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지금 황제가 나서 큐브를 공략해 민심을 수습하고 있는데 괜히 이쪽이 더 주목받는 상황이 벌어지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레이츠 영지에서 레드 큐브를 공략했다는 건 황제가 황도에 자리 잡은 레드 큐브를 공략한 후에 따로 알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영지민의 입을 어느 정도는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황제에게는 푸시 캣츠를 통해 이미 알린 후였다.
“큐브를 공략한 날은 영지 전체를 통제했고, 사전에 따로 공지했으니 크게 새어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애초에 우버 마을을 제외하고는 외지인이 방문하지 않는 곳이니까요.”
“그래요? 하긴, 지금 다른 영지에서 이런 곳까지 신경 쓸 여력도 없죠?”
“네, 여러 가지 일이 겹쳐 정보를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겠지만, 널리 알려지는 데는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공식적인 공표가 아니라 소식을 접해도 긴가민가할 테고요.”
영지의 소식을 알리지 않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처럼 혼란스럽고, 자신의 영지 간수하기도 빠듯한 상황에서 다른 영지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드물었으니 말이다.
물론 사람들의 입을 아예 틀어막지 않는 이상 전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온의 말처럼 시간을 늦추는 건 가능해 보였다.
“아, 제가 쓰러지면서 난리가 나서 그렇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걸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하긴…….”
내가 쓰러진 3일간, 영지의 분위기가 정말 침울했다고 한다.
멀쩡하던 영주가 큐브에 들어갔다가 쓰러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영주도 아니고 영지민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런 영주가 아닌가.
그래서 우버 마을을 방문한 방문객들도 영지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을 거다. 그리고 정보를 이리저리 조합하다 보면 결국 레드 큐브가 클리어되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될 테고.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계산하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공식적인 발표를 미루면서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겠네요. 저희가 나대지 않으면 황도나 먼 곳의 사람들이 알 일은 없을 테니까요.”
“네, 그건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요. 다른 문제는 없나요?”
“황제 폐하께서 푸시 캣츠 쪽을 통해 우려를 전하셨습니다. 빨리 쾌차하길 바라신다는군요.”
“그래요? 이제 나았으니 다 나았다고 연락이라도 드려야겠네요. 지온이 사람을 시켜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지금 제 상황이 이래서요.”
“네, 알겠습니다. 최소한 며칠은 더 쉬셔야 한다니, 그렇게 해야겠군요.”
황제와 푸시 캣츠를 통해 밀담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지온뿐이었다. 원래 모두에게 비밀로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행정적인 편의를 위해 지온에게만 살짝 알린 것이다.
내가 자리를 비운다면 모든 행정적 처리를 지온이 도맡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황제도 젝트에게 그 역할을 맡긴 상황이었다.
“황제 폐하의 영지 순례는 시작되었나요?”
“네, 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12일 동안 열한 개의 블루 큐브를 정리하겠답니다. 그리고 일주일 쉬고 바로 레드 큐브를 공략한다니…….”
“대단한 강행군이네요. 황제 폐하다운 터프한 강행군이군요. 아마 큐브를 클리어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강조하기 위해 더 급하게 움직이는 거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황제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니, 뭐……. 혹시 북부에 따로 알려온 보고는 없나요?”
“다른 5대 방벽 영지들이 대마수 체제로 돌입한다고 알려왔습니다. 아마 그곳들도 큐브 클리어는 주민들에게 맡길 심산인가 봅니다.”
“역시 그런가요? 문제는 없으려나 모르겠네요.”
“다른 곳은 몰라도 로랜의 경우는 지원군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요.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그 정도입니다.”
“로랜이라…….”
로랜 자작령은 그레이츠처럼 대수림과 마수 산맥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에 많은 방어 인력이 필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큐브까지 더해져 일이 늘어나버렸으니 좀 더 세심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다른 영지에서 인력을 지원해 주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랬고.
“확실히 알아볼 필요는 있어 보이네요. 로랜 자작가로 연락해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세요. 큐브 클리어 상황부터, 새로 뽑은 클리너들이 충분히 큐브를 클리어할 수 있을지까지요. 별문제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만약 상황이 안 좋다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기사들이나 치안대를 파견하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닌데요.”
