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이쪽 세계에서 이게 별문제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지만, 왠지 모를 자괴감만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세이라 녀석의 한마디는 더욱더 그랬고.
저게 칭찬은 맞는 거 같은데 여동생에게 저런 말을 듣는 기분이 참…….
두고 보자, 세이 녀석. 네 남자가 얼마나 큰지 내가 꼭 확인하고 말 테니까.
그리고 세이라에게는 절대 혼 래빗 그것을 넘겨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날 저녁, 쉬다가 깨어난 가족들은 로빈에게 달려와 눈물을 쏟아냈다. 다이앤의 말을 듣고 자괴감을 느낀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었다.
이러니까 또 왠지 나만 이상한 놈인 거 같아 기분이 묘했는데, 그래도 나를 걱정하는 가족들의 마음이 너무 잘 느껴져서 마음이 따듯해졌다.
마리아나는 예상대로 큐브 출입 금지령을 내리려고 해서 그녀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웬만하면 영지 일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 마리아나인데 내가 쓰러진 건 제법 충격이었나 보다. 사안이 사안이라 그런지 쉽게 설득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하긴, 아들이 갑자기 쓰러진 상황에서 놀라지 않을 어머니는 없을 테니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리아나의 말대로 큐브에 출입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렇게 설득을 하다 하다 정말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어머니 마리아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하, 어머니. 제가 북부의 사자, 사자후 로빈이에요. 제 영지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죠.”
이런 소리까지 했다. 정말 말하면서도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서 혼났는데, 그래도 저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큐브 출입을 허락하는 분위기였다.
“세이는 나중에 애인이 생기면 꼭 나한테 데려와. 내가 확인할 게 많으니까?”
“응? 오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잊지 마. 알았지?”
“으…응. 뭐, 알았어.”
세이라에게는 이렇게 따로 경고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말하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러면 또 진상 부리는 오빠처럼 보이는 건가?
그렇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이 되자 같이 공략에 나섰던 인원들이 로빈을 문병 왔다. 며칠이나 요양해야 하는 로빈과 달리 그들은 단순한 탈진 정도라 벌써 쾌차하고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요~ 영주님, 드디어 깨어났다지?”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영주님!”
“아, 다들 왔어요. 다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짓궂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백랑과 일행들. 다들 듣던 대로 몸을 회복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제필 경은 좀 어때요? 아직도 거동이 불편한가요?”
“아아, 아무래도 그렇지. 그나마 장기가 상하지 않아서 그 정도라니까.”
“신전의 능력으로도 아직이라니, 상처가 심한가요?”
“상처 자체는 이제 괜찮은 거 같은데 그 왜 있잖아. 예전에 폴 경이 다쳤을 때처럼 내상이 있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놈의 공격에 특별한 마나가 실려있었나 봐.”
“…그래요?”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장기가 상한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치료 기간이 길다 싶어 물었는데 마나에 의한 내상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렇다면 당분간은 무조건 요양하는 게 바람직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린 역시 놈에게 많은 상처를 입었는데 그런 내상을 입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마 가속을 이용한 깊은 공격이라 더 치명적이었던 모양이다.
“후. 제필 경 덕분에 무사했는데, 제필 경의 상처가 깊다니 마음이 무겁네요.”
“그렇게 따지면, 뭐. 우리 역시 제필 경이 살린 거나 마찬가지지. 영주님이 나서서 놈을 상대하지 않았으면 우리도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글쎄요, 제필 경의 공이 크긴 하지만 누구만의 공이라고 할 순 없는 문제죠. 누군가가 그 진흙 인형을 상대하지 않았으면 저랑 린이 녀석을 상대할 수나 있었겠어요? 놈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벅찬데 뒤에서 진흙 인형이 덮쳐온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네요.”
“하하, 그건 그런가?”
겸양이나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계획한 것과 전혀 다른 상황에서 그렇게 놈을 처리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모두의 공이었다. 물론 크고 작음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도 미세한 차이고 모두가 노력해 얻은 결실이랄까?
