가씨는 그러니까…….”
“우리 오빠 제법인데! X지도 제법 굵직하고! 마른 장작이 잘 탄다더니, 나도 생각 좀 해봐야겠는걸. 이렇게 말했어요, 영주님.”
“끙, 그래?”
우리 가족들에게 대체 뭘 바라겠냐마는 아무래도 지난 3일간 내 난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관찰하신 거 같았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그런데 대성통곡했다더니, 그러면서 그걸 보고 저렇게 좋아할 수도 있는 건가? 게다가 하루에 몇 번이나 그랬는데 그때마다 좋아했다니 그 정도면 엉덩이에 털이 나도 여러 번 났겠는걸. 보기에 따라서는 조울증이 의심될 정도고 말이야.
“그래도 세이 정도는 내보내지 그랬어? 녀석은 아직 성인도 아니잖아?”
“응? 성인이 아닌 게 무슨 상관이에요?”
“아아, 그렇지. 후~ 그래, 뭐.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니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