“그렇죠? 치안대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놓아야 하는 인원이니 그들을 파견하는 건 말도 안 되죠.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어차피 로랜 영지도 마수를 막을 전력은 되니 그냥 클리너를 파견하려고요.”
“예? 그건…….”
“불법이죠. 하지만 안 걸리면 장땡 아니겠어요? 저랑 로랜 자작만 입 다물면 굳이 따질 사람도 없고요.”
“음…….”
“깊이 생각할 거 없어요. 저도 은퇴 기사들이랑 병사들이 대거 지원한 걸 보고 그런 방법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한 거니까요. 생각해 보니까 정규군이라고 속이고 보내면 클리너 라이선스랑 상관없는 거 아닌가요? 일반 주민들이라면 몰라도 병역에 몸담았던 클리너들은 영지의 요청에 흔쾌히 승낙할 거예요. 아, 물론 그쪽에서 큐브 공략이 어려운 경우에만 그럴 거니 앞서 나가지 말자고요. 다른 영지도 그들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해 놨을 거예요. 그쪽으로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요.”
로빈의 말대로 괜한 걱정일 가능성이 컸다. 처음 로빈이 변경백이 된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몇 년간 꾸준히 이익을 얻은 다른 영지들 역시 충분히 자력으로 마수를 막고 큐브를 클리어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지온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므로 저렇게 고민하는 거였다.
“그쪽은 지온이 다시 좀 알아보세요. 그리고 우리 영지는요?”
“영지도 대마수 체제로 들어갈 겁니다. 전사들하고 기사들을 대부분 각자 위치로 돌리고, 각 마을은 치안대 1대대 일부와 클리너들이 큐브를 처리하는 방식으로요.”
“그래요?”
“네, 북쪽 방벽과 붙어있는 에보니 마을은 기사들이, 그리고 남쪽 요새는 당연히 모야족 전사들이 큐브를 처리할 테니, 클리너들은 에테 마을과 영주 성, 그리고 우버 마을만 처리하면 될 겁니다.”
“부담은 없겠네요.”
치안대 1대대면 최초의 치안대 500명, 지금까지 마수를 상대해 왔던 치안대원들이었다. 지금까지 난리가 벌어질 때마다 방패를 들고 영지를 지킨 이들도 바로 그들이었고.
로빈이 새로 뽑은 2대대를 치안 목적으로만 운용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기사들과 전사들이 각 요충지를 지키게 되면 큐브를 클리어할 사람은 그들과 새로 뽑은 클리너들밖에 남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마수 범람이 일어나면 전선으로 투입되겠지만 말이다.
“치안대 2대대를 예비로 남겨놓은 상황이니, 병력적으로는 여유가 있어요. 진짜 마수 범람이 일어나면 유동적으로 배치하면 되겠네요.”
“네, 저도 그쪽을 걱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백랑이 기대 이상으로 잘 훈련해 놓은 치안대 2대대는 영지 병력 운용의 다크호스였다. 상황을 봐서 어느 쪽으로도 운용할 수 있는 여유 병력이었으니 말이다.
지온까지 물러나자 로빈에게는 쉬는 일만 남았다.
몸이 회복되기까지 대충 며칠. 또 겨울이 다가오니 그사이에 충분히 쉬고 뒤의 일은 후에 생각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번 휴식은 역시…….
“아우, 또 섰네.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야! 실비, 너 진짜!”
“아싸! 실비 갑니다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게 될 거 같았다. 평소라면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있을 실비아가 집에서 책을 보고 있는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고.
다이앤과 린이 각자 할 일을 찾아 집을 나선 상황이라 남은 건 실비아뿐이니 그녀의 독점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 진짜 무슨 이상한 걸 탄 건 아니지?”
“에이, 아니에요. 제가 좀 그렇긴 하지만, 영주님이 위급할 때 먹는 약에 무슨 이상한 짓을 했겠어요? 괜한 의심이세요.”
“정말이야?”
“그럼요~ 오예~ 독점!! 히힛!”
