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안 되냐?”
“헤헤, 그러네. 사실 며칠 전부터 뭔가 해보려는데 영…….”
“음… 분노의 포격이라더니, 진짜 분노가 필요한 건가?”
상황을 봐도 그렇고 스킬 이름을 봐도 감정의 변화가 필요한 모양인데, 예전보다 더 강해져서 써는 족족 썰리는 놈들을 상대로 분노를 느낄 이유가 없었으니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썰면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슨 위기를 자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당분간은 방법이 없었고.
“칸! 물어!!”
“왕!왕!!”
그리고 칸.
요 녀석도 스킬을 활성화할 방법을 찾기 위해 큐브에 대동했다. 예전에 한 말도 있고 해서 다이앤이 눈치채지 못하게 겨우겨우 데려왔는데, 이 녀석 역시 내 명령이 떨어져도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꼬리를 흔들며 뛰어가 거칠게 짖고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예전 상황을 미루어보면 간절한 바람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신을 속일 정도의 연기력을 가진 게 아니라 간절하지 않은 걸 간절하게 바랄 능력은 없어서 녀석의 능력이 발동하지 않는 모양이다.
단순히 강하게 염원하는 정도로는 전혀 변화가 없었으니까.
“이거……. 완전 텄네. 곤란한걸.”
전체적으로 능력이 모두 올라간 건 정말 반가운 소식이지만 따로 칸과 린의 스킬을 이용하는 건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거 같았다. 아니면 상황이 따라주든지 말이다.
* * *
큐브에서 스킬 상태를 확인한 로빈이 린 그리고 칸과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며 며칠을 보내는 동안, 영지는 본격적으로 겨울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그때, 큐브에서 얻은 쪽지에 대한 해석이 완료되었다는 히센의 전언이 도착했다.
로빈은 득달같이 달려가 대체 무슨 말이 쓰여있는지부터 확인했는데.
[죄는 고통, 타락, 그리고 슬픔이로다.
다섯 하늘이 죄로 물들면 시험에 들게 되나니.
아홉 하늘이 물들어 심판에 드는 걸 경계할지어다.
심판의 재앙에 대항할 수 있는 건 극복한 자들뿐일지니.
이를 대비하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리라.]
“…뭐예요, 이건?”
“글쎄다. 솔직히 나도 뭐라고 판단하기 힘들구나.”
중2병에 걸린 녀석이 발로 휘갈긴 듯한 문구에 로빈은 할 말을 잃었다.
“타락과 슬픔, 그리고 고통이 죄라고? 타락이야 그렇다 치지만 고통과 슬픔이 무슨 죄야? 고통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첫 구절부터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건 무슨 재앙이 뒤따르고, 재앙으로 세상이 멸망할 수 있으니 이에 대비하라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저것도 ‘극복한 자’가 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으니 무용지물이랄까? 머리만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그냥 개소리일 가능성은 없겠죠?”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 하급 큐브라면 몰라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레드 큐브에서 나온 놈인데…….”
“곤란하네요. 우선 황제 폐하께 넘기죠. 솔직히 전 잘 모르겠거든요.”
“그러게나. 나도 따로 생각은 해볼 테니.”
영지에서 끙끙거리고 있어봤자 답도 없을 거 같아 황실에서 일하는 수많은 마법 공학자와 황도의 마탑, 그러니까 집단 지성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뭔가 문구 자체는 심오해 보이니 잘 파보면 조금이라도 유용한 정보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냥 개소리인 게 차라리 낫겠네요. 저건 뭐…….”
“그렇지. 특히 마지막 부분에 재앙을 언급하고 있으니…….”
“어쨌든 감사합니다, 히센.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히센에게 치하한 로빈은 바로 푸시 캣츠를 방문해 황제 쪽에 직통으로 연락했다.
[…이게 뭔가?]
“글쎄요. 그건 저도 잘……. 하지만 레드 큐브에서 나온 거니 뭔가 있을 거 같아 연락 드렸습니다.”
[흠, 좋아. 우선 조사해 보지.]
“결과가 나오면 저에게도 꼭…….”