그중 나를 살린 제필의 공이 가장 크긴 하지만 그렇다고 같이 고생한 다른 멤버들의 공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말이야. 영주님도 눈치챘겠지만 클리어 마크인가? 이게 좀 변했어.”
“그렇죠. 저도 확인했어요.”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린의 타이틀이 변한 거지만 클리어 마크가 변했다는 사실 역시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단순히 큐브 클리어 단계를 표시해 놓은 클리어 마크에 붉은색 원이 추가되었으니까.
아마 레드 큐브를 클리어했다는 게 이쪽 시스템상으로도 제법 의미가 있는 일이었나 보다.
“그래서 뭐가 달라진 게 있나 싶어 큐브에 들어가 봤는데, 확실히 체감될 정도로 강해진 거 있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인원들도 다 마찬가지였어. 그런데 이게 단순히 큐브에서만 강해진 거 같지 않더란 말이지.”
“그래요? 그건 좀 의외인데요. 분명 큐브에서 더 강해지는 거라고 했는데…….”
어제 확인하기로 큐브 정복자 타이틀은 분명 큐브 내에서 더욱 강해지는 거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소설에서도 이 부분을 특별히 언급한 적은 없었고. 레드 큐브를 클리어하면서 다음 큐브를 더욱더 쉽게 클리어할 수 있었다는 정도로만 기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큐브 내에서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강해졌다는 걸 보면, 큐브 마크에 새겨진 붉은 원이 현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패시브 스킬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되면 레드 큐브의 가치가 생각보다 대단해져 계산이 복잡해진다.
“음……. 생각 좀 해봐야 할 문제네요.”
우선 지금 큐브를 클리어해 격이 한 단계 올라간 인원으로 다음 큐브를 클리어하면 물론 공략은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물을 파워 업 시킬 기회를 상실하는 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일장일단이 있었지만 수 계산이 복잡해진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능력도 안 되는 놈들이 큐브를 클리어하겠다고 설치지나 않을지 걱정이었다. 터지면 재앙인 레드 큐브를 자격도 되지 않는 놈들이 클리어하겠다고 설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질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목숨 아까운 줄 알고, 레드 큐브를 클리어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안다면 그런 모험을 하지 않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상식적일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건 물론 나보다 황제가 더 고민해야 할 일이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아마 황제도 이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이걸 어떻게 할 생각일까?
그건 나중에 황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황제가 알고 있을 만한 정보지만 나 역시 할 바를 다 해야 하니 이 사실을 황실에 따로 알릴 생각이었다.
백랑이 알려준 정보 때문에 잠시 머리가 복잡하긴 했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가벼운 것들뿐이었다. 사실 먼저 꺼낸 이야기조차 따지고 보면 영지의 에이스들이 더욱 강해졌다는 말이었으니 영지 입장에서는 반길 만한 일이었고.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예요?”
“아무래도 겨울이 오기 전에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며칠 안에 치를 생각입니다.”
“헤~ 합동결혼식이라고 했죠?”
“예, 영주님.”
그리고 그중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역시 타네, 투네 형제의 결혼식이었다. 만난 지 하루 만에 거사를 치르고, 한 달도 되기 전에 초속으로 결혼식까지 직행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쪽 세계가 이런 부분에서는 빠른 편이었지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상대가 생긴 이상 더 미룰 생각은 없습니다. 아버지도 무조건 결혼부터 하라고 성화셔서…….”
“그래요?”
두 형제가 결혼을 서두르는 건 아무래도 부친의 뜻이 강해서였는데, 두 여자를 만나본 부친이 저 정도면 마음에 드니 무조건 서두르라고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형제의 외모를 생각하면 저렇게 바로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미녀, 그것도 성격까지 괜찮은 여자를 다시 찾기는 힘들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모야족 내에서 인기 만점인 두 기사의 입지를 생각하면 옳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형제 역시 이리저리 간을 볼 게 아니라면 부친의 말대로 빨리 혼례를 치르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 그렇게 결정했단다.