혼자 남아 저를 상대하는 실비아가 좋아하는 모습에 로빈은 그저 허탈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물론, 이 독점에 대한 대가는 나중에 따로 치르게 되겠지만 지금은 실비아에게 모든 걸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 * *
그렇게 다시 3일을 침대에서 비비고 나니, 얼추 몸이 회복되었다. 로빈의 어머니 마리아나는 로빈이 일어난 걸 축하하며 사비로 주민들에게 음식을 대접했고.
예전처럼 축제를 벌이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잠재적 위험이던 레드 큐브를 처리하고 쓰러졌던 영주가 다시 공식 석상에 서는 날이라 주민들 역시 한껏 밝은 분위기였다.
황실의 통신을 통해서도 황제가 각지에서 블루 큐브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고 있단 소식이 속속 전해지고 있어, 전국적으로도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그레이츠 영지로서는 다가오는 겨울이 또 다른 근심거리지만, 이제 다들 마수 따위는 영지의 안위를 어지럽히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영지민이 영지군의 저력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을 회복한 로빈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당연히 제필이 치료받고 있다는 신전.
제필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그에게 감사 인사라도 건네고 싶어서인데 막상 그가 요양하고 있는 신전 치료실 앞까지 도착해서는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굉장히 야릇한 교성 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서였다.
“호호, 제필 형제님은 교감 치료 중이랍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거예요.”
“교감 치료요? 혹시 사제님이랑?”
“아뇨, 연인 분이랑요. 사제님에게 치료받으실 정도는 아니라서요. 여신님의 이름이 북부 전역에 울려 퍼지면서 저희도 옛 능력을 다소 회복했거든요. 저 교감 치료법도 그중 하나죠.”
“아……. 그렇군요.”
아무리 이쪽 세상이라지만 혼인 날짜까지 받아놓은 제필이 치료를 받으며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 기분이 묘했는데, 다행히 그 상대가 애인이란다.
그리고 사제의 말에 따르면 약한 부상의 경우 사제와 몸을 섞지 않으면서도 치료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니 그건 상당히 좋은 소식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치료 목적으로 몸을 섞는 건 아무래도 조금 문제가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걸 더 노리는 발정 난 존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조금 꺼리는 편이었다. 특히 부인이나 애인이 있는 경우는 더 그랬는데, 짝이 없을 때는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리는 세상이지만 진짜 짝이 생기면 그쪽에 집중하는 게 미덕이라 그런 거 같았다.
평민이나 귀족이나 가릴 거 없이 혼전 과거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우선 맺어진 후에는 어느 정도 절조를 요구하는 분위기였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짝을 구하는 축첩 행위에 대해서는 또 관대해서 로빈으로서는 아직도 이런 관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음, 오늘은 그만 물러가야겠네요. 제가 방문했었다고 전해주세요. 몸 관리 잘 하시라는 말도 함께요.”
“네, 영주님. 그럼 살펴 가십시오.”
제필을 직접 만나보진 못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연인과 뜨거운 사랑을 나눌 만큼은 회복된 거 같았다. 그리고 그건 곧 다시 기사단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였기에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도 했고.
신전을 방문해 마음이 가벼워진 로빈은 바로 자신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백랑은 분명 큐브가 아니라도 몸이 부쩍 가벼워졌다고 했지만, 그로서는 전혀 그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혹시 큐브에 들어가면 조금이라도 체감할 수 있을까 싶어 린과 칸 그리고 듀발과 함께 큐브에 입장했는데.
“…전혀 모르겠네.”
“응? 주인은 안 그래? 난 확 다르던데.”
“그러게. 하……. 이거 설마 백분율로 몇 프로 상승, 뭐 이런 건가?”
내 스스로가 못 느낄 정도인 걸 보면 딱 그런 거 같았다.
예를 들어 린의 무력을 100으로 보고 20%가 상승해 120이 되었다면 그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지만, 나처럼 무력 1인 쭈구리가 1.2가 되어봤자 그 차이가 미미해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약발을 받으면 좀 달라지겠지?”
그래도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건 약을 빨고 수준이 올라가면 그만큼 증가분을 체감할 수 있을 거란 기대 덕분이었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우울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앗!!”
“음…….”
린과 함께 큐브에 입장한 건 린의 무력에 기대 내 현재 수준을 확인하고 안전하게 귀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린의 스킬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린이 스킬을 쓸 수가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