적어도 영지보다는 황도의 연구 인력이 많을 테니 황제가 우리보다 빨리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쪽은 기다리다가 그 정보를 얻는 것으로 충분했다.
“준비는 어떠신지요?”
[걱정하지 말게나. 큐브는 무사히 클리어될 테니. 황실의 체면도 있는데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지. 아니, 그전에 문제가 생기면 황도가 위험해져.]
이 시기, 황제는 전국을 돌며 결국 모든 블루 큐브를 마무리 지은 후였다. 그리고 이제 곧 레드 큐브에 돌입하기 직전.
예전에 황도에 갔을 때 들은 소리도 있고 해서 슬쩍 떠봤는데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예전에 그 엉뚱한 계획은 역시 취소된 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어이없는 양반이라니까. 하긴 저 양반이 하는 일인데, 그럴 거면 뭔가 언급이라도 있겠지.”
통신을 끊고 그렇게 안심한 로빈은 황제가 무사히 황도의 레드 큐브를 공략하고, 다른 대도시로 손 뻗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빈에게 전해진 건 전혀 다른 소식이었는데.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들으신 그대롭니다. 황제 폐하께서 사경을 헤매고 계십니다.
“지금 바로 황도로 와주셔야겠습니다. 다이앤 황녀님도 함께요.”
황제가 레드 큐브를 클리어하면서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에 로빈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애써 침착하게 상황을 다시 확인했는데.
“혹시 무슨 작전에 들어간 건가요? 황실 통신실도 아니잖아요? 사실대로 말씀해 보세요.”
[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예전에 논의 중이던 작전은 이미 폐기했습니다. 귀족들의 불순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작전이었는데 변수가 너무 많다고 판단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작전이 아니라 진짜 쓰러지신 거라고요?”
[네, 후작님.]
“좋아요. 그러면 저보다 적임자가 상황 전하시니, 그분을 대동해도 상관없겠죠?”
[아, 그렇군요. 그분이 계셨죠. 만약 상황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희도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상황 전하께서는 절대로 궁으로 돌아오시지 않을 거라 하셔서…….]
“…그래요? 그럼 우선 그분께 여쭈어보고 행동할게요.”
[네, 하지만 서둘러주십시오. 다른 귀족들이 움직이기 전에 입궁하셔야 잡음이 적습니다.]
마지막으로 떠봤는데 젝트의 반응을 보니 진짜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나를 끌어들여 허점을 보인 후, 상대를 일망타진하려는 계략이라면 룩센 대제가 궁으로 돌아가는 걸 저렇게 반길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진짜 위기 상황이라면 나보다 정국을 안정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룩센 대제가 궁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았기 때문에 젝트는 오히려 룩센 대제의 복귀를 바라고 있는 분위기였다.
다만 황제의 말대로 룩센 대제가 그걸 허락하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 * *
“페리안이 큐브에서 큰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라……. 사위, 이게 정말인가?”
“저도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분위기만은 분명 그랬습니다.”
“페리안이 나를 청한 것이고?”
“우선 처음으로 청한 건 저와 다이앤이었어요. 다만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는 장인어른이 더 적당한 인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황제 폐하의 수족들도 저보다는 장인어른을 더 원하는 거 같고요.”
잠시 고민하던 룩센 대제는 고개를 저으며 황도행을 거절했다.
“아니야. 구신들이 대부분 물러난 지금, 내가 다시 황실에 들어가는 건 페리안에게 좋은 일이 아닐세. 정말 페리안이 목숨을 잃었다면 말이 다르지만, 지금은 그저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 아닌가?”
“사실 관계만 보면 그렇긴 한데…….”
“황제가 모략을 꾸미는 것이든, 아니면 진짜 다친 것이든 내가 궁에 들어가는 건 황제에게 손해만 끼칠 뿐이네. 만약 황제가 목숨을 잃는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황제가 살아있는 한은 내가 궁에 들어가선 안 돼. 현 황제의 치세에는 어떻게든 현 황제와 그 측근들이 정국을 주도해야 하네.”
“그거야…….”