“확실히 부친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도 중요한 일이죠. 여자 측 가족 분들은 뭐라던가요?”
“네, 감사하게도 저희를 진심으로 반겨주시더군요. 오히려 데려가줘서 고맙다고 하시는데, 그때 딱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두 형제가 결혼하게 될 모야족 처녀들은 모야족 입장에서는 결혼 적령기가 많이 지난 여성들이었다.
대부분 성년이 되면 그 무렵에 바로 결혼하는 모야족의 풍습상, 스물이 넘은 처녀들은 조금 늦었다는 평가가 대부분인데, 영지와 교류하는 젊은 층보다 모야족 마을에서만 생활하는 지긋한 어른들이 더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혼기를 놓쳐 큰 고민거리던 딸을 기사, 그것도 영주와 함께 큐브를 클리어할 정도로 유망하고 건실한 기사들이 데려가겠다고 하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밖에.
결국 자신의 자식들이 너무 우락부락하게 생겨 결혼을 못 할까 걱정하던 두 기사의 부친과 혼기를 놓쳤다고 생각해 가능하면 빨리 딸을 처분(?)하고 싶어 하는 모야족 처녀들의 부모가 합심해서 결혼을 서두르니 순식간에 혼인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두 집안의 시선 차이가 뭔가 재미있긴 했지만, 영지가 완벽하게 통합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벌써 11년이나 지났는데도 저런 부분에서는 아직 서로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제 서로에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각이 다르네요.”
“그래? 그 정도야, 뭐.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겠어?”
“그럴까요? 벌써 10년도 넘게 지났는데요.”
“하하, 저거야 귀여운 수준이지. 그래도 범죄 같은 무거운 쪽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잖아? 풍습 같은 것까지 변하려면 적어도 수십 년은 필요할 거야.”
백랑의 말에서 로빈은 스스로가 조금 성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저 말이 백랑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옳은 말씀이네요. 그런데 왠지 백랑 님 같지 않은 게…….”
“뭐? 영주님, 이거이거. 사람을 뭐로 보고 그래? 그래도 경험에 따른 연륜이란 게 있는 법이라고. 지금 한창 자라고 있는 모야족 아이들은 영지민과 지내는 것에 익숙하니까, 아마 이 세대가 지나면 많이 달라질 거야. 대수림에서만 살던 어른들이 생각을 바꾸는 건 쉽지 않지.”
“그렇겠죠? 그렇게 되면 모야족 여성이 남편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뀔까요?”
“응? 그건 안 바뀔걸?”
“아니, 왜요?”
로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백랑은 음흉하게 웃으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그럴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마음에 와닿는, 그러니까 그럴 듯한 개소리였다.
“왜긴, 잘 들어봐. 나야 익숙해서 잘 몰랐거든? 그도 그럴게 우린 계속 그런 걸 보고 자랐잖아? 그러니 전혀 이상한 것도 모르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그랬겠죠.”
“그런데 가만 보니 이게 은근히 매력 포인트더라고. 영지 남자들이 엄청 좋아하잖아?”
“…그래요?”
“그래, 그런데 왜 그런 매력 포인트를 포기하겠어? 호칭이야 뭐라고 부르든 손해나는 것도 아니잖아? 시대가 완전히 달라진다면 몰라도, 모야족 마을이 남쪽에 남아있는 한 그건 계속될 거라고 봐.”
“음…….”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았다. 물론 이것도 시간이 한참 지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백랑의 말을 들어보니 한두 세대 정도로는 그런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 거 같긴 했다. 사실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 * *
백랑과 일당들이 병문안 와서 한바탕 헤집고 지나간 자리에 지온이 찾아왔다. 병문안 겸 몇 가지 사안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영주님,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보다, 제가 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되고 있나요?”
로빈은 지온에게 사람들의 입을 단속하라고 명했었다. 이제 황제가 전국 순회를 돌고 있는 상황에서 그레이츠 영지에서 레드 큐브를 공략했다는 사실을 공표해 괜히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