“내가 황도로 복귀하면 다시 구신들의 정치가 시작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면 다시 황제가 돌아왔을 때 진통을 겪어야 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건… 그렇죠.”
“그러니 사위가 황도로 들어가 페리안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굳건히 지키게나. 그게 황실과 피를 이은 귀족의 의무일세.”
아들이 크게 다쳤다는 데도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룩센 대제의 모습에서 옥좌에 앉아있던 예전의 그 분위기가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물론 떨리는 손끝이 그의 마음을 솔직하게 대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룩센 대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며 같이 자리를 비운 구신들의 이야기는 로빈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우선 황도로 가 상황을 다시 파악해야 할 거 같았다. 지금은 황제의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괜찮겠어?”
“…그래요, 로빈. 어서 가요. 가서 황후 마마를 위로하고 황제 폐하께서 쾌차하실 때까지 황위를 지켜요. 로빈은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다이앤은 오히려 나보다 더 의연했다. 핍박받던 황족도 황족이라는 듯 자신의 의무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오히려 날 독려해 황도행을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 준비 없이 황실로 들어가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영주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겨울인데 상황이 더럽네요.”
“전사들이 몇 빠진다고 영지 방어에 구멍이 생기진 않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겨우 몇이 아니잖아요?”
로빈이 호위대로 구성한 인원은 기사단 20에 전사단이 80, 총 100여 명이었다.
지금의 근위대는 예전의 근위대가 아니지만 조셉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황궁 근위대 일부가 반란에 가담했던 걸 떠올려 병력을 넉넉하게 준비한 거였다. 나만 간다면 몰라도 다이앤을 호위한다고 생각하면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영주님,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지. 걱정하지 말라고. 마수 범람이 와도 알아서 잘 막고 있을 테니까.”
이번 황도행에서 전사들의 통솔은 백랑이 아니라 흑웅이 맡았다. 예상보다 출진이 길어질 걸 대비해 모야족을 완벽하게 통솔하기 위해선 백랑이 남는 게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황도에서 엉뚱한 사고라도 치면 대처하기 곤란하니 백랑을 일부러 남긴 면도 있었지만 말이다.
“좋아요. 가죠.”
그렇게 로빈과 다이앤을 포함한 그레이츠 병력 100여 명이 게이트를 타고 황도로 출발했다.
젝트가 원한 은밀한 황도행은 아니었지만, 워낙 서둘러서 그런지 젝트가 예상한 것보다 더 빠르게 황도에 도착했고, 황제의 변고를 눈치챈 귀족들이 궁으로 몰려오기 전에 무사히 궁에 들어설 수 있었다.
* * *
“황제 폐하께서는 어떠십니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래요?”
젝트에게 연락을 받고 황궁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다섯 시간. 황제의 측근들도 아직 방향을 잡지 못했는지 집무실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심각한 표정의 젝트와 애써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황후. 그리고 황제의 최측근으로 그와 함께 큐브를 클리어한 여기사 아이리스의 죄책감 가득한 얼굴이 상황의 중대함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정말, 황제가 다친 건가?
젝트와 황후는 기본적으로 웬만한 사람은 모두 속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연기에 능한 자들이었다. 특히 황후는 레이디 시절부터 제국의 사교계 꼭대기에서 군림하던 인물이라 표정 관리나 감정을 속이는 데 능숙한 인물이었고.
같은 고귀한 레이디라도 다이앤하고는 종자부터가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여기사 아이리스는 좀 달랐다. 이 사람은 천성이 강직하고 본 투 비 기사 같은 여자라 만약 황제의 부상이 거짓이라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슬퍼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우선 황제 폐하의 상태부터 확인하고 싶은데요. 가능할까요? 상황을 알아야 대책을 세우니…….”
“네, 가시죠. 후작님, 황녀님.”
뭔가 걸리는 게 있어서 로빈은 젝트에게 말해 황제 폐하를 살펴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젝트도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는지 아무런 불평 없이 그들 내외를 황제에게 안내했다.
황제의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다음 단계를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논의할 수 있어서 로빈과 다이앤의 요청이 경우에 어긋난 건